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분명 이제 아이반과 내가 눈이 마주치고 서로에게 실망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겠지. 에르긴이 꾸민 바에 의하면 반드시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르긴의 예상대로 될 리가 있나.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에르긴과 내 눈이 마주쳤다.
“미엘린, 드디어……!”
에르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여전히 깊은 혐오감과 분노, 혹은 두려움. 그 모든 감정이 치솟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에르긴이 천천히 내 옆에 서 있는 아이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왜…… 당신이 거기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기 누운 남자가 아이반 공작 아니었어?”
“그러면 저기 누워 있는 건 누구란 거야? 공작 부인 옆에 선 게 당연히 틸리언즈 공작이지!”
“맞아요. 저렇게 잘생긴 얼굴이 여럿 있는 줄 알아요?”
에르긴이 파랗게 질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세리나도 놀란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이반이 시선의 홍수 속에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 멍청한 남자는 진실로 내가 순순히 당해 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무슨 이유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할까?
“미, 미엘린……?”
차가운 표정으로 에르긴을 오시했다. 그때였다.
“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주인공이 일어난 것이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난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가 저속한 욕설을 중얼중얼 내뱉으며 머리를 쳤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에르긴이 노호를 내질렀다.
“가이스! 너 이 개만도 못한 새끼!”
에르긴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가이스에게 주먹을 내다 꽂았다. 무방비하게 얻어맞은 가이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에르긴이 가이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본 귀족들이 호들갑을 떨며 기사를 불렀다.
흥미를 잃은 이들은 자리를 떠났다. 점점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와중에 가이스의 비명과 고함, 그리고 주먹질하는 소리만 남았다. 세리나가 덜덜 떨며 몸을 감싸 안았다. 너무 한심한 상황에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아이반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가요, 이만.”
“괜찮아요? 얼굴이 안 좋아요.”
고개를 작게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아이반과 함께 자리를 떴다. 왕비의 자선 연회를 이용해 저런 짓을 저지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왕비가 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말로 순진하기만 해서는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세리나와 에르긴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 * *
왕비가 고상하게 차를 마셨다. 생긋 미소 지으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괘씸하군요, 공작 부인. 내가 호의를 드러냈다고 해서 그걸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했나요? 이런 방식으로?”
“죄송합니다, 왕비 전하. 그러나.”
“그러나?”
왕비가 부드럽게 말끝을 올렸다. 지금 나는 날카로운 칼날 위에 올려져 있는 것과 같았다. 함께 불려 온 크리스티나가 내 손을 붙들었다.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는 듯 따뜻한 손길이었다.
“에르긴 백작은 그날 그 장소에서 일을 꾸미려고 했습니다. 세리나가 술에 취해서 오고 하인은 약을 가지고 있었지요. 저는 그저 대상을 바꾸어 주었을 뿐입니다.”
“아하.”
왕비가 “흠” 하고 소리를 흘리더니 날카로움을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
“모든 책임 소재가 확실하군요.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벌여 내 연회를 망친 것은 공작 부인이 아니라 그저 에르긴 백작일 뿐인 거예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이 일을 사전에 막지 않고 방조하여 왕비 전하의 명예에 누를 끼친 점은 사죄하고 싶습니다.”
왕비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벌을 줄 사람이 확실하니 이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어요. 이 일은, 아이반 공작의 명예와도 직결된 문제였을 거예요. 에르긴 백작이 벌인 일이라면 짐작하건대 그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던 사람은 아이반 공작이었을 거예요. 맞나요?”
“맞습니다.”
“좋아요. 내가 조금 양보하는 거로 하지요. 그렇게 되었다면 아이반의 명성에 크게 누가 됐을 거예요. 그건 헨리도 바라는 바가 아니지요. 왕실 또한 틸리언즈를 잃어서는 안 되고……. 내 아이 또한 틸리언즈가 필요하니 이 일에 공작 부인이 연루된 것은 덮어 두는 겁니다.”
결국, 책임질 자가 분명하니 나는 빼내 주겠다는 것이다. 내가 지킨 것이 내가 아니라 아이반과 틸리언즈이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왕비가 다시 순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이 일은 마무리되었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아이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자라더군요. 갓 태어났을 때는 그렇게 못난이가 없더니 지금은…… 너무 귀여워요.”
긴장하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내 손을 놓았다. “후우”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사실 왕비는 지금 사교계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다. 헨리가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조력자 아니던가. 게다가 헨리는 왕비 외의 다른 여자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왕비는 지금 왕국의 절대 권력자와 같았다.
왕비에게 맞춰 미소 지었다.
“아이들은 정말 금세 크더라고요. 데이지도 그래요.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라고 있답니다. 오늘은 드레스를 새로 맞추러 갔답니다. 키가 이만큼이나 자랐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어머나.”
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아기에게 책을 읽어 주러 오겠다더니 오지 않더라고요. 오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암, 틸리언즈의 후계자가 짧은 드레스를 입을 수야 없지요. 아. 이번 일로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요.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니까.”
왠지 모를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머지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 * *
“그런 어디서 굴러먹었을지 모를 놈을 건져 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에르긴이 분노를 토해 냈다. 가이스와 세리나가 한 침대에 누워 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가이스와는 완전히 틀어졌다. 멍청한 하인이 잘못된 대상에게 약을 먹이는 바람에, 꾸민 일은 망해 버렸고 남은 거라고는 모욕감과 분노뿐이었다.
세리나는 에르긴에게 뺨을 얻어맞고 제 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에르긴이 집무실을 서성였다.
‘뭔가 이상해. 이렇게 틀어질 리가 없는데…….’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마치 누가 자신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에르긴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러나 에르긴의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백, 백작님!”
에르긴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 들어온 보좌관이 에르긴을 향해 고함을 터뜨렸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내 인생이 큰일이야!”
에르긴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뭔지 말하게.”
“르웨긴 놈이 잠적한 게 맞습니다! 신원 정보는 말소되었고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미 르웨긴으로 가는 배를 탔다고 합니다!”
보좌관이 울상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에르긴이 책상을 걷어찼다.
“그게 무슨 개소린가! 조선 사업은 어쩌고? 돈은?”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투자받은 금액이 전부 불법 루트로 현금화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르웨긴의 주화로 바꾸었다고 하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뭣이!”
에르긴이 목덜미를 잡았다. 머리가 띵했다. 그놈에게 투자한 금액이 얼마던가! 게다가 에르긴의 돈만 투자한 게 아니었다. 드래곤 클럽에서 거액을 당겨 전부 투자하지 않았던가! 이 사실을 알면 노백작이 에르긴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새까맣게 바랜 미래가 다가오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일었다.
에르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다, 당장 경비대로 가야겠네! 왕성으로 갈 마차를 준비시키게! 왕께 직접 고해야겠어!”
“예, 백작님……!”
“절대 어디로도 새어 나가선 안 되네. 반드시 그 사기꾼을 잡아야 해!”
보좌관이 필사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긴이 백작 저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러나 굳게 닫힌 왕성 문은 에르긴 앞에서 열리지 않았다. 에르긴과 세리나가 왕성 출입 권한을 박탈당했다는 소문이 사교계를 휩쓴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왕비는 귀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벌 중 하나로 그들을 벌했다.
중앙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