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세리나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울음을 터뜨렸다. 코가 맹맹해질 때까지 울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에르긴이 시키는 대로 술을 마시고 용기를 내 연회장에 갔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기억조차 나질 않는 것이다.
“뭘 잘했다고 우는 거냐! 세르미온 자작 가가 망했다. 사람들이 크로세타도 그렇게 망할 거라고 떠들어 대더구나! 이래서 사람 한 번 잘못 들어오면 가문이 망한다더니.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나도 사교 모임에서 퇴출당했다. 크로세타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어!”
왁왁 소리를 질러 대는 대부인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질 않는다. 지금 세리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에 침식되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감히, 감히 그런 더러운 작자가. 가이스 따위가!’
그런 자와 한 침대에 누워 명예를 더럽혔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이 세리나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옆자리에 누워 있었어야 했던 것은 고귀한 아이반 공작이었다. 그런 남자가 아니라! 세리나가 그런 남자와 닿을 수나 있는 사람이었던가.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거냐니까 뭘 울고만 있어! 당장 나가서 어떻게라도 해 보란 말이다!”
대부인이 발을 쾅쾅 굴러 댔다.
“세리나!”
“시끄러워요!”
세리나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놀란 대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간 무슨 일이 있어도 당하기만 하던 세리나가 소리를 지르니 놀란 것이다.
“닥치라고요! 좀 닥쳐! 내 인생도 만만찮게 망했으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잘난 아드님이 시킨 대로 하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요! 일 처리도 제대로 못 한 건 에르긴이라고요!”
세리나가 눈물을 폭포처럼 흘렸다.
“더럽고 치욕스러운 건 나예요! 감히 그딴 남자가 내 옆에…….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던 건 공작이었다고요!”
세리나를 이 지옥에서 빼내 줄 아이반 공작!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본심이 튀어나왔다. 사실 미엘린이 아이반에게 맞고 사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세리나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들을 밟아 줄 아이반 공작의 권력과 힘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에르긴조차도 아이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한다.
사람들이 미엘린을 좋아하는 것도 공작 부인이 되어서다. 그러니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리나에게 이 일은 아이반에게로 아득바득 기어 올라갈 기회로 보였다.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회심의 기회!
그런데 에르긴의 실수로 모든 게 망해 버렸다. 자신은 그냥 몸을 함부로 하는 여자로 전락해 버렸다. 세리나가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이렇게 살 사람으로 보여?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미엘린의 곁에서 세리나는 항상 반짝였다. 사람들이 세리나를 떠받들었고 뒤에서 욕하더라도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해 주었다. 그랬는데. 모든 게 망쳐졌다.
처음에 백작 부인이 되었을 때는 그래도 미엘린처럼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에르긴은 사실상 가진 게 없었다. 에르긴 또한 세리나처럼 미엘린에게 기생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세리나와 다를 바 하나 없는 주제에 그렇게 콧대를 세웠던 거다.
그걸 백작 부인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세리나는 그저 자신과 똑같은 구렁텅이로 굴러들어온 거였다.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처연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라나는 세리나에게 세르미온 부인은 세뇌하듯 말했다.
너는 잘할 거다. 너는 가문을 일으킬 수 있을 거다. 너는 좋은 가문으로 시집갈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중 무엇이 이루어졌나.
미쳐 버릴 듯한 건 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세리나의 발목에 들러붙어 기생하는 것들이 그녀를 밑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대부인이 세리나의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섰다.
“미, 미친 계집애.”
대부인이 더듬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세리나가 그러다가 기운이 다했는지 픽 쓰러져 주저앉았다. 바닥을 두드리며 발버둥을 치던 세리나가 일순 허리를 꺾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대부인이 침을 삼켰다.
격렬하게 헛구역질을 하는 통에 저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백작 가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면 사람들은 에르긴을 의심하게 된다. 게다가 지금 세리나는 바람을 피워 백작의 분노를 샀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던가. 그건 안 된다.
대부인이 의사를 불렀다.
그리고 대부인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임신입니다. 아이를 가지셨습니다.”
세리나가 침대에 누운 채로 눈물을 흘렸다.
정말 되는 일도 없지.
세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깜깜한 미래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 * *
데이지는 공작 저의 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또 어디서 저런 예쁜 짓을 배워 왔는지.
“데이지. 윙크 어떻게 한다고?”
