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에르긴은 눈 밑이 검게 변해서는 이를 아득 갈았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얼굴에서는 이전의 고귀함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대부인도 더 이상 에르긴을 말리지 못했다. 에르긴의 부모님은 대부인의 동생에게 신세를 지겠다며 에르긴을 두고 떠났다.
가장 힘든 순간에 에르긴은 혼자가 된 것이다. 모두, 에르긴을 버렸다.
“하, 하…….”
가장 먼저 에르긴을 버린 것은 미엘린이었다. 에르긴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지지 못한다면 파멸을.
그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에르긴이 주머니에 들어 있던 회중시계를 꺼냈다. 크로세타 가주들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 시계였다. 금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물건을 에르긴이 쓰다듬었다. 이 정도면 값어치가 꽤 있을 것이다.
에르긴이 시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스산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십니까?”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집사장이 에르긴에게 물었다.
“갈 곳이 있네. 마차를 준비시키게.”
에르긴의 행선지는 왕국에서 몹시 위험한 이들이 모여 산다는 거리였다. 집사장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에르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홀로 용병들이 가득한 술집 앞에 선 에르긴이 회중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비릿한 미소가 에르긴의 얼굴 가득 떠올랐다.
“미엘린…… 지옥도 같이 가는 거야.”
* * *
요즘처럼 평화로울 때가 없었다.
에르긴은 완전히 망해서 빚쟁이를 피해 저택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 에르긴이 하던 사업은 휴짓조각보다 못한 신세가 되어 문을 닫았다나. 빚을 갚기 위해서 팔아치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듣기로 세리나는 쫓겨났다고 들었다. 심지어 아기를 가졌다던데. 에르긴은 그 아기가 자신의 아기라고 어떻게 믿느냐며 세리나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들었다. 정말로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이는 건지.
어떤 면에서 보면 세리나는 불쌍했다. 더 이상 자작도 아니게 된 세르미온 자작 가가 세리나를 받아 줄 리 없었다. 아니지. 받아 주려나? 일해서 돈을 벌어 올 이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세르미온의 본성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세르미온이 세리나를 받아들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이게 세리나가 원하던 해피 엔딩은 아닐 거라는 사실이었다.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후련했다. 복수를 끝내면 허무하다는 사람이 많던데 나는 아니었다. 내가 바랐던 대로 불행한 결말을 맞이한 이들을 보니 힘들었던 것들이 잊히는 것 같았다.
이래서 죄짓고 살면 안 된다고.
아무튼, 모든 게 평탄하게 잘 흘러가고 있었다.
“저, 아이반?”
“네?”
“혹시…… 데이지의 남자친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챙!
평화로운 아침 식사가 끝나는 소리였다. 아이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직 데이지는 자고 있어서 이 자리에 없었는데 그게 다행이다 싶었다.
“데, 데, 데이지의 남자친구요?”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지에게…… 남자친구라니.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 애는 아직 6살이에요. 너무 어려요.”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어머. 그러다가 데이지가 결혼이라도 한다고 하면 울겠네?”
아이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이반……?”
“아직 데이지는 너무 어립니다. 데이지는 아직 결혼하려면 30년은 더 있어야 해요!”
“그러면 너무 늦고.”
30년 후면 데이지는 36살이다.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이가 많았다.
“물론, 나는 데이지가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냥 혼자 살면 어때. 행복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데이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는 지원해 줄 거예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아이반은 어때요?”
아이반이 목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정처 없이 떠돌던 시선이 도로 나를 향했다. 답을 찾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평생 데리고 사는 건 안 되겠죠?”
“데이지도 자라고 있으니까요.”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겁니까?”
“좋아하는 친구가 생긴 것 같더군요. 케일린 말고 다른 친구가.”
아이반이 이마를 짚었다. 한숨을 푹 쉬고는 물을 한 잔 더 마셨다. 저렇게까지 반응할 정도인가? 데이지가 결혼이라도 한다고 하면 울기라도 할 태세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떤 아이인가요?”
“알아본 바에 따르면 선량한 아이라고 하더군요.”
아이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귀족 아이가 아니군요.”
“맞아요.”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은 해 봤다.
여기는 소설 속 아니던가. 그리고 데이지는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이었다. 혹시 테인이 숨겨진 공작 가의 아들이라든가, 왕가의 사생아는 아닐까? 혹은 대단한 상인의 숨겨진 아들이라든가. 뭐, 그런 거.
그리고 나는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봤다는 걸 깨달았다.
큼.
테인은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조금 특출난 부분이 있다면 그 애는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어 거리에서 자랐어요.”
“흠.”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우리의 편견 문제가 아니었다. 아돌프도 힐리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산을 넘었는지는 나보다 아이반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이반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의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을 겁니다. 힐리아 또한 신분이 낮았으니……. 귀족들이 뭐라고 수군거릴지 눈에 선하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데이지가 좋다면 나는 도와주고 싶어요. 그 애 또한 어리니…….”
물론,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애들은 아직 어리다. 조금만 더 자라도 지금 품은 마음이 변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테인도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 테니까.
“그 애를 도울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열심히 수련을 받고 있다고 하네요.”
“평민 기사가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공을 세우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서는 그런 것도 힘들지요.”
아이반의 말이 맞는다.
전쟁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드래곤 같은 게 있지도 않으니 공을 세우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이 있긴 합니다. 5년에 한 번, 대륙에서 기사들이 실력을 겨루는 검술 대회가 열립니다. 저도 출전했고요.”
그런 게 있구나.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거기에 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적으로 훈련받을 필요가 있어요. 왕실의 고상한 검술로는 그곳에서 우승하기 힘들 겁니다.”
“우승하면 작위를 받는 건가요?”
“우승하기만 한다면 모든 나라에서 그 앨 데려가려고 할 겁니다. 이중 국적을 취득할 수도 있지요.”
호오, 그거 괜찮은데? 그렇게 작위를 가지게 된다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좀 줄겠지.
“테인을 도울 방법이 있을까요?”
“이름이 테인이로군요.”
아이반이 형형하게 웃었다.
“요새 데이지가 오가는 곳은 케일린의 저택이나 왕성뿐이니…… 왕성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크고요. 기사 수련을 하는 아이인가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아이반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상 전부 알릴 생각이기는 했다. 아이반이 한숨을 옅게 내쉬었다.
“헨리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테인이 상처를 받아서는 안 돼요. 데이지가 정말로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왕성에서 이번에 데리고 온 수습 기사들을 다시 저택으로 데려올 생각입니다. 그리고 토너먼트를 벌여 성적이 상위권인 이들은 남겨서 가르치고 나머지는 왕성으로 보내려 합니다. 그 애의 노력에 달려 있겠군요.”
“좋은 방법이에요. 데이지가 좋아하겠네요!”
이걸로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았다.
데이지가 평민 기사와 어울린다고 입방아를 찧어 댈 귀족들을 원천 봉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신분제는 악습일지는 몰라도 이 세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주축 중 하나였다. 이것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개혁이 아니라 테러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틀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다. 아이반이 시무룩한 얼굴로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은 원래 금방 자라요.”
“그래도 너무 빠릅니다.”
“아이반?”
“네.”
“아이반에게는 내가 있잖아요?”
생긋 미소 지으며 아이반에게 말했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