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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83화 (83/92)

83화

“미엘린 공작 부인?”

“네?”

갑작스럽게 이름이 불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 일의 적임자로 공작 부인이 어떨까 해요?”

“예?”

왕비가 미소 지었다.

“사실 공작 부인에게는 넘치는 돈이 있잖아요? 살롱 사업도 잘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에르긴의 살롱은 문 닫기 직전이라고 하더군요.”

“그야…….”

“돈이 넘치도록 많으니 굳이 공금을 횡령할 생각은 안 하겠죠.”

“그거야…….”

“게다가 공작 부인은 기본적으로 어린아이들을 예뻐하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무해하고 순수한 아이들을 누가 미워하겠는가. 데이지만 봐도 그렇다.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해맑음을 언제까지고 지켜 주고 싶었다. 엉성한 피아노 실력에 맞춰서 노래를 불러 주는 선함을 지켜 주고 싶었다.

아이란 본디 그런 존재 아니던가? 무조건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그러니 적임자라고 생각해요.”

“좋은 생각이로군. 공작 부인, 그대만 한 적임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야. 요즘 귀족들은 어쩜 그렇게 욕심이 많은지.”

헨리가 왕비를 거들었다.

큼. 사실 조금 생각하긴 했다. 에르긴이 하는 것들은 전부 빼앗아 오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고……. 내가 하면 저 새끼보단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고…….

“제가…… 그래도 될까요?”

그리고 돈 쓰는 건 정말로 자신 있었고. 가진 돈도 많은데 고아원에 약간 더 보탠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이야. 그래 주면 내가 오히려 고맙겠군.”

“그럼 제가 해 볼게요.”

“두 사람에게는 내가 짐만 얹어 주는 것 같군.”

화기애애한 저녁 만찬이었다. 인생은 참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이게 미엘린이 바라는 미래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미엘린이 싫어할 미래는 아니라는 건 알겠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은 벌을 받았다.

만족하니, 미엘린?

* * *

에르긴은 내내 술을 마셨다. 더러운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미엘린을 되돌리려고 했던 일들이 전부 에르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거지 같은 가이스는 제 죄도 모르고 사교계를 돌아다니고 있단다.

세리나는 저택에서 내쫓았다.

왕의 명령이고 뭐고 가문이 망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배 속에 든 것이 누구 씨이든 간에 제 아비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가이스에게 가든, 아이반에게 가든 알 바가 아니었다.

처참했다.

가장 반짝이는 별이 된 줄 알았는데 에르긴은 지금 시궁창에 있었다. 발을 잡아끄는 늪을 뿌리치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고작 돈 때문이었다. 그 돈 때문에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거다.

미엘린만 돌아오면 모든 게 해결될 문제였는데.

“미엘린…….”

에르긴이 들끓는 목소리를 흘렸다.

미엘린이 가진 돈만 있다면 빚을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드래곤 클럽의 돈을 일부를 갚아 줄 수도 있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에르긴이 행복한 상상에 젖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 생각이 현실로 구체화되었다.

눈을 감으면 그가 바라는 세계가 펼쳐졌다. 미엘린이 옆에 있고 사람들이 에르긴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에르긴은 고급 정장을 입고 값비싼 와인을 마시며 미엘린에게 속삭이는 거다.

‘사랑해.’

그리고 미엘린은 에르긴을 위해서 예전처럼 모든 걸 해 주는 거다. 그 기반에는 미엘린의 사랑이 있었다. 에르긴이 눈물을 흘렸다. 이 상상 속에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칠 수도 있었다.

‘나도 사랑해요, 에르긴.’

상상 속에서 미엘린이 속삭였다. 그러나 상상이 아무리 행복하다고 한들 눈을 뜨면 다시 현실이었다. 차갑고 어둡기만 한 현실. 현실 속에서 미엘린은 곁에 없었다. 에르긴 혼자 남아 쓰디쓴 술을 마시고 있는 거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에르긴이 두려움과 외로움에 사무쳐 얼굴을 감싸 쥐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건지.

가졌다가 놓친 것에 대한 욕심이 치솟았다. 과거에 대한 후회가 에르긴을 뒤덮었다. 그러나, 문제는 에르긴이 거기서 끝낼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영원히 가지지 못할 바에는…….