“이렇게, 이렇게요!”
크리스티나가 뒤로 넘어갔다. 후. 저게 바로 사람 홀리는 구미호라는 건가. 데이지를 넋 놓고 보고 있다가 빠진 턱을 끼워 넣었다. 데이지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아역 배우를 수백 번은 더 했을 것이다. 데이지가 하고 싶다고 하면 내가 손잡고 데리고 다녀 줬을 텐데.
우리 애가 저렇게 예쁜데 자랑할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미엘린, 나 예뻐요?”
“엄청 예뻐.”
두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데이지가 두 뺨을 감싸고 배시시 웃는다.
“그러면 테인에게도 예뻐 보일까요?”
“누구?”
크리스티나가 멈칫하고는 물었다. 중성적이기는 하지만, 남성의 것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름이었다. 나도 슬그머니 크리스티나 옆에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위험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테인이라니? 처음 들어 본다.
“그으…… 기사님 이름이 테인이래요.”
“그런데?”
“왕비 전하를 만나러 갔다가 만난 기사님인데요…….”
“남자야, 여자야?”
크리스티나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데이지가 몸을 배배 꼬았다.
“남자요……. 테인 오빠는…… 10살이래요!”
수습 기사로구나.
크리스티나와 내 눈이 마주쳤다. 게다가 오빠라니.
“……내가 먼저 만나 볼 수 있을까?”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야, 순서 지켜.
“내가 먼저 보고 싶은데.”
“우웅?”
데이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테인은 바빠요. 매일매일 수련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지 멋있는 기사님이 될 수 있는 거라고.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한대요.”
성실하긴 하군.
“데이지는 테인의 어디가 좋아?”
데이지가 눈을 깜빡이고는 몸을 숙였다. 데이지에게 맞춰서 나와 크리스티나가 허리를 숙였다.
“우웅……. 테인은 아빠 같아요.”
나와 크리스티나가 숙연해졌다.
“아빠처럼 노래도 잘 부르고 데이지한테 친절해요.”
우리는 알지 못하는 미묘한 어떤 것을 테인으로부터 느꼈을 것이다. 데이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테인이랑 친해지고 싶어요.”
“그래서 테인한테 예뻐 보이고 싶어?”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를 꼭 끌어안았다.
“테인도 분명 데이지가 예쁘다고 생각할걸?”
“정말요?”
“나중에 내가 몰래 물어봐 줄까?”
“으응……. 안 돼요!”
“왜?”
“부끄러워…….”
데이지가 내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데이지를 꼭 끌어안고 여기저기 뽀뽀했다. 고슴도치라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한다지만…… 데이지는 누가 봐도 예쁠 것이다. 암!
“데이지는 테인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뭐? 데이지는 나랑 평생 살기로 했잖아. 프러포즈했던 거 잊어버린 거야?”
“우웅?”
데이지가 곰곰이 생각했다. 이런 거로 심각해질 수 있는 데이지가 귀여울 뿐이었다. 앙증맞은 코를 깨물어 주고 싶었다.
“다 같이 살면 되면 안 돼요? 테인이랑 숙부님이랑 미엘린이랑…….”
손가락을 꼽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늘어놓는다. 또 이상한 심술이 치솟았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심각한 데이지에게 속삭였다.
“단 한 사람만 뽑아야 한다면?”
“어……?”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통통한 볼을 부풀리고는 곤란한 얼굴을 하던 데이지가 울먹였다.
“딱 한 사람만? 꼭?”
“응, 꼭.”
크리스티나가 혀를 찼다. 나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응……. 으으응…….”
데이지가 울먹이면서 내 품에 고개를 비볐다. 그러고는 고개를 빼꼼 들어 내게 말했다.
“미엘린이 다 같이 살게 해 주면 안 돼요?”
하. 심장 아파.
“그래. 내가 해 줄게. 나라서 해 주는 거야, 데이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면 안 돼.”
“정말?”
“그럼.”
“미엘린 최고!”
데이지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데이지가 계속 이 나이였으면 좋겠다. 진실로 데이지가 자라는 게 아쉬웠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어 둘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데이지가 평생 우리 품 안의 아기로 살았으면 좋겠다.
데이지의 뺨에 키스했다.
“그런데 데이지?”
“네? 이건 숙부님한테는 비밀로 하자.”
“왜요?”
“글쎄…….”
크리스티나와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랑과 평화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