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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을 죽여주세요-92화 (완결) (92/92)

92화

다음 날, 크리스티나가 다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신고 있던 구두가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뛰어왔는지 뒤에서 하녀가 구두를 들고 쫓아왔다. 내 침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신발을 신었다.

“이런, 크리스…….”

“아, 진짜!”

크리스티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이를 가졌다며! 몸은 괜찮은 거야? 다친 덴?”

“다 괜찮아. 아이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고. 주치의가 2주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라고 한 것 빼고는 다 괜찮아.”

크리스티나가 별안간 눈물을 터뜨렸다.

“진짜 그거 미친 새끼 아니야?”

그러고는 욕을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댔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크리스티나가 진정을 되찾고 나서 말했다.

“……아가, 미안해. 그래도 이건 정말 욕해도 싼 일이었어. 너와 네 엄마가 죽을 뻔했잖아.”

코를 훌쩍인 크리스티나가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아이가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

“아마도? 내가 잘 이야기해 줄게.”

“……왕비 전하와 리엔스터 백작 부인도 와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안정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대표로 왔어.”

“나 대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긴은 끝났어, 미엘린. 시체도 묻히지 못하고 들개들 밥이 되었을 거래. 그리고 용병은 지하 감옥에 갇혔고. 아마 20년은 나오지 못할 거야.”

끝났다니.

그 말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소스라치곤 했다. 눈앞에 에르긴이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한동안 심리 치료를 쉬고 있었던 나는 다시 치료사를 부르기로 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게 나을 듯했다

그런데 에르긴이 끝났다니.

다시 한번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다신 에르긴을 못 보는 거야?”

“그렇다니까.”

“나를 위협할 일도 없는 거고?”

“그래!”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드디어……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진실로 자유가 된 것이다. 에르긴도, 김태진도. 에르긴의 죽음은 내 안에 살아 있던 김태진도 죽게 했다. 나는…… 진실로 과거로부터 풀려난 것이다.

그저 듣기 좋게 포장했지만, 나는 에르긴의, 그리고 김태진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내게서 피눈물을 뽑아낸 만큼 고통스럽길 바랐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결말이었다. 다시는 에르긴이 그 얼굴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날 일은 없을 것이다.

크리스티나가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울지 마, 바보야.”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크리스티나를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여태 내가 속에 담고 있었던 것들이 눈물에 녹아 사라졌다. 나에게 자꾸만 김태진을 상기시키던 에르긴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정말로 잊어버리는 거다.

완벽하게.

“너는…… 이제 행복하기만 하면 돼.”

“응……, 그럴게. 고마워, 크리스.”

나는 그간 크리스티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내 친구가 되어 줘서 정말로 고마워, 크리스.”

“별소리를 다 해.”

크리스티나가 장난스럽게 내 등을 툭툭 쳤다.

* * *

내가 침대 밖으로 나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 주일을 꽉 채운 이후였다. 내가 침대 밖으로 나와 첫걸음을 디뎠을 때 아이반은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는 아이반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드디어 일상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일상.

아이반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빼면 말이다.

“왜 그래요, 아이반?”

내 눈치를 살피던 아이반이 쓰게 미소 지었다.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미엘린.”

“음?”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시는 에르긴으로 인해 그런 일 겪지 않게 해 주겠다고 맹세했지요. 그러나 이번에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아이반.”

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줄이야. 아이반답다고 해야 하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이반, 당신은 나를 지키지 못한 게 아니라 구해 낸 거예요. 아이반이 에르긴도 잡았다면서요.”

아이반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 아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머저리입니다. 제가 좀 더 조심했더라면……. 당신 곁에 붙어 있었더라면…….”

“좋아요.”

“네?”

“용서해 줄게요.”

어차피 내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백날 떠들어 봐야 아이반의 죄책감을 희석시키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용서해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 말에 아이반이 놀란 얼굴을 했다.

“용서할게요, 아이반.”

내 의도를 알아차린 아이반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를 다치게 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용서를 비는 건 아이반이라니. 이러니까, 정말로 이러니까…….

“사랑해요…….”

스스로보다 나를 더 아껴 주는 사람이니까…….

“정말 많이 사랑해요, 아이반.”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다.

아이반이 입술을 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이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답을 들려주었다.

“저도…… 사랑합니다. 미엘린, 정말로 많이…… 당신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사랑합니다.”

