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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91화 (91/92)

91화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지?”

에르긴이 초조하게 창살을 긁었다.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는데 틸리언즈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거리에 이상할 정도로 기사들만 늘었다. 여기에 박혀서 심부름꾼 아이가 음식을 가져다주는 거로 연명하는 에르긴에게 허용된 관찰 범위는 그저 시야에 들어오는 바깥 풍경뿐이라 그는 실로 답답했다.

‘나를 찾고 있는 건가? 아니야. 나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용병은 일찍 떠났고 에르긴의 위치를 아는 건 그 용병뿐이었다. 에르긴이 직접 제 위치를 노출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한다. 에르긴이 이를 까득 갈았다.

“설마 실패한 건가?”

에르긴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께서 자신 곁을 떠나기라도 한 것인지 그가 염원하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실패한들 도망만 치면 된다. 아무리 자신을 찾고 있다고 해도 몇 개월 동안 자신을 찾겠는가. 여기서 가만히 지내다가 기회를 봐서 제도에서 떠나면 그뿐이다. 미엘린에게 남편을 배신한 대가를 보여 주지 못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에르긴이 혀를 찼다. 에르긴이 침대에 몸을 눕히려 할 때였다.

쾅!

“찾았습니다!”

그건 순식간이었다. 에르긴이 어정쩡하게 몸을 지탱하고 침대에 앉은 채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환한 빛이 어두운 방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커헉!”

붉은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빛 속에서 쏟아지다시피 한 용병이 바닥에 떠밀려 굴렀다. 일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멍투성이가 된 용병이 숨을 헐떡였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에르긴을 보는 눈빛은 죽어 있었다.

용병이 중얼거렸다.

“제기랄……. 나도 어쩔 수 없었소. 살고 봐야지. 우리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이도 아니고.”

에르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창문 쪽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기사가 막았다. 욕설을 중얼거리며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그건 에르긴을 잡으러 온 죽음의 발걸음 소리일지도 모른다. 에르긴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던 것은…….

“에르긴 백작.”

아이반 틸리언즈였다.

“여기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군.”

에르긴이 덜덜 떨면서 외쳤다.

“나, 나는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크로세타의 가주요! 재판도 없이 이렇게 일을 벌일 수는 없소!”

“착각이 대단하군.”

아이반이 읊조렸다. 검집째로 에르긴의 목 밑에 들이민 아이반이 얼굴을 굳혔다.

“이 버러지 같은 자식.”

“미, 미엘린이 살아 있지 않소! 공작 부인은 틸리언즈의 핏줄이 아니야! 왕을 뵈어야겠소. 왕께 이 억울함을 고하고……!”

“하.”

이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헨리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이 법을 뜯어고치리라. 결혼하고 호적을 옮기고 나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 나라의 악법 말이다. 에르긴이 저렇게 당당한 것은 다친 것이 미엘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치졸한 속이 다 내보인다.

미엘린은 라스타나의 핏줄이라 틸리언즈의 핏줄은 아니다. 보통 결혼한 귀부인이 그 집안의 핏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이를 가져야 했다. 아이반이 이를 아득 갈았다.

“아쉽게도 네 생사는 내 손에 달려 있어. 이유를 아나?”

“이건 법을 어기는……!”

“미엘린은 내 아이를 가지고 있었어!”

아이반이 분노를 토해 냈다. 여태 유지하고 있었던 침착함이 무너진 것이다. 다행히 미엘린은 깨어났다. 3일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아이반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미엘린이 회복되려면 두 달은 족히 걸린다고 했다. 아이를 생각하면 강한 약을 쓸 수가 없어서 그렇단다.

아이반은 에르긴을 향한 살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반의 말을 들은 에르긴이 창백하게 질렸다.

“……미, 미엘린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개자식.”

아이반이 검을 뽑았다. 아이반은 에르긴에게 마지막 길을 안내해 주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몸통과 분리된 머리가 바닥에 굴렀다. 아이반이 그것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피가 튀어 아이반의 망토를 적셨다.

