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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90화 (90/92)

90화 @AW

하얗게 질린 기사가 숨을 헐떡이며 문가에 서 있었다. 쓰고 있던 투구는 어디로 간 것인지 벗어 던지고 달려온 기사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온 힘을 다해서 달려왔다는 증거다. 아이반이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일이지?”

“……공작 부인께서……!”

그 뒤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미엘린과 기사에게 묻은 피만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이반은 죽을힘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 이미 숲 앞엔 사용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키거라!”

아이반을 발견한 집사장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바닥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이반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바닥 위에는 눈을 감은 미엘린이 누워 있었고 주치의가 그 앞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데이지의 우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미엘린……, 미엘리인……. 으어어어엉!”

발버둥을 치는 아이를 로시에와 엔시가 챙겼다. 데이지의 눈을 가리고 속삭이는 거다.

“괜찮아, 데이지……. 괜찮아요.”

아이반이 무릎걸음으로 미엘린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후각에 비릿한 피 냄새가 잡혔다.

“상태는…….”

아이반이 무거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주치의가 고개를 돌려 아이반을 보았다.

“미엘린의 상태는…….”

귀가 먹먹했다. 아이반의 눈에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꾹 감고 있는 미엘린의 얼굴만 들어오고 있었다. 오감이 전부 차단되었다. 아이반의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려는 순간이었다.

“……살아 계십니다.”

아이반이 눈을 감았다.

짙은 안도감이 파도처럼 몰려와 아이반을 침잠시켰다.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하…….”

두 손을 맞잡은 아이반이 사형 선고를 듣는 죄수의 심정으로 주치의의 입술을 응시했다.

“다만…… 잉태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뭐?”

“공작 부인께서…… 아기를…….”

송구하다는 얼굴로 주치의가 재차 말했다.

“그걸 여태 몰랐다는 건가? 그래서 아이는? 미엘린은!”

“오늘 밤이 고비일 것 같습니다……. 다행히 아기와 공작 부인 모두 무사하시나 실혈이 컸던 터라 지켜봐야…….”

“이보게!”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제가 소홀하여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주치의가 고개를 땅에 박았다. 그러나,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오늘 밤이 고비라는 거다. 아이반이 주치의의 멱살을 끌어 일으켰다.

“나는 아무것도 상관없네. 저 사람을 살려 내게. 저이를 멀쩡하게 살려 내기만 하면 자네가 무엇을 실수했건, 무엇을 놓쳤건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 미엘린만 살리면 돼.”

“네, 공작 전하!”

고개를 조아린 주치의가 빠르게 처방전을 적었다. 그것은 하녀에게로 전해졌고 약을 준비하기 위해 하녀가 뛰어나갔다. 기사들이 급하게 만들어 낸 들것에 실린 미엘린이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주치의와 데이지, 그리고 로시에와 엔시가 그 뒤를 급하게 쫓았다. 데이지의 우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이반이 느리게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미엘린은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이렇게 쉽게…… 갈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반은 미엘린의 사랑을 믿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두고 갈 리가 없다.

아이반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비릿하게 흐른 피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상황을…… 고하게.”

그러자, 뒤쪽으로 끌려가 있던 누군가가 앞으로 도로 끌려 나왔다. 미엘린의 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수련 기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었다.

“이자가…… 이 아이가…… 범인이라고?”

“예, 공작 전하. 이름은 디에고입니다! 길바닥에서 태어나 건달패에 들어간 전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용병 하나를 만나 목숨을 건진 뒤 기사단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용병?”

“예, 그 용병이 에르긴 백작과 계약을 맺었고……. 이놈에게 의뢰를 떠넘긴 것 같습니다.”

아이반이 차가운 눈으로 디에고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반의 반은 될까 싶은 아이다. 이제 막 13살이 되었을까? 아이반이 느리게 디에고의 앞에 앉았다.

“왜…… 그랬지?”

“어…… 어…….”

