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틀린 말이 아니었다.
10살의 테인과 6살의 데이지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테인은 먹을 것이 없어 자원해서 기사단 수련 기사로 들어왔다. 그전에는 길거리를 떠돌며 구걸을 하며 살았다. 그나마 기골이 장대하고 재능이 있다고 해서 기사단장이 받아 준 거였다.
수련을 게을리하면 테인은 다시 길바닥으로 내몰려야 했다.
테인은 그런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데이지와 놀아 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테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데이지가 배시시 웃고는 테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엔시가 놀란 얼굴로 데이지를 쫓아왔다.
“아가씨! 애거사 왕녀 저하 보러 가신다면서요!”
“우웅, 잠깐만!”
데이지가 테인의 손목을 붙들었다.
“테인!”
“찾아오지 말라니까.”
테인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왜애. 테인, 나 봐 봐. 얼른!”
데이지의 조름에 못 이겨 테인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데이지가 눈을 찡긋하며 윙크했다.
“어때? 케일린한테 배운 건데……!”
이렇게 하면 케일린 말로는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준다고 했다. 실제로 미엘린과 크리스티나, 아이반도 데이지가 바라는 걸 다 들어주었다.
테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수련하느라 검게 탄 테인과는 다르게 하얗기만 한 데이지다. 게다가 오밀조밀하게 생겨서는 고귀한 공녀님 태가 난다.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내린 뒤 묶은 리본값이 테인의 한 달 식비보다 비싸리라.
“……나한테 이런 거 하면 안 돼.”
“왜?”
“그렇잖아. 공작 부인도 안 좋아하실걸?”
“우웅? 아닌데. 미엘린은 괜찮다고 했어.”
데이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데이지. 네가 어려서 아직 뭘 모르는…….”
“신분은 중요하지 않아. 아버지가 그랬어.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데이지가 또박또박 말했다.
“테인, 나쁜 사람이야?”
입을 틀어막힌 테인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데이지를 응시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데이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우리 계속 친구 하는 거야!”
테인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왕비의 엄명이 가정복지부에 떨어졌다. 신고가 들어온 내용에 따르면 가이스가 고아원에 들어가야 할 예산을 빼돌려서 도박을 일삼고 있다고 하니 그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논의된 연극에 동참했다.
“이래서 그런 말이 있는 거다, 개가 똥을 못 끊는다는. 도박에 손을 댄 자가 쉬이 손을 뗄 수 있겠는가? 가서 가이스의 발바닥까지 뜯어 오게. 그 작자가 어디로 나돌았고 누구를 만났으며 무슨 짓을 했는지 조금도 놓치지 말고.”
“네, 장관님!”
명령을 받은 직원들이 뛰어나갔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은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용서해 주는 상사가 아니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책임지고 있는 분야에서 문제가 생긴 지금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다시 평화를 찾는 지름길이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팔짱을 꼈다.
‘가이스가 얼마나 돈을 모아 두었으려나.’
가이스가 도박장에 출몰하기는 했다. 하지만, 워낙 작은 그릇으로 살아온 인생이라 그런지 고아원에서 빼돌린 거액은 써 보지도 못하고 나왔다. 툴툴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면서 말이다.
만약 가이스가 거액을 도박장에서 진실로 소모했더라면 진즉에 잡혀 와서 이곳에 있었으리라.
“다행인 건지.”
가이스는 어떤 면에서 보면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였다. 에르긴뿐만 아니라 왕비와 공작 부인도 가이스를 이용한 것이 되니 말이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배 속을 덥혔다.
* * *
“미엘리인, 미엘린!”
저러다 숨넘어가겠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한 줄 알겠다. 고개를 내젓고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케일린의 저택에서 교습을 받고 돌아왔을 뿐인데 일주일은 떨어져 있었던 듯 뛰어오는 것이다.
“데이지.”
“미엘린!”
데이지가 까르륵 웃으며 내게 폭 안겼다. 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오늘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많아서 잠은 어떻게 자는 건지.
