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틸리언즈는 대대로 왕가를 수호해 온 가문이에요. 그만큼 역사가 깊다는 거겠지요. 데이지는 앞으로 틸리언즈를 이어받아 애거사를 도와 왕국을 이끌어 나갈 아이예요. 이미 데이지에게는 그럴듯한 외가가 없어요.”
힐리아의 신분이 문제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위기 상황에 봉착했을 때 데이지를 비호해 줄 세력이 하나 줄었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데이지가 결혼마저…….”
“왕비 전하, 제가 있습니다.”
“공작 부인, 물론 그대의 마음은 알지만, 친자식이 태어난다고 해도 같을까요?”
왕비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헨리가 왕이 될 때까지 별꼴을 다 겪었다고 들었다. 한배에서 난 이들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꼴을 보았을 것이다. 왕비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데이지는 제 딸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기로 했어요. 저는…… 데이지가 아니었다면……. 그 애가 있어서 지금의 제가 있어요, 왕비 전하.”
씁쓸하게 웃었다.
왕비에게 하는 말은 진심이었다.
김태진을 겪고.
“에르긴을 겪으면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가 되었어요. 친구와 가족을 동시에 잃었으니까요. 저는 제가 평생 불행할 거라고, 사랑 따위는 받지도 못할 거로 생각했죠.”
“공작 부인…….”
왕비가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불렀다.
“그런데 데이지를 만났어요, 왕비 전하. 데이지는 사랑받은 만큼 사랑을 베풀 줄도 아는 아이였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제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머리를 묶어 달라고 졸라요. 저보다 잘하는 하녀가 있는데도 제가 해 주는 게 가장 좋대요. 아침 내내 제 옆에서 재잘거리다가 같이 점심을 먹고 교습을 받으러 가죠. 그리고 돌아와서 무엇을 했는지 내내 떠들어요. 왜 그 애가 종달새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요. 왕비 전하, 제 외로움과 공허함을 채워 준 건 데이지예요. 그 애가 제게 행복할 힘을 불어넣어 줬어요.”
나를 구해 준 것은 아이반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복수에 발을 담근 것도 아이반이다. 그러나 내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 준 것은 항상 내 곁을 맴도는 데이지였다.
“사람들은 제게 고맙다고 하더군요. 데이지가 저 덕분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치유받은 건 저예요, 왕비 전하. 그 애가 있어서 저는 숨을 쉴 수 있었어요.”
깨끗한 애정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나를 향할 때마다 나는 대단한 무언가라도 된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가장 불행한 사람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건 순간이었다. ‘미엘린이 좋아요. 미엘린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라는 애정 가득한 말을 반복해 듣다 보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안의 어둠이 몰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제게도 데이지가 필요해요, 왕비 전하. 그 애가 저를 구원했어요.”
“……공작 부인.”
“저는 절대로 데이지를 놓거나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왕비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의 마음은 알겠어요. 그 기사에 대한 일은 공작 가에 일임해도 될까요? 틸리언즈 후계를 걱정하는 내 마음을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왕비 전하. 데이지에 대한 염려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테인은 반드시 제힘으로 데이지의 곁으로 올 거예요. 그 애가 바란다면요.”
그렇게 길을 깔아 줄 거라는 내 의도를 알아들었을까? 왕비가 백기를 들었다.
“잘할 거라고 믿어요. 데이지가 이렇게 든든한 모친을 얻어서 다행이로군요. 그 애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거예요. 공작 부인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부정하지 않았다. 왕비가 말한 대로 나는 데이지를 최고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 애가 바라는 한 최대한으로!
왕비와의 대화는 즐거운 편이었다. 왕비와의 자리가 파한 후, 나는 데이지와 아이반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교습을 다녀왔는지 로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데이지가 내 다리에 매달렸다.
“안 들어가고 왜 여기에 있니?”
“곧 미엘린이 온다고 해서요! 미엘린, 오늘은 춤을 배웠는데 백조처럼 춘다고 칭찬받았어요!”
“그래? 그럼 직접 보지 않을 수 없겠는걸.”
“이잉. 부끄러운데. 혼자서는 못 해요.”
“다행히 숙부님이 오시는구나.”
“앗, 그러면 미엘린이 피아노를 치나요?”
데이지가 눈을 반짝였다. 내 치마를 흔들며 졸라댄다. 그 모습이 더 보고 싶어서 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엘린이 피아노를 쳐 주지 않으면…… 음악이 없어서 춤을 출 수가 없는데에…….”
