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호위를 늘리는 게 좋지 않겠어요?’
왕비의 조언과 에르긴의 실종이 맞물려 나를 몰아붙였다. 아무래도 아이반과 나, 그리고 데이지까지. 호위를 늘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밖에 안 나간다고 쳐도, 아이반은 일 적으로 외출이 잦은 편이니 말이다…….
데이지도 한동안 저택에서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아무리 대단한 용병이라도 틸리언즈의 담을 넘을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틸리언즈는 본디 왕족의 피가 섞인 가문이라 소유할 수 있는 기사 수가 많았다.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건 더 위험한 일일 테고…….
“대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예, 공작 부인.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웨스턴이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에르긴 크로세타. 끝까지 문제였다. 내가 저택에서 나가지 않게 된 것도 전부 에르긴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이 문제였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그러다 용기를 냈고 덕분에 좋은 이들을 얻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전히 에르긴 크로세타는 내 주변을 돌면서 나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이런 미저리 같은 자식. 죽여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이었다. 사실 이 정도로 당했으면 물러설 때도 된 것 아닌가.
에르긴은 사업과 명예, 모든 것을 잃었다.
이제 에르긴이 잃을 것은 가문의 이름과 목숨뿐이었다.
그날 밤, 아이반에게 에르긴이 사라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이반은 나와 데이지가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가고 아이반의 호위를 늘리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그게 계속될 수는 없을 겁니다. 에르긴 백작으로 인해서 일상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저도 동의해요.”
“그자를 최대한 빨리 찾아야겠군요.”
“웨스턴 씨도 노력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용병들이 워낙 무법자라…….”
“헨리에게도 관련해서 이야기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용병들이 제도의 치안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도움을 줄지도 모릅니다.”
“……나 때문에…….”
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복수를 이유로 아이반을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죄책감이 미약하게 피어올랐다. 아이반 또한 나로 인해 위험에 처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게다가 어린 데이지까지도.
“이건 미엘린의 잘못이 아니에요.”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제 분수를 모르는 자의 만행일 뿐입니다.”
아이반이 내 이마에 키스했다. 위로가 담긴 다정한 키스였다. 내가 새 출발을 다짐하면서 생각해 낸 이가 아이반이라 다행이었다. 아이반의 품에 안겨 무거운 잠을 청했다. 나는 에르긴에게 발목이 붙들려 늪으로 끌려가는 꿈을 꾸었다.
에르긴의 존재는 정말로 끈질겼다.
어쩌면 에르긴과 나는 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일 지도 모르겠다.
* * *
“아이반, 표정이 정말로 안 좋은데?”
“심증만으로 귀족을 구금해 둘 수 있나?”
“음?”
아이반이 눈썹을 찡그렸다.
“에르긴 백작이 용병을 고용한 것 같네. 무슨 계약인지는 모르지. 다만, 용병이 선한 일을 위해서 쓰이는 일은 드물지 않은가. 게다가 에르긴 백작이 가진 전 재산을 털어서 고용한 이라면…….”
“가이스를 죽이려는 걸 수도 있지 않나. 그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올까 봐.”
“사실 에르긴은 가이스를 후원했을 뿐이니 그 문제는 아닐 거야.”
“……공작 부인을 노리고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더군. 그럴 바에는 직접 처리해 버리는 게 나을 듯해서 말이야.”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아예 원천 봉쇄를 하겠다는 거로군.”
“맞아.”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하네. 알다시피 과거 크로세타는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정당한 방법으로 작위를 가져갔네.”
헨리가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에르긴을 치워 버리면 헨리도 편안했다.
“왕이 되어서도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걸 이럴 때면 깨닫게 되는군.”
“……한동안 데이지나 미엘린은 외출을 자제해야 할 것 같네.”
“왕비에게 전해 두지. 왕비가 많이 적적해하겠어. 얼른 에르긴 백작의 행방을 찾아내야 할 텐데.”
“찾아내더라도 이런 일을 계속해서 저지르겠지.”
“자네가 직접 죽이는 건 안 돼. 에르긴 백작이 죽게 된다면 공식적인 방법이어야 할 거네. 잘못하다가는 자네가 뒤집어쓸 수도 있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작자라도 왕국의 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질 않네. 이게 세습 귀족의 가장 안타까운 점이지. 후손이 아무리 개거지 같아도 작위는 대물림되지 않나?”
아이반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러나, 만약에…… 에르긴 백작이 미엘린이나 데이지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지금처럼 의심 정황이 아니라 진실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말일세.”
아이반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헨리를 향했다. 헨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에르긴 백작은 틸리언즈와 왕실을 향해 반역 의사를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네. 자네가 왕실의 핏줄임을 잊지 말게. 즉시 사살해도 나와 왕국은 자네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어.”
아이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이 벌어질 때까지 두고 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긴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에르긴을 잡아서 모든 사실을 자백하게 하고 감옥에 처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다른 귀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괜찮을 거네, 아이반. 이런 말밖에 못 해서 미안하네.”
“자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지. 왕실 기사를 내주게. 왕실의 뜻이 나와 미엘린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 줘.”
“그 정도야. 자네가 돌아가는 대로 공문을 보내도록 하지. 오늘 밤 안으로 기사들이 자네의 타운하우스에 도착할 거야.”
“고맙네.”
아이반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에르긴이 용병을 고용했다면 아이반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에 아이반은 틸리언즈의 자산을 풀어 용병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에르긴을 찾아 데려오거나, 에르긴의 의뢰를 받아들인 용병을 찾아내라는 임무를 주었다.
아이반은 힐리아나 아돌프를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인재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아이반은 이번에야말로 미엘린과 데이지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머릿속에는 법정 앞에서의 미엘린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아이반을 휘감았다. 신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아예 몰랐으면 몰랐을까, 미엘린과 데이지는 이미 아이반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이 함께하는 일상이 아이반의 삶이 된 것이다. 그들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삶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지킬 것이다.
이게 바로 가장이 된다는 것일지도.
두려움과 동시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용병 기사로 살 땐 아이반의 목숨 하나만 지키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반이 지켜야 할 이가 더 늘어난 것이다. 겁날 것 없었던 아이반에게 무서운 게 생겼다. 아돌프가 들었으면 정말로 어른이 되었다고 뿌듯해했을지도.
* * *
갑자기 저택 내에 기사들의 수가 늘었다. 틸리언즈의 기사들과는 달리 왕실의 문양을 망토에 단 자들이었다. 왕실에서 틸리언즈를 보호하겠다는 의미인가?
“에르긴이 배 아파하겠군.”
권력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이였으니 말이다. 여기저기서 수소문하고 있는데 여전히 에르긴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로 숨어든 것인지.
쥐새끼도 아니고.
그나마 과학 수사가 가능한 현대 사회라면 찾아낼 수라도 있겠지만…… 여기는 주먹구구식으로 부딪히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에게 묻고 뒤지고.
“미엘린. 표정이 무시무시해요!”
데이지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래서 얼른 웃었다.
“아니야, 데이지. 그림은 다 그렸니?”
“음……, 미엘린이 무서운 표정 해서 못 그렸어요…….”
데이지가 머뭇거리며 그림을 내밀었다. 사실 6살 아이에게 뭘 많이 바라겠는가.
“로시에.”
“예, 공작 부인.”
“아무래도 우리 데이지 화가를 시켜야 할 것 같지 않아?”
로시에가 내 말에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
“요새 교습을 받더니 그림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 같군.”
“……공작 부인. 외람된 말씀 하나 올려도 되겠습니까?”
로시에가 조용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