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문득 데이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이반.”
“네?”
“데이지가 결혼한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나요?”
아이반이 내게 기울였던 몸을 일으켰다. 나를 보던 그윽한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결혼이라고요? 누구와 결혼을 하는 건가요?”
“모르죠? 하지만, 데이지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아이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심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일단 데이지의 남편이 되려면…… 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똑똑해야 하고…….”
아이반은 그 외에도 수많은 조건을 늘어놓았다. 저런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건 왜 묻습니까?”
“그냥 생각나서요.”
아무래도 테인의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테인에 대해서 알게 되면 아이반은 당장 왕성 기사단으로 가서 그 애를 찾아낼 것 같았다. 성품상 아이를 괴롭히지는 않을 테지만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 대겠지.
“그런 생각은 아직 하고 싶지 않군요. 데이지가…… 결혼이라니. 데이지는 저와 결혼한다고 약속했습니다.”
글쎄. 이미 그 마음 바꿔 먹은 것 같던데.
그런 말을 했다가는 여러 사람 곤란해지겠지? 아이반을 꼭 끌어안았다.
“아이반은 안 돼요. 나랑 결혼했으니까. 청혼한 걸 잊어버린 거예요? 평생 같이 살자더니.”
아이반이, “윽” 하는 소리를 내고는 순순히 내 품에 잠겨 들었다. 녹아드는 아이반의 체온에 나 또한 잠겨 들었다.
* * *
술에 절어 잠들었던 에르긴을 집사장이 흔들어 깨웠다. 백작 가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변고가 생겼던 것이다. 르웨긴의 사기꾼에게 당한 드래곤 클럽의 귀족들이 매일같이 찾아오고 있었다.
에르긴은 저택 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노백작의 고함이 저택을 뒤흔들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르웨긴 남자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자의 행적은 지우개로 지운 듯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에르긴은 전 재산을 날린 것이다. 빚쟁이들이 찾아오고 저택에 손님다운 손님은 끊겼다. 영지도 이미 현금화하기 위해 내놓은 지 오래였다.
거기에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백작님! 일어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에르긴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백작 부인께서 임신하셨습니다.”
“미엘린이?”
“아니요.”
집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세리나가?”
에르긴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누구 앤데?”
“예?”
“그게 누구 씨냐고 묻고 있잖나. 그게 가이스의 씨인지, 아이반의 씨인지, 혹은 내 씨인지. 누가 안단 말인가.”
집사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에르긴이 냉소를 흘렸다.
세리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스스로이면서도 그건 까맣게 잊은 얼굴이었다. 에르긴이 물먹은 솜 같은 몸을 늘어뜨리고는 뇌까렸다.
“내 씨가 아닐 수도 있는 아일 내가 왜 받아들여야 하지?”
“정말 미쳤군요.”
마침 집무실로 찾아왔던 세리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품은 남자는 당신뿐이야! 어떻게 내게 그런 치욕스러운 말을…… 이 아이는 당신 아이예요!”
절망스러운 건 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에르긴 같은 쓰레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기쁠 리 있겠는가. 세리나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사람들이 뭐라고 떠드는 줄 아나? 당신더러 뭐라고 하는 줄 아느냐고!”
“누가 날 그렇게 만들었는데! 당신이 나를 밀어 넣은 거잖아요!”
“좋다고 뛰어든 게 누구였지? 솔직해져 봐, 세리나. 정말로 미엘린이 맞고 산다고 생각한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 아니고? 그 사이에 끼어들 명분이 필요했던 거겠지! 나와 미엘린 사이에 낀 것처럼!”
“에르긴! 내 탓 하는 거예요? 나를 끌어들인 건 당신이었어요! 내게 침실 문을 열어 준 거잖아!”
“거절하지 않은 건 당신이었지. 기다렸던 거 아니었어? 미엘린 주위를 맴돌며 파렴치한 눈빛을 내게 계속해서 보냈지. 수작질을 부린 거야. 나는 거기에 넘어간 거고!”
“나를 유혹한 건 당신이었어요! 나는…… 나는 협박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안 넘어갔어!”
잘못을 서로에게 떠넘겼다. 두 사람 사이에 고함과 비명이 오갔다. 집사장이 집무실 문을 닫아걸었다. 밖으로 새어 나가면 백작 가 망신밖에 더 되겠는가. 두 사람은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른다.