디에고가 실뇨했다. 지린내가 진동했지만, 아이반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돈이 탐났나?”

“사, 살려 주세요…….”

디에고가 눈물을 터뜨렸다.

“용병이…… 그 사람이…… 저를 죽인다고 했어요……. 이번 일에 실패하면 저하고 제 동생을 죽이겠다고 했어요.”

디에고가 벌벌 떨면서 말했다.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테인이…… 테인이 말렸는데…….”

테인?

아이반의 고개가 느리게 돌아갔다. 그제야 피가 흐르는 팔을 붙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테인이 보였다. 기사 한 명이 테인의 등을 밀어 앞으로 나서게 했다.

“일이 벌어질 당시에 이 녀석도 함께 있었던 모양입니다. 디에고와는 친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디에고가 일을 벌이려고 하니 이 녀석이 말리다가 다쳤고……. 그나마 덕분에 공작 부인의 상처가 깊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아이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아이반도 하지 못한 일을 테인이 한 것이다.

“주치의 말로는 테인이 제때 디에고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칼이 공작 부인의 장기를 찢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네가 미엘린을 살렸구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공작 전하!”

테인이 바닥에 엎드리더니 여태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두려움에 질려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던 것이다. 테인이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넘봐서…… 디에고가 그랬는데…… 오르지 못할 나무는 보지도 않는 거라고 그랬는데…….”

아이반은 테인이 말을 끝맺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제가 데이지를 좋아해서…… 여기 오면 안 됐던 거였는데……. 그랬으면…… 디에고가 안 그랬을 텐데……. 제 잘못이에요!”

테인이 그 나이의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디에고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간 작은 가슴을 뒤덮고 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터져 나온 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이반이 느리게 말했다.

“에르긴은 디에고가 아니었어도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야.”

아이반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것을 막지 못한 것은 아이반의 실책이었다.

“디에고.”

“예, 예!”

“네 목숨을 구할 방법을 알려 주마. 내 기사들과 가서 그 용병을 찾고 에르긴 백작을 잡아 오너라.”

에르긴 백작이 실종되고 나서부터는 제도가 봉쇄되었다. 아마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고 이 안에 있을 것이다.

“네, 네!”

아이반이 차가운 시선을 다른 기사에게로 돌렸다.

“어서 테인을 데려가 치료를 하도록. 저 팔을 못 쓰게 되는 일이 없게.”

“예!”

명령을 하달받은 기사가 테인을 달랑 안아 들고 저택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자네는 왕성에 가서 왕에게 이 상황을 고변하고 지원 병력을 받아 오게. 단서를 잡았으니 머리를 잡아내야지. 디에고의 말을 토대로 하여 용병을 색출해 찾아내고 에르긴 백작을 내 앞으로 잡아 오게.”

“예!”

디에고가 꿇어앉은 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지르고 나니 더 겁나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왕성에도 알려진다니. 그 당시에는 눈앞의 용병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모든 게 두려웠다. 거대한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죄 없는 이를 찌른 팔이 덜덜 떨렸다.

“제가 잘못…… 잘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너 같은 수련 기사여서 다행이었을 수도 있지.”

한 손에 던져 버릴 수 있는 이였다면 미엘린은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반이 이를 아득 갈았다. 그렇다고 디에고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떠나거라. 네 동생과 함께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마.”

“네, 네!”

“다음에 내 눈에 보이면…… 너는 죽는다.”

아이반이 싸늘하게 일갈하고는 몸을 돌렸다. 미엘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거다. 미엘린의 손을 잡고 신에게 기도할 생각이었다. 여태 살면서 한 번도 아이반의 소원을 들어준 적이 없으니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들어줄지도.

아이반의 뺨을 타고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미엘린…….’

석양이 미엘린이 흘린 피처럼 보였다. 고요한 죽음이 저택을 좀먹는 듯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일까. 아이반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더는 걸음을 뗄 기력조차 없어진 그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를 두고 가지 마……, 미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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