그러나, 더 이상 에르긴이 이 세상에서 숨 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헨리는 이왕이면 재판을 거치지 그랬느냐고 투덜거리겠지만 말이다.

“사체를 수습해서 왕성으로 보내게.”

“예, 대공 전하!”

“저 용병은 왕성 경비대에 인도하게.”

“예!”

아이반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 그래도, 끝났다.

미엘린을 괴롭히던 것이 사라진 것이다. 아이반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디로 가십니까?”

“저택으로.”

미엘린에게 이 소식을 얼른 전하고 싶었다. 그 마음의 응어리와 두려움이 풀릴 수 있도록.

* * *

미엘린이 창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데이지.”

“후잉…….”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던 데이지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미엘린이 의식을 잃었던 3일 동안 내내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더니. 항상 빗질해서 찰랑이던 데이지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로시에 말로는 미엘린이 해 줘야 한다면서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했단다. 간식도 잘 안 먹고 말도 안 하고. 그런 장면을 봤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미엘린이 침대 옆을 톡톡 쳤다.

“이리 올라와, 데이지.”

“……미엘린…….”

커다란 눈에 눈물을 한 움큼 담고는 침대 위로 올라와 미엘린에게 달라붙었다. 팔을 끌어안고 코를 훌쩍이는 데이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많이 놀랐니?”

데이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미엘린도 멀리 가는 줄 알았어요.”

데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처럼 안 오는 줄 알았어요…….”

“데이지.”

미엘린이 데이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엄지로 눈물을 쓸어 닦아 내고는 빵빵한 볼을 꾹 눌렀다. 붕어처럼 입술이 튀어나온 데이지가 콧김을 불었다.

“아이고. 콧물 난 거 봐. 누굴 닮은 못난이일까?”

“아, 아니에요! 데이지 안 못생겼어요…….”

데이지가 울먹이면서도 할 말은 잊지 않았다. 미엘린이 작게 웃고는 데이지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데이지. 나는 여기 있잖아. 그렇지?”

“네…….”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 데이지가 그런 나쁜 기억은 잊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냥…… 나는 감기에 걸렸던 거야.”

데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엘린이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데이지가 그곳에 있었다는 거였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악몽일 뿐이었어, 데이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릴 수 있는 악몽.”

“미엘린…….”

“그렇게 잊어버리자.”

미엘린이 주문처럼 중얼거리곤 데이지의 이마에 키스했다.

“자, 이걸로 악몽은 잊어버리는 거야.”

데이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미엘린이 미소 짓곤 데이지를 끌어안았다. 그날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테인이 없었더라면 아이를 잃고 미엘린도 죽었을 거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였다.

만약 아이를 잃고 미엘린 혼자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건 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미엘린에게는 두 명분의 기적이 생겼다. 데이지와 배 속의 아이. 미엘린이 데이지의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어 다행이고…… 아무도 죽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미엘린의 손이 떨렸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로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예전엔 삶에 미련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쉬운 것이 너무 많았다. 미엘린은 이 행복을 최대한 오랫동안 누리고 싶었다. 데이지와 아이반, 그리고 배 속 아이와 함께.

* * *

“미엘린은?”

“지금 깨어 계십니다.”

잠든 데이지의 머리를 쓸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아이반이 침실로 들어왔다.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린다. 아이반이 내 침대 가에 앉았다.

“어떻게 됐어요?”

“에르긴은 찾았습니다. 용병이 술술 불더군요.”

“그래서 에르긴은 어떻게 됐나요?”

“……왕성으로 보냈습니다. 아마도 사형에 처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아이반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리고 손등에 키스했다.

“다행이에요, 미엘린. 고마워요.”

“대체 뭐가?”

“이렇게 돌아와 줘서…… 죽지 않고 살아 줘서…… 이겨내 줘서…….”

“아이반.”

아이반이 내 손등에 고개를 묻은 채로 한참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반이 울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렇게 체온을 나눠 주는 일뿐이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아이반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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