78화
“미엘린, 불쌍해서 어떡해애! 미엘리인!”
저 입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 얼른 치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내 손짓을 받은 하녀들이 다 같이 세리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직 완전히 살롱에서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로시에가 세리나를 데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홀에서 빠져나갔다.
“크리스.”
“다녀와. 여기는 내가 해결할게.”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반의 팔짱을 꼈다. 우리마저 홀에서 나가자 크리스티나가 분위기를 쇄신했다. 노래를 바꾸고 사람들의 주의를 돌린 것이다.
하녀들이 세리나를 끌고 가고 있는 곳은 가이스의 이름으로 예약된 방이었다. 여기에서 어떤 더러운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세리나가 하녀들의 억센 힘에 끌려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에르긴은 아이반과 세리나를 불륜 관계로 만들 생각이었어요. 아이반의 잔에 약을 타서 세리나와 한 방에서 눈을 뜨게 할 생각이었죠. 그 장면을 사람들이 보게 하고요.”
아이반이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큼. 그런데 그걸 미엘린이 먼저 알아차린 겁니까?”
“그렇게 됐네요. 그래서 나는 받은 만큼 갚아 주려고 계획을 꾸몄어요. 아이반 대신에 세리나의 침대에 가이스를 밀어 넣기로 한 거죠.”
“……백작 부인도 가담한 겁니까?”
“네. 제 몸을 팔아서라도 얻고 싶은 게 있었나 봐요.”
어깨를 으쓱했다.
“아, 도착했네요.”
아이반이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는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침실 안에는 약에 취한 가이스가 누워 있었다. 술에 취한 것으로 보이는 세리나는 침대에 주저앉아 주절거리고 있었다.
발음이 명확하지 않아 한참이나 듣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미엘린, 도망쳐……. 맞고 살면 안 돼.”
“……저게 무슨 개소리야. 합.”
입을 틀어막고는 아이반을 힐끗 보았다. 아이반이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다. 다행히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것 같지? 목을 가다듬고는 태연한 척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약에 취해서 정신이 없는 것 같네. 로시에, 마무리해 줄 수 있지?”
내 눈으로 확인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을 뿐이었다. 나는 굳어 있는 아이반을 끌고서 방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제가 미엘린을 때렸습니까?”
“정신 나간 소리니까 들은 척도 하지 말아요. 아이반, 아이반?”
“제가 미엘린을…… 그런 적도 없지만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아이반, 나도 알고 있어요. 괜찮아요.”
아이반의 손을 흔드니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곤 나를 끌어안았다.
“미엘린…… 정말 불씨 없이 연기가 나기도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하루로군요.”
아이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키득키득 웃었다.
“맞아요. 자, 우리는 아이반의 옷을 갈아입으러 나온 거예요. 곧 하녀들도 나와서 제자리로 돌아갈 거예요.”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내 손에 이끌려 오는 모습이 레트리버처럼 보였다.
* * *
에르긴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왕비 이름으로 주최된 자선 모금 연회에서 틸리언즈 공작이 이렇게 더러운 일을 벌이다니! 아이반의 추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것을 예감해서 그런가 에르긴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아이반의 불행은 에르긴의 행복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이스의 이름으로 예약된 방은 알고 있었다. 그 방 또한 에르긴이 예약한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다행히 이쪽에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 그럼 쇼타임.”
에르긴이 중얼거리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는 생각한 대로 상체를 탈의한 남녀가 이불 속에 엉켜 있었다. 이 정도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되리라. 중요한 건 이 모습을 미엘린이 직접 목격하는 거였다.
에르긴이 고함을 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세리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에르긴은 그 자리에서 길길이 날뛰며 세리나에게 폭언과 비난을 퍼부었다. 남자를 남겨 두고 있는 것은 좀 더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함이었다. 저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그런 에르긴의 바람을 들어준 것일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에르긴이 세리나를 가리키며 고함을 지르는 것을 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침실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소란에 이기지 못한 세리나가 먼저 깨어났다.
약이 아니라 술에 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르긴은 아이반에게만 약을 썼다. 아이반은 그래도 남자라 술에 쉽게 취할 것 같지 않았고 연회장에서 술을 마시게 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세리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러다가 에르긴의 고함을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 이건 에르긴과 세리나가 만들어 낸 연극이었다. 미엘린을 지옥에서 구해 내기 위해서. 여기서 망할 수는 없었다.
세리나가 이불을 끌어안은 채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듯이 내려왔다.
“미, 미안해요! 에르긴, 이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당신이 제정신이야? 백작 부인이 이런 짓을 저질러? 그것도 왕비 전하께서 주관하시는 자선 모금 연회에서?”
물론, 아이반을 위한 대사 선택이었다. 에르긴이 입술을 휘어 올렸다.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며 세리나와 남자를 비난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아이반을 떼어 낼 수 있으리라.
세리나가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 고통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르긴이 남자를 손가락질했다.
“대체 그건 누구야! 어느 놈이랑 이런 짓을 벌인 거야! 솔직히 말하지 못해?”
세리나가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침실 안으로 떠밀려 들어온 하인 하나가 쭈뼛거리며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틸리언즈 대공님과 저는…… 그냥, 그러려던 게 아니에요.”
세리나가 울먹이면서 외쳤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저기 누워 있는 게 아이반 공작이라고?”
“저쪽에서 본 것 같았는데…… 사람이 그렇게 행동이 빠른가?”
“모를 일이지. 이렇게 보면 비슷한 것도 같고.”
세리나의 말에 긴가민가해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서 에르긴이 하인을 재촉했다.
“얼른 깨우지 못하겠나! 지금 이 상황에 관해 명명백백히 해명을 받아야겠어!”
“에르긴 백작에게는 날벼락이네요.”
“그런데…… 세리나, 저 여자. 에르긴 백작하고도 바람피운 사이 아니었던가요? 그 왜. 지금 틸리언즈 공작 부인이요. 그 사람이 원래 크로세타 백작 부인이었잖아.”
“그랬던 일이 있었죠? 저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랑 친했던 친구의 남편만 골라서…… 정말 악질이네요.”
“제 말이요. 귀족 망신은 저 여자가 다 시키는 거지.”
그 소리를 들은 세리나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지금 당장 목청을 높여서 저 여자들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이건 전부 미엘린을 위한 일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에르긴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세리나가 이불을 꾹 붙들었다.
미엘린이 이 마음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모든 건 해결될 것이다. 세리나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하인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올렸다. 듣기로는 속 안에 든 것이 엄청난 거물인 모양인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인생 종 치는 수가 있었다.
“저어…….”
하인이 조심스럽게 이불 위를 흔들었다.
“뭐야…….”
갈라진 목소리가 이불 속에서 흘러나왔다. 하인이 울상으로 에르긴을 돌아보았다. 에르긴은 하인을 재촉했고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좀 더 강하게 흔들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하인이 목청껏 외쳤다. 얼른 일어나서 지금 이 난리를 보고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 하인이 긴장된 마음을 숨기고 뒤로 물러섰다. 남자가 이불 속에서 꾸무적거리며 움직였다. 일어나는 대신 이불을 끌어 올려 다시 얼굴을 덮었던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침대를 퍽퍽 쳤다.
“잘 때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르긴이 속으로는 이제야 본성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아이반이 미엘린을 때린다는 건 거짓말이었는데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긴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에르긴이 낮게 외쳤다. 누워 있던 남자가 짜증스럽게 이불을 확 걷었다. 그리고 남자가 몸을 일으킬 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죠?”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긴이 속으로 외쳤다.
‘드디어 왔구나, 미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