아침 식사 주제로는 그리 적당하지 않은 듯하지만, 이런 것도 일상 아니겠는가. 아이반과 나는 서로를 닮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 * *

칼에 찔려 누워 있는 동안 나는 꿈을 꿨다.

아니, 사실은 꿈인지 현실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나는 미엘린을 만났다.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미엘린은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로 이끌었다.

‘아이를 가졌다며?’

‘그렇다더라.’

‘정말 축하해. 내가 해내지 못했던 것들을 너는 해냈네.’

‘……너도 할 수 있었을 거야.’

‘모를 일이지. 너하고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이니까. 아, 도착했다.’

미엘린이 왠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는 문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닫혀 있던 문을 그냥 통과한 것이다.

‘아…….’

내가 전에 살던 아파트였다. 김태진과 행복한 단꿈을 꾸었던 곳. 그리고 마지막 불행을 겪은 곳이기도 했다. 내가 공들여 골랐던 인테리어들이 눈에 익었다. 바닥에는 술병이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죽고 나서 이 집은 아마 김태진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어차피 죽은 이후의 일이라 아무 상관도 없었지만.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미엘린이 안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야! 김태진! 안 일어나? 계속 이따위로 살 거야!? 나랑도 헤어질래?”

오지연이었다.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치며 김태진을 흔드는 오지연의 배는 부풀어 있었다. 아이를 가졌구나. 더벅머리로 침대에 뻗어 있던 김태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꺼져……. 골 울리니까.”

“미친 새끼. 언제까지 이럴 건데! 이런다고 죽은 애가 살아 돌아오니? 어?”

“너는 참 뻔뻔하다. 그 애를 낳고 싶어?”

김태진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턱수염이 길게 자라 엉망인 몰골이었다.

“그, 그럼……. 생긴 애를 지우기라도 하라는 거야?”

“그게 누구 씨인지 알 게 뭐야. 친구 남편이랑도 뒹구는 여자가 뭘 못하겠어.”

“야!”

오지연이 김태진의 멱살을 잡았다. 김태진이 오지연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더러우니까 손대지 마.”

“넌 뭐 다른 줄 알아!”

“그래. 나나 너나 더러운 족속이지. 고고한 윤이나는 죽어 버렸고.”

“야!”

“꺼져, 좀.”

“……이렇게 살다가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윤이나가 대체 뭔데!”

“내 전부.”

미친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태진은 나와 미엘린을 스쳐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미친 새끼……, 회사에서도 잘리더니 돌아 버렸나.”

오지연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야, 김태진! 네 애 책임지라고!”

오지연이 소리를 치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꼴을 다 보고 있던 미엘린이 생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어때. 네가 원하던 결말이야? 두 사람은 회사에서 잘렸지. 회사 이미지에 안 좋다나. 소문이 쫙 퍼져 버렸거든. 그리고 내내 저 꼴이야.’

‘……속이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풉. 너는 솔직해서 좋다니까. 저들이 너를 잊고 사는 게 아님을 보여 주고 싶었어. 충분한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자, 이제 돌아가 볼까?’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엘린의 손을 잡았다. 투명하고 밝은 길을 함께 걸었다.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엘린은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는 절대로 멍청하게 살지 않겠다고. 나는 미엘린의 새로운 삶을 응원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너는…… 지금 행복해?’

아…….

환히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그럼 됐어……. 잘 살아, 윤이나. 아니, 미엘린……. 정말로 잘 살아.’

미엘린이 내 어깨를 떠밀었다.

‘그럼 안녕……!’

어둠에 파묻히면서 소리 질렀다.

‘너도 잘 살아! 너도 행복해야 해!’

마지막으로 본 미엘린은 미소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보다 환하게.

내 긴 악몽은 그렇게 끝났다.

여기까지가…… 나와 미엘린의 이야기다.

내가 대신 살게 된 미엘린의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다. ‘미엘린 틸리언즈’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진실로 내가 되어.

윤이나, 안녕.

내 진부했던 과거도 안녕.

아픔도 안녕.

“아이반!”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아이반의 품에 나를 던졌다.

“아이의 이름을 정했어요!”

허리를 숙이는 아이반의 귀에 이름을 속삭였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게 내가 살아갈 삶이었다. 절대로 혼자가 아닌 삶.

앞으로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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