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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80화 (80/92)

80화 @AW

왕비는 자기가 말한 건 확실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세리나는 사교계에서 완전히 퇴출당했다. 어느 누구도 세리나와 상대해 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세리나는 어떤 사교 모임에도 초대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대부인과 에르긴도 마찬가지였다.

왕비는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한 축인 ‘인맥’을 완전히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가이스는 아니었다. 가이스는 여전히 사교계를 종횡무진하며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다니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든다니까.”

귀족들은 가이스가 왕비의 철퇴를 피해 갔다고 생각했다. 혹은 왕실에 어떤 연이 있어서 이 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라고 여겼다. 유서 깊은 가문인 크로세타마저 내쳐진 가운데 홀로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가이스에게 투자하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고아원 건립은 무사히 끝났다. 내치에 집중하겠다던 헨리의 정책에 아주 걸맞은 일이었다. 집을 잃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제도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고아원은 전국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퍼뜨렸다. 가정복지부에 가이스와 같은 일을 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서는 귀족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건 모두 왕비가 의도한 일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면 짝 소리가 나게 맞장구를 쳐 주는 왕비의 수완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자신에게 쏟아진 제안서를 살펴보느라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라나. 그중에서 진실로 인성이 되고 목적이 확실한 자들만을 골라서 허가를 내고 예산을 편성해 주고 있었다.

그 돈은 당연히…… 에르긴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헨리 왕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했다. 드래곤 클럽에서 흘러나온 돈은 불법 루트로 세탁되어 헨리 왕의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빠듯한 가정복지부 예산에 깨끗하게 세탁되어 들어갈 예정이었다.

“즐거워 보인다?”

“당연하지. 크로세타 망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은데.”

크리스티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잘된 일이야. 제대로 당해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오늘 나와 크리스티나는 가장 번화한 거리의 커피 하우스에 나와 있었다. 번화가가 가장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말이다. 이 자리를 예약해 준 것은 왕비였다. 왕비는 우리가 반드시 오늘, 이 시간에 여기에 앉아서 밖을 구경하길 바랐다.

“왕비 전하는 우리를 왜 여기로 부르신 거야?”

“아직은 모르겠어.”

우리는 그 정답을 곧 알 수 있었다.

에르긴이 나타난 것이다. 에르긴은 모든 상점에서 거절당하고 있었다. 의상실부터 시작해서 하다못해 작은 베이커리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에르긴이 새빨개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이게 뭐야……?”

크리스티나가 중얼거렸다.

“왕비의 영향력이 이렇게까지라고?”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답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제 영향력이 이렇게까지 가능할 정도랍니다.”

“왕비 전하!”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왕비가 검지를 입술 위에 올렸다. 베일을 얼굴 위로 늘어뜨리고 눈에 띄지 않는 감청색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미다. 하얗게 질린 나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입을 봉쇄한 왕비가 남은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나와 본 것도 오랜만이네요. 그대들과 있으니까 또래들하고 수다를 떨러 온 것 같아.”

왕비가 소녀처럼 웃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사실 몰래 돌아다니는 거 정말 좋아했는데 아기를 가진 뒤로는 못했거든요. 아, 아기 이름이 결정됐어요. 헨리가 한 달이 되도록 끌 줄 누가 알았담.”

상기된 얼굴로 왕비가 작게 속삭였다.

“아기 이름은 애거사예요. 왕국의 역대 왕 중에 유일하게 여왕이었던 분의 이름이지요. 그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답니다. 헨리는 이 아이가 왕이 될 거라고 믿나 봐요. 하여간.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두고…….”

“애거사. 의미도 깊고, 예쁜 이름이네요. 왕녀 저하께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공작 부인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왕비 전하.”

“어머, 크리스티나 영애도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사실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구경을 하게 해 줬으니 왕비에게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아기의 미들 네임을 지어 줘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이 세계에서는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미래 왕이 될 아이의 미들 네임이라니!

“대모는 리엔스터 백작 부인께서 맡아 주시기로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왕비 전하!”

“물론 그래요. 그러나, 백작 부인은 거절하더라고요. 다 늙은 자기보다는 공작 부인이 어떻겠냐는 추천도 받았지요.”