“데이지가 부탁하니까 쳐 주는 거야.”
“정말요?”
“그럼!”
데이지가 방방 뛰면서 아이반의 손을 잡았다. 나를 마중 나온 아이반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춤을 추자는 데이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하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겉옷을 벗자마자 바로 피아노 의자에 앉아야 했다.
데이지가 아이반의 손을 잡고 나비처럼 팔랑팔랑 춤을 추었다. 내가 엉성하게 피아노를 쳐도 데이지와 아이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녀들이 길을 가다가 멈춰 서서 구경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구경꾼들도 데이지에게 이끌려 플로어에 올랐다. 하녀들과 데이지가 까르르 웃었다.
내 엉성한 연주를 채워 준 것은 하인들과 하녀들이 리듬에 맞춰 치는 손뼉과 들고 있던 바구니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데이지의 금발이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서 화사하게 피어났다. 데이지는 선물이었다. 이 세상의 신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
아이반이 숨을 몰아쉬며 내 어깨를 짚었다.
“일어나요, 미엘린.”
“에? 그러면 피아노는 누가 치나요?”
“제가 쳐 보겠습니다, 공작 부인.”
로시에가 어깨를 펴고 나섰다.
“어릴 때 조금 배운 적이 있거든요. 공작 부인께서 배려해 주셔서요.”
거부할 명분이 없어 아이반의 손을 잡고 플로어에 올라야 했다. 으.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나는 몸치, 박치, 음치였다. 그나마 미엘린의 기억이 있어서 흉내는 낼 수 있지만…….
“발 밟아도 몰라요!”
“괜찮습니다. 미엘린은 솜털……. 윽!”
“거봐, 아프잖아.”
아이반이 피식 웃곤 내 신발을 벗겼다. 맨발이 된 나를 아이반이 발등 위에 올렸다.
“이게 낫겠군요.”
아이반의 발등에 선 채로 뒤뚱거리며 춤을 췄다. 아, 정말로. 아무래도 춤은 데이지보다 내가 먼저 배워야 할 것 같다.
에휴.
한숨을 쉬는 내 뺨에 아이반이 키스했다.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 * *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서류를 보내 왔다. 고아원과 관련된 서류였다. 가이스는 리엔스터 백작 부인이 혐오하는 부류에 속했다. 듣기로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했다. 서류가 정리되어 온 것을 보니 요새 가정복지부에 들어가면 퇴근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서류를 받자마자 나는 웨스턴과 클로린을 불렀다. 서류를 확인한 두 사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리를 정말 잘해서 넘겨주셨네요.”
“아무래도 리엔스터 백작 부인께서 꼼꼼하시지 않나. 더 필요한 서류가 있을까?”
“아닙니다. 고아원은 직접 둘러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러고 싶네. 내가 실무엔 경험이 없어 다른 이들의 보좌가 필요하긴 하지만 아이들을 직접 살피고 싶어. 그 애들이 재능을 보이는 분야가 있다면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은데.”
내게는 그럴 만한 돈도 충분히 있었다. 이만큼 돈 쌓아서 어디에다가 쓰겠는가. 지금 노백작이 망한 이상 왕국 최고의 부자는 나였다. 이렇게 좋은 일도 하면서 사는 거지. 돈은 많을수록 좋다고들 하는데…….
쓸 수 있을 만한 자산이 아니었다.
큼.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애들은 분명 공작 부인과 공작 가에, 그리고 라스티나 가문에 보탬이 될 겁니다!”
“나는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그 애들이 사회에 나가 제 몫을 하며 살길 바랄 뿐이네.”
클로린과 웨스턴이 나를 마치 신처럼 보고 있었다.
멋쩍음에 볼을 긁적였다. 물론,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고아원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웨스턴이 곤란한 얼굴로 화두를 바꿨다.
“그런데 공작 부인…….”
“음?”
“에르긴 백작의 거취를 놓쳤습니다. 그날 저택을 떠난 이후로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행선지가 주점이었던 데다가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던지라…….”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사실 사람 하나가 사라지려고 마음먹는다면 왜 못하겠는가. 에르긴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용병이 많이 모이는 주점이었다. 거기에서 뭘 의뢰했는지는 모른다. 아이반을 죽이거나, 혹은 나를 죽이거나.
그 둘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