집사장이 휑하게 비어 버린 백작 가를 둘러보았다. 급속도로 쇠락하는 크로세타에 더 이상 미래는 없어 보였다. 생긴 아이에게는 불행하게도.
* * *
어두운 곳이 있으면 밝은 곳도 있는 법.
헨리는 아이반과 나를 초대해서 만찬을 열었다.
“이게 다 자네가 벌어다 준 돈으로 차린 음식이네.”
헨리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공작 부인.”
“네?”
“왕비가 부인에게 아이 이름을 부탁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았는가?”
헨리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만찬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이 내게로 쏠렸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온다고?
물론 고민을 오랫동안 하긴 했다. 옆집 강아지 이름 지어 주는 것처럼 아무거나 지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고심 끝에 내가 결정한 미들 네임은…….
“엘리제나. 엘리제나는 어떨까요?”
“애거사 엘리제나 타레이나…… 괜찮군. 어떤 의미를 담았지?”
“엘리제나는 신께서 가장 먼저 사제로 삼은 이의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엘리제나 사제는 평생 사람들을 위해서 사셨다고 들었어요.”
“성현의 이름이로군. 엘리제나 사제라. 그래, 들어 본 적이 있네. 평생 사람들을 위해서 살다 갔다니. 어떤 면에서 왕의 의무와 닮았지 않은가.”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평생 왕국민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야. 애거사에게 그것을 되새김질 할 수 있도록 해 줄 좋은 이름이로군. 마음에 들어. 왕비는?”
“저도 마음에 들어요, 헨리. 아주 고운 이름이군요. 고마워요, 공작 부인.”
“아닙니다.”
후, 통과했군.
어려운 숙제를 하나 해결한 것이다.
“아, 노백작이 건강을 핑계로 은퇴를 한다더군. 드래곤 클럽이 문을 닫는다는 소문이 자자해.”
헨리가 앓던 이가 빠진 얼굴로 웃었다. 저 정도면 사랑니 세 개는 한 번에 뽑은 듯한 후련함이었다.
아이반에게 듣기로는 드래곤 클럽이 헨리의 정책에도 자꾸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방해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노백작은 자신의 권력이 헨리 위에 있다는 듯이 굴었다고. 왕으로서는 골칫거리이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백작이 이번에 에르긴으로 인해 큰돈을 잃고 자리보전하고 누웠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결국, 드래곤 클럽 폐지까지 간 모양이었다.
“저희끼리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더군.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치들이니 주먹질이나 할 줄 알아야지! 서로 탓을 하면서 채신머리없이 싸우다가 경비대에 연행된 것을 자비롭게 풀어 준 일이 있었다네.”
그들의 돈을 꿀꺽한 자가 자비롭게 말했다.
“에르긴 백작은 지금 칩거하고 있다던데……. 들은 이야기로는 백작 부인이 임신했다더군.”
세리나가?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에르긴 백작은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네. 이 얼마나 재밌는 일인가.”
헨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반, 백작은 그 아기가 자네 아이라고 주장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아이반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몸이 닿기만 하면 아기가 생기나?”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남 탓 하기 좋아하고 자기 잘못은 모르는 에르긴다운 반응이었다.
“가이스하고 에르긴은 완전히 틀어진 것 같던데. 왕비가 곧 리엔스터 백작 부인에게 압박을 넣을 예정이네. 가이스가 하는 사업에 문제가 있다면서 고발을 할 생각이지.”
“맞아요. 인제 그만 사업을 정리할 때도 되었지요. 복지 사업을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맡겨 둘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돈을 많이 해 먹은 것 같던데.”
왕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돈은 평생 갚아야 할 거예요.”
왕비가 서늘하게 말했다. 헨리는 그런 왕비가 예뻐서 못 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고아원 사업에 새로운 책임자가 필요할 것 같아요.”
왕비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겠지.
그 사업 자체는 나쁜 게 아니었으니. 애초에 이렇게 판을 키우게 둔 것도 에르긴 돈으로 고아원을 세워서 꿀꺽하려던 것 아니었던가. 제대로 된 적임자만 찾아 주면 사업은 정상 궤도에 오를 것이다.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게 하는 거다. 원래 고아원의 의도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