“저를요?”

“차세대를 이끌 주역의 손을 잡는 편이 아기에게도 더 좋을 거라고 하더군요. 공작 부인,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어떻게 생각해.

사람 잘 알아봤다고 생각하지.

내가 그런 사람이야.

나와 크리스티나의 눈이 마주쳤다. 크리스티나가 흥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당연히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작명 센스가 완전히 바닥인데. 뭐가 좋지?

“고심해서 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왕비 전하. 이런 일을 맡겨 주시다니, 대단한 영광입니다.”

“우리 아기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죠. 오늘은 데이지가 왕성에 들어서 아기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답니다. 데이지에게도 동생이 필요할 것 같은데.”

왕비가 눈가를 찡긋하며 웃었다.

“아…… 기요?”

목을 가다듬었다. 아기라는 게…… 물론, 아기를 낳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기를 갖기 힘든 몸이었다. 공작 가의 후계와 관련이 된 일이라 어디 가서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함께 밤을 보내는데 아직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래요. 아이반과 공작 부인을 닮은 아기.”

왕비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믿어 주는 왕비가 고마웠다. 물론, 내 몸 상태를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때가 오면 내가 조카를 위해서 선물을 잔뜩 준비해야겠군요. 아차, 크리스티나 영애.”

“네, 왕비 전하.”

“이번 연회를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들었어요. 크리스티나 영애의 솜씨 덕분에 모두가 즐거웠다고 하더군요.”

“아닙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고…… 미엘린이 더 일을 많이 한걸요?”

“보기 좋은 두 사람이로군요. 오늘 이 자리는 즐거웠나요? 더 재밌는 구경이 남아 있는데 함께 갈래요?”

왕비의 제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비가 나와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장소를 이동했다. 왕비가 타고 온 고풍스러운 마차를 이용했다. 오랜만의 바깥 외출이라더니 왕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바깥을 구경하며 재잘거렸다. 그런 왕비가 지금은 어린 동생처럼 느껴진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크리스티나가 얼떨떨하게 웃고 있었다. 얼마 전에 차가운 분노를 표출하던 모습과는 천지 차이였다. 왕비는 자신이 정한 선만 넘지 않으면 모든 게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왕비와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세르미온 자작 가였다.

“여기는…….”

“두 번째 즐거운 구경은 이거예요. 나는 크로세타 백작 가를 건드릴 수는 없어요. 아직 그만한 명분이 모이질 않았거든. 그만큼 유서가 깊은 가문을 파내기 위해서는 귀족 중 누구도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돼요.”

왕비가 원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만약 누구라도 한 명 불만이 생긴다면 그들은 불안할 테니까요. 왕실이 언제든지 귀족을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우리는 그건 바라지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 왕비 전하.”

“그러나, 세르미온은 아니잖아요?”

왕비가 악동처럼 웃었다.

“세르미온은 다른 이에게 작위를 산 것을 여태 이어 온 것에 불과해요. 역대 왕이 임명한 귀족도 아니니……. 내가 어떤 처분을 하든 누구든 관여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지요.”

대체 무슨 판결을 내릴지는 모르지만 기대감이 불쑥 치솟았다. 세르미온이 그간 나로부터 가져간 돈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이곳에는 상간녀 소송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세리나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멍청이 미엘린이 배신을 당한 사건이었다.

내 복수에 왕비가 종지부를 찍었다.

“세르미온은 다시 작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날 거예요. 감히 왕실의 작위를 사고판 이들도 전부 조사를 받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백작 가가 무너진 이후 세리나는 꿈꾸던 신데렐라의 삶에서 내려와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탐하는 걸 그만두겠지.

왕비의 마차는 멀찍이 서서 밖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왕성에서 나온 경비대가 세르미온 자작 가를 급습했다. 참으로 속 시원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타인의 부를 이용해서 제 배를 불리며 살아온 자들이었다.

귀족이기에는 너무 자격이 없지 않나.

“감사합니다, 왕비 전하.”

“공작 부인이 고마울 일이 뭐가 있어요? 그저 나는 정의로운 일을 했을 뿐인데.”

왕비가 내게 눈을 찡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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