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아이반의 얼굴이 붉어졌다. 윽, 소리를 내며 먹는 것을 멈춘 아이반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심리 치료를 받은 이후로 나는 내 감정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도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어서 안정이 빠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내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감정으로 인해 내가 상처받더라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 내게는 나를 사랑해 주고 지켜봐 주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아이반이 중얼거렸다.
“……사랑합니다, 미엘린. 아주 많이.”
“나도 그래요.”
아이반이 손을 내리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배가 고픕니까?”
“음? 아니요. 다 먹은 것 같아요.”
“오늘 바쁜 일이 있습니까?”
아직 가이스의 일이 정리되어 내게 넘어온 게 아니기 때문에 괜찮았다. 고개를 저으니 아이반이 옅게 웃었다.
“그것 잘되었군요.”
아이반이 일어서서 내 손을 잡았다. 나를 자리에서 일으킨 아이반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 아이반? 지금 아침이에요!”
내가 새된 목소리로 속삭이자 아이반이 내 뺨에 키스했다.
“커튼을 내리면 밤보다 더 어두워질 겁니다.”
“데, 데이지가……!”
“하녀들은 눈치가 빠릅니다.”
“으아…….”
대체 뭐에 발동이 걸린 거람.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은 채로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이 열린 것은 점심이 다 되어 갈 때였다. 아이반이 호언장담한 대로 눈치가 빠른 하녀들은 데이지를 아침부터 정신없게 했다.
데이지를 데리고 아침부터 외출한 것이다. 키가 자라 드레스가 짧아졌으니 새로 맞춰야 한다는 핑계로. 유능하고 고마운 하녀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
* * *
가이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고아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업도 안정을 찾았으니 이제 곧 아내와 아이를 데려올 생각이었다. 가이스의 그릇이 여기서 멈출 게 아니었다. 가이스는 이제 틸리언즈의 원로들을 만나 아이반의 자격에 관해 논할 생각이었다.
신전에서 나온 사제들도 공작의 침실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다른 수를 내야 한다는 건데. 가이스가 혀를 찼다. 멍청한 에르긴과 세리나가 일을 다 망쳐 버렸다. 약을 자신에게 먹이면 어쩌자는 건가?
그래 놓고 자신에게 덮어씌우던 뻔뻔한 작태라니.
자신은 피해자였다! 그 자리에 누워 있었던 덕에 이미지를 회복하느라 얼마나 입을 털어 댔던가.
가이스가 이를 아득 갈았다. 가이스의 눈에는 고아원에서 지내는 어린아이들이 모두 돈으로 보였다. 에르긴이 머리를 굴리긴 정말 잘 굴렸다. 왕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를 건드린 덕에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투자를 이어 오고 있었다. 돈이 계속해서 쌓이고 있으니 기껍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야, 거기 누구야!”
그런 가이스의 노다지에 모르는 이가 침범했다. 요새 고아원 주변에 이방인이 늘었다 싶었는데 고아원에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남의 것을 탐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줘야 하나? 가이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가이스 님 되십니까?”
“무슨 용건이지?”
“저는 가정복지부에서 나왔습니다.”
“아!”
가이스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가정복지부가 뭐 하는 곳인지는 가이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제보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남자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가이스 님이 고아원의 돈을 횡령해서 도박에 탕진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게다가 돈을 빼돌려 은닉하셨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남자가 그 외에도 가이스가 저지른 일들을 줄줄이 읊었다. 가이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에르긴 말로는 적은 금액은 빼돌려도 모를 거라고 했는데 남자는 전부 알고 있었다.
“이, 이 정도는 눈감아 주는 거 아니었습니까?”
가이스가 하얗게 질려서는 남자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이대로 끌려가면 다시는 세상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헨리 왕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처벌을 가볍게 할 리가 없었다.
“무슨 개소리를. 새로 오신 가정복지부 장관님을 잘 모르시나 보군요. 쌀 한 톨도 사사롭게 이용해서는 안 되지요.”
