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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89화 (89/92)

89화

“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한다는 말, 아시는지…….”

로시에가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의 뜻을 모를 데이지만 칭찬이라고 생각했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정말 잘 그린 것 같은데.

아직 추상화가 유행은 아니지만 그런 그림도 있다는 걸 보여 줄 때도 됐는데. 그림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나를 보며 로시에가 작게 웃었다.

“정말 잘 그렸어, 데이지!”

남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 데이지가 최고다.

“헤헤……. 다음엔 더, 더 잘 그릴 수 있어요! 아가 동생도 그려 줄 거예요.”

“정말 좋아하겠어. 왕비 전하도 기뻐하실 거야. 이 그림은 액자에 넣어서 가지고 오게.”

로시에가 쿡쿡 웃었다. 하녀들도 저마다 웃고 있었지만 내 뜻은 확고했다.

“침실에 둘 생각이야.”

“예, 공작 부인.”

데이지는 한동안 외출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는 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케일린을 못 만나는 건 슬퍼했지만 말이다. 아이에게는 밖에 무시무시한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둘러대었다.

‘나쁜 사람이 있는 건가요? 그러면…… 헨리 왕 전하하고…… 숙부님이 잡아 주시겠지요?’

‘물론이지. 그러니 우리는 잡힐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란다.’

‘알았어요!’

똑똑한 데이지는 나름대로 이해를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데이지는 저택 안에서도 잘 지내고 있었다. 지금처럼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하면서 말이다.

* * *

“공작 가 문이 닫혔소.”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지?”

“물론이오. 내게 신세를 진 녀석이라 이 정도는 들어줄 정도지.”

얼굴에 긴 자상이 있는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한동안 떠날 생각이오. 우리를 찾느라고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있거든. 돈이 얼마나 걸렸는지 아시오?”

“……나는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떠날 수 없네.”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개죽음 당하긴 싫거든.”

에르긴을 혼자 남겨 둔 남자가 자리를 떴다. 에르긴이 허름한 방에 홀로 남겨졌다. 이곳에서는 틸리언즈가 한눈에 보였다. 저택에 검은 물결이 가득 차는 꼴을 보기 전에는 떠날 수 없었다. 절대로.

* * *

에르긴을 찾는 일은 고착 상태에 빠져 진전이 없었다. 대체 어디에 박혀 있는 건지. 그나마 다행인 건 저택이 하도 넓어서 그런지 데이지도, 나도 별다른 어려움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나와 데이지는 저택을 탐험하면서 매일매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새롭기만 했다. 숲에 가서 숲지기와 그의 양자와 어울리기도 했다. 아직 어린아이지만, 숲에서 살아 그런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우웅. 이렇게?”

“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아가씨.”

“……나는 못하는데 너는 왜 이렇게 잘해?”

데이지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먹을 열매를 손질해서 꼭지를 따던 중이었는데 그게 잘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 옆에서 제 또래 아이는 잘하고 있으니 심통이 난 듯했다.

“테인!”

이럴 때만 테인을 찾지.

꼭 오늘 소풍은 테인도 함께 와야 한다는 데이지에게 져 주었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왕성에서 보내온 어린 수련 기사들은 나름대로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고강도의 집중 수련을 받는 데도 잘 적응하고 있다나.

그런 덕에 수련 시간이 아닐 때는 어린 기사들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지는 저택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내내 테인을 찾았고 말이다.

테인이 이제는 익숙하다는 얼굴로 데이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래. 테인은 할 수 있어?”

“자. 이렇게 하면 되잖아.”

“힝……, 나만 못하는 거잖아.”

“열심히 하면 돼. 봐, 지금도 이만큼 했잖아. 조금만 더 하면 더 잘할 거야.”

오.

테인이 이제는 능숙하게 데이지를 달랬다. 그간 내가 데이지를 대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배운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면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중이었다.

……이대로 저택 밖으로 안 나가도 될 것 같은데.

여기가 바로 낙원 아닌가.

생활에 만족한 내게서 또다시 은둔형 외톨이 기질이 발현되려 하고 있었다. 책을 살짝 내리고 열매 다듬는 일에 골몰하는 세 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릇이 가득 차자마자 데이지가 그걸 가지고 내게 뽀르르 달려왔다.