에르긴의 손 사이로 지독한 눈빛이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지옥을 불러일으킬 것만 같은 악독한 눈빛이었다. 에르긴이 어둠으로 점철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여 버리겠어.”

가지지 못할 바에는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게 나았다. 에르긴이 스산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가주의 집무실에는 몸을 지키기 위한 호신 물품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책상 서랍에 처박혀 있던 단검을 찾아내 책상 위에 올렸다.

아이반 공작을 죽이기란 무리일 것이다.

에르긴과 아이반의 체격 차이도 심한 데다가 그자의 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상을 바꾸면 된다. 미엘린.

“같이 가는 거야. 원래 부부는 한 몸이지.”

에르긴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미엘린을 두고는 어디도 떠날 수 없었다. 에르긴이 가야 할 곳이 나락이라면 미엘린도 가는 거다. 그들이 결혼했던 날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대로.

* * *

날이 밝자마자 웨스턴과 클로린을 불러들였다. 살롱 일을 마무리 짓고 쉬고 있던 이들이 급작스럽게 불려 온 것이다.

“이번에 새로운 일을 하나 더 맡게 될 것 같아요.”

“어떤 일인가요?”

클로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이스가 하는 고아원이요. 그게 제 책임으로 넘어올 거예요.”

“어머.”

클로린이 놀란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역시. 돈이 흐르는 게 심상치 않다고 동료들이 이야기하더니.”

“이번에 가정복지부에서 감사가 들어갈 거예요. 왕비 전하께서 단단히 벼르고 계시거든요. 그러고 나면 책임자가 새로 필요할 텐데 그게 내가 될 거래요.”

큼, 큼.

뭔가 자랑하는 것처럼 되어 버려서 부끄러워졌다.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이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했으면 좋겠기에 두 사람을 불렀어요. 돈이 모자란다면 사비를 보태서라도 제대로 해 보고 싶거든요. 아이들이 부족하지 않게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고아원 사업은 명성은 쌓을 수 있겠지만 수익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겁니다.”

“웨스턴 씨, 이 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니 걱정 않아도 됩니다. 이미 돈은 이골이 날 만큼 벌고 있어요. 그 돈 죽어서 다 싸 들고 갈 것도 아니고. 올바른 곳에 쓰고 싶네요.”

“……아무리 자산이 많아도 그런 결심을 하시기가 쉬운 게 아님을 잘 압니다.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공작 부인.”

“고마워요, 웨스턴 씨.”

“저도 그러고 싶군요. 지금도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 이런 일까지…….”

“사실 아직 제게 넘어오려면 시간이 있는데 들떠서 두 사람을 불러 버렸네요.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또 시간을 할애하게 한 건 아니지요?”

“아닙니다. 이번에도 제게 일을 맡겨 주셔서 감사한걸요. 그쪽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자산과 필요한 자산을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저는 법적인 부분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어디까지 해 줄 수 있고 어느 범위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철저하게 알아 오지요.”

“좋아요. 두 사람이 있어서 든든하네요.”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사실 고아원에 필요한 자산이나, 법, 혹은 회계 관련한 일들은 내가 알 수 없었다. 미엘린조차도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아니던가.

그러니 필요한 일에는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게 맞는 거다. 다행히 내게는 적재적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복 받은 인생이지. 미엘린이 말한 대로였다. 나는 내가 행복해질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가장 강력한 힘 아니겠는가.

* * *

미엘린이 콧노래를 부르며 제 일을 하고 있을 무렵, 데이지는 아가 동생을 위해서 왕비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미엘린이 같이 가 주겠다고 했지만, 혼자 가겠다고 거절했다. 테인이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였다.

데이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 음……. 테인!”

함께 수련하는 기사들과 순찰하고 있던 테인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데이지?”

테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데이지로 인해 같이 수련받는 이들에게 한참 놀림을 받은 참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진지하게 조언했다.

‘어차피 오르지 못할 나무야. 우리 같은 고아 출신 기사들이 저 애를 상대로 연애 감정 품어 봤자 어쩌겠어? 어릴 때 자르는 편이 나아. 그냥 가까이 안 하는 게 낫다고. 너만 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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