가이스가 입을 벌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제가, 제가 어리석었어요! 돈을 전부 돌려놓겠습니다!”
가이스가 벌벌 떨었다. 바닥에 엎드려 부르르 떠는 가이스를 남자가 벌레 보듯 했다. 저 남자 탓에 가정복지부 직원 전부가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고 있었다. 리엔스터 백작 부인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야근하는 것이다.
얼른 이 문제를 해결해 평화를 되찾고 싶었다.
“연행하게.”
“네!”
가이스가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훈련받은 기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고아원 아이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가이스가 끌려 나가는 것을 구경했다. 남자가 잘 지어진 고아원의 외양을 훑어보았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직원이 뛰어왔다.
“저, 무슨 일로……!”
“곧 새로운 주인이 올 걸세. 그간 고아원을 잘 부탁하네.”
남자가 경고처럼 가이스가 있는 곳을 힐끗 눈짓했다. 만약 가이스처럼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가는 저 꼴이 난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직원이 파랗게 질려서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가이스가 하는 양아치 짓을 볼 때마다 큰일이 나긴 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되었다.
그날로 가이스를 본 이는 없었다.
이 소식이 가이스의 아내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외면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사람이 제 분수를 알아야지. 그 사람 분수는 딱 이 집이었어요. 더 이상 얽히고 싶지도 않군요. 우리는 이사를 갈 거예요. 찾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칼로 도마를 내리쳤다나?
가이스는 그렇게 끝났다. 아주 비루한 결말이었다.
* * *
가이스의 이야기는 내게도 전해졌다.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과한 욕심을 부린 자의 최후였다. 그리고 그 소식은 왕비도 기쁘게 했다.
“뿌려 두었던 것들이 하나씩 거둬지고 있군요.”
“모든 게 왕비 전하의 덕분 아니겠습니까?”
“공작 부인이 그런 발언도 할 줄 알아요? 세상에.”
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저 마지막에 수저를 얹었을 뿐이지요. 이건 전부 공작 부인의 공로입니다. 번듯하게 고아원이 섰으니 헨리도 한시름 놓았답니다.”
어부지리로 얻어먹기만 했으니 왕으로서는 기쁠 만도 했다. 이건 전부 헨리의 업적으로 기록될 테지만 말이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가정복지부에서 횡령을 일삼는 가이스를 일망타진한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뭐,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겠다는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못다 한 복수를 마무리하는 것. 그뿐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에르긴뿐이다.
지금도 충분하지 않으냐고?
나는 에르긴에게 다시 일어날 기회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에르긴이 좀 더 문제를 일으켜야 하는데. 헨리 왕이 단번에 작위를 취소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에르긴에게 하는 가장 큰 복수일 것이다.
에르긴은 살아서 제가 가장 끔찍하다고 여겼던 지옥에서 살아가게 될 테니.
“크로세타 백작 가에 내려진 벌은 우리 치세 동안에는 절대로 거둬지지 않을 겁니다, 공작 부인.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겠지요? 그간 당한 것이 있는데.”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것으로도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위험한 일만 자처하지 말아요, 공작 부인. 그런 치들은 눈에 뵈는 게 없으면 미쳐 버리는 법이거든. 호위를 늘리는 편이 어떨까 싶은데.”
“지금도 충분합니다.”
“아.”
왕비가 궁 앞까지 항상 나를 호위하는 공작 가의 기사들을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염려해 주신 마음은 꼭 새겨 두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데이지도 약혼 자리를 알아봐야 하지 않나요?”
왕비가 수많은 의미를 함의한 미소를 지었다. 테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왕비가 의뭉을 떨지 않고 내 궁금증을 금세 풀어 주었다.
“……요새 왕성에서 수련받고 있는 어린 기사와 어울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반은 왕성의 어린 수련 기사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더군요.”
왕비가 눈을 빛냈다.
“……나는 신분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능력이 있다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중용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데이지는…….”
안 그래도 내가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왕비가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