“우리 예쁜 종달새. 그래서 오늘도 즐거웠니?”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일은 아가 동생을 보러 가는 날이에요. 미엘린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나도?”
흠. 내일 이렇다 할 일정이 없기는 했다.
“테인을 보여 주고 싶어요.”
데이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반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내 당부를 착실하게 지키는 덕에 테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저렇게 속삭이곤 했다. 데이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응? 미엘리인.”
내 손을 잡고 흔드는 데이지의 귀여운 조름에 나는 넘어가 주기로 했다. 테인이라. 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데이지가 이렇게 푹 빠진 건지. 궁금하기는 했다.
“좋아. 테인을 보러 내일 함께 가는 거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러자 데이지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번졌다.
* * *
“저 아이가 테인이구나?”
“네!”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 우리는 수련장에서 수련하는 테인을 몰래 훔쳐보는 중이었다. 테인이 부끄러워해서 직접 보여 줄 수는 없다나. 데이지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 소매를 꾹꾹 당겼다.
“왜?”
“테인 착한 사람 맞죠?”
“아마도.”
“테인이 걱정했어요. 우리는 어울려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래요. 만나러 오지 말라고 짜증 냈어요.”
데이지가 시무룩해서는 구두코로 바닥을 툭툭 쳤다.
“그래서 데이지는 뭐라고 했는데?”
“……아빠가 그랬는데 신분은 중요한 게 아니래요. 중요한 건 사람이랬어요. 미엘린도 싫어요……?”
그러니까 테인은 평민인데 데이지는 소공녀이니 두 사람이 어울리는 게 못마땅하냐는 말이지? 어린애가 이런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왕성 기사들의 훈련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황성 기사단에서 잡일을 도우며 훈련까지 하는 테인은 성실한 사람일 것이다.
게다가 테인 또한 고작 10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애였다. 어떻게 자라느냐는 주변 환경에 달렸지.
“데이지는 테인과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 거잖아. 싫을 리가 있겠니. 테인이 좋은 사람이라면 나는 괜찮아.”
데이지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내 다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비볐다. 흠. 그래도 어떤 아이인지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대단한 성인이나 현자는 아니라서 테인이 어떤 아이인지는 궁금했다.
평민 아이라.
아무래도 평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직 데이지는 어리니까.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데이지.”
“네?”
“데이지는 테인이 좋아?”
“네!”
“그러면 데이지는 테인이 좋아, 내가 좋아? 아니면 아이반? 누가 제일 좋은데?”
싱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데이지의 얼굴에 커다랗게 충격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데이지가 침을 삼키고는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데, 데이지는 다 좋은데…….”
울먹이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떡해요……? 한 명만 골라야 해요?”
“그래야 한다고 하면?”
“이잉…….”
데이지가 칭얼거리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가장 좋은 사람은 누구야?”
내 장난스러운 재촉에 데이지만 심각해졌다. 데이지가 손가락을 하나, 하나 꼽으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사실…… 숙부님이 제일 좋아요.”
내 눈치를 힐끔 살피면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그렇다고 미엘린이 안 좋은 건 아니에요! 그냥…… 숙부님은 데이지를 오래, 오래 봤으니까…….”
으이그, 귀여운 녀석.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고는 데이지를 꼭 끌어안았다. 아직 아기 냄새가 나는 데이지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속삭였다.
“나도 데이지를 좋아해. 누굴 가장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데이지가 내 목을 끌어안고 내 볼에 뽀뽀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이가 생겼다고 보여 주고 싶다니. 시간은 정말 너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와 보길 잘한 듯했다. 테인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고……. 이런 귀여운 모습도 보고.
“자, 아가 동생에게 책 읽어 주러 가야지?”
“네!”
데이지가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내 손을 잡았다. 데이지는 왕비궁으로 가는 내내 테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애가 무슨 이야기를 했고 무얼 좋아하는지 말이다. 흠. 정말로 데이지가 테인을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혹여나 훗날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테인을 후원할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게 바로 부모가 된다는 건가.
데이지가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랐다. 바깥세상의 따가운 시선들이 데이지와 테인에게 상처 주지 않기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