“미엘린! 이거 맛있어요! 데이지가 이렇게 했어요!”

친구들하고 있을 때와 나에게 이야기할 때는 확연하게 달랐다. 후자에 더 어리광이 실린다고나 할까. 데이지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게 열매를 먹였다.

“어때요? 데이지가 해 주니까 더 맛있죠!”

“그런가?”

“이잉!”

데이지의 뺨에 키스했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네.”

그릇에서 열매를 집어서 데이지에게도 먹였다. 데이지가 볼우물이 패도록 웃었다. 시긴 했는지 파르르 떨고는 까르륵 웃었다.

“이거는 가서 숙부님하고 미엘린하고 나눠 먹을 거예요.”

“친구들은? 친구들하고도 같이 나눠 먹어야지.”

“친구들하고는 또 따러 가기로 했어요. 그렇지, 테인? 그렇지, 실레인?”

“뭐…….”

“맞습니다, 공작 부인.”

고개를 대충 끄덕이는 실레인과는 달리 테인이 기사답게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셋이 다녀올 수 있겠어?”

“네!”

데이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데이지?”

“우웅?”

“넘어지면 어떻게 하는 거라고?”

“일어나서 무릎을 털어야 해요!”

“그래, 그리고 씩씩하게 나한테 와서 상처를 보여 주는 거야. 우리 데이지도 이제 아가 동생도 있는데 잘할 수 있지?”

“네!”

“너무 많이 아파서 정말로 못 걸을 것 같으면 테인이나 실레인을 보내서 나를 찾으러 오는 거야. 알았지?”

“네!”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풍을 온다는 말에 편한 신발을 신기기는 했지만, 혹시나 몰라서 당부하는 거였다. 데이지가 넘어져서 못 걷겠다고 그러면 테인이나 실레인 중 한 명이 업어야 할 텐데 어린 건 저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셋이 놀러 가는 건 막을 생각이 없지만 셋이서 신분에 상관없이 잘 놀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사실 그렇잖아. 저 나이 때에 신분이 어디 있어. 그런 건 어른들이 정해 놓은 틀에 불과했다.

지금으로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체제였지만 언젠가는 무너져야 할 관습이기도 했다. 언제 그런 변화가 찾아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데이지가 살아 있을 때 그런 변화가 찾아온다면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돌프가 가르친 대로 데이지가 편견 없이 저대로만 자라 줬으면 좋겠다.

내가 손을 흔들자, 세 아이가 신나게 숲으로 사라졌다. 아이반은 특히 나에게 항상 기사를 붙여 두었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놀고 있는 이 숲을 중심으로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고생하긴 했다.

으, 얼른 에르긴 따위…… 잡혔으면 좋겠다.

* * *

“공작 부인과 아가씨께서는 숲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 일 없고?”

“네.”

“다행이군.”

1시간에 한 번씩 보고를 받는 것이 며칠 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아이반이 피곤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내내 미엘린과 데이지의 곁을 지키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다.

틸리언즈 저택 내에는 검증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에르긴이 사라진 이후에는 저택을 철통처럼 보호하며 오가는 사람들을 전부 확인하고 있었다. 절대로 일이 벌어질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불안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에르긴도, 그가 고용했다는 용병도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에르긴이 노리는 것이 미엘린이 아니라 가이스였던 건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동기가 부족하단 말이지.’

모든 걸 쏟아부어서 가이스를 죽일 만큼의 이유가 에르긴에겐 없었다. 아이반이 미간을 톡톡 쳤다.

“아직까지 에르긴 백작에 대한 소식은 없는가?”

“예. 그 친인척까지 전부 훑었습니다만 들은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크로세타의 친지들도 아는 것이 없더군요. 오히려 에르긴 백작이 실종되었다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후. 변동 사항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게.”

“예, 공작 전하.”

아이반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엘린을 얼른 편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질 않는다. 에르긴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면 얼굴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었다. 대체 왜 인생을 그따위로 사는지도 묻고 싶었다. 대체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아이반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리려 할 때였다.

“공작 전하, 큰일 났습니다!”

아이반의 귓가에 경종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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