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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예쁘고 재력이 넘침-1화 (1/91)

제1화

오랜 전쟁이 끝났다.

황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들의 노고를 칭송하며 화려한 개선식을 준비했다.

개선식의 단상 가장 높은 자리에는 황족이 앉아 있고, 좌우로 각 지방의 영주와 고위 귀족들이 자리 잡았다.

알트페리아는 발트레 공작가의 후계자 신분으로 개선식에 참여했기에 황족들과 가까웠다.

호명관이 크게 외쳤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루크 폰 그랑힐데 공자께서 입장하십니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두꺼운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황실 악단이 개선 행진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검은 투구를 쓴 남자가 입장했다.

투구로 얼굴을 가렸지만 휘날리는 망토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으로,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웅장한 행진곡에 목소리를 묻으며, 귀족들이 소곤거렸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죠.”

“적군이라지만, 사람을 베어 넘길 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답니다. 감정이 없는 그 모습이 마치 악마 같았다더군요.”

“제국군 사이에서도 피를 탐하는 미친개라 불리고 있대요.”

“어머, 무서워라.”

괴물 같은 실력으로 적은 물론 아군까지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어찌 되었든 루크 폰 그랑힐데는 제국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그런 영웅을 노골적으로 깔보며 무시하는 이유는 루크가 그랑힐데 공작가의 정당한 후계가 아닌, 사생아이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황제의 호위기사가 외쳤다.

“제국의 태양께 예를 갖추십시오!”

루크가 투구를 벗으며 황제 앞에 부복했다.

그러자.

“세상에……!”

“흉측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놀란 귀족들이 예의도 잊고, 큰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흉흉한 소문이 가득 붙은 영웅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남자였다.

가볍게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드러난 짙은 눈썹과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

절묘하게 깎인 턱선과 입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루크의 얼굴에 그를 깔보던 귀족 몇몇이 태도를 바꾸며 소곤거렸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영웅의 칭호와 함께 작위 또한 내릴 예정이시라더군요.”

“포상금도 상당히 나온다죠?”

저열하기까지 한 악명을 상쇄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확인한 귀족들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제국이 패배하기 직전까지 갔던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엎을 정도의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 그리고 견줄 자가 없는 빼어난 검술 실력까지.

비록 사생아이긴 하나 공작 가문의 차남이고 황제로부터 따로 작위를 받을 예정이다.

혈통만 빼고 본다면 더할 나위 없는 근사한 사윗감인 것이다.

알트페리아는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저런, 이미 찜해 둔 사람이 있답니다.’

그렇게 탐이 날 것 같았으면 미리 찾아서 손을 썼어야지요.

잠시 후 다소 지루한 황제의 치하 연설이 시작되었다.

혐오, 질투, 동경, 선망.

루크는 온갖 감정이 담긴 시선들에도 흐트러짐 없이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짐은 그대에게 백작위와 함께 포상금을 내리겠노라!”

긴 치하 연설을 끝낸 황제가 작위와 포상금을 내리며, 루크에게 물었다.

“새로이 탄생한 영웅에게 묻겠다. 그대는 짐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원래라면 루크의 대답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이고, 신이 난 황제는 루크의 힘을 황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이 차 나는 황녀를 배필로 정하겠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알트페리아가 알고 있던 미래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루크가 투구를 벗어 만천하에 얼굴을 공개하면서부터 원작과 달라졌다.

루크의 입이 달싹였다.

“그렇다면 이 자리를 빌려 청혼의 기회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호오, 마음에 둔 여인이 있던 것인가.”

“예.”

“누군지 궁금하구나. 좋다, 허락하지.”

황제와 영웅의 대화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머리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그랑힐데 공자와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지만, 혹시 그가 자신을 연모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황제의 허락을 받은 루크는 미리 정해진 길을 걷는 것처럼 막힘없이 걸음을 옮겨 알트페리아의 앞에 섰다.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중얼거린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눈에 보고 반했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모인 귀족들이 경악했다.

“지금 발트레 공녀에게 청혼한 거야?”

“공녀는 약혼자가 있지 않나요?”

알트페리아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똥차는 이미 정리했답니다.’

기다렸다는 듯 루크의 손을 붙잡은 알트페리아가 답했다.

“기꺼이.”

* * *

제국은 혼란스러웠다.

마물을 거느리는 흑마법사의 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르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이름을 날리던 많은 기사가 죽고 여러 도시가 점령당했다. 많은 사람이 긴 전쟁으로 고통받았다.

그리고 패색이 짙을 무렵, 모두가 포기한 전쟁에 그랑힐데의 어린 공자가 참여했다.

황제까지도 제국의 패배를 각오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어린 공자가 생각지도 못한 온갖 전술을 선보이며 전세를 뒤집었다.

점령된 땅을 되찾고, 붙잡힌 포로들이 해방되자 제국인들은 희망을 보았다.

검은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전장의 영웅.

그가 전장에 서면, 제국은 승리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참여하는 전장이 유독 치열했기에 온갖 악명이 돌기도 했다.

루크 폰 그랑힐데가 총대장의 자리에 오르고 1년이 지났을 때, 제국에 승전가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모든 귀족은 영웅의 개선식에 참여하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 * *

알트페리아는 북부를 다스리는 발트레 공작 가문의 후계자였다.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된 그녀는 아직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지만, 후계자 신분으로 공식 행사에 참여했다.

봄이 시작되었는데도 아직 눈으로 덮여 있는 발트레와 달리 제도는 싱그러운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여기저기 봄꽃이 활짝 폈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제도는 얼음투성이인 발트레의 땅과 확연하게 달랐다.

창문 밖을 바라보던 알트페리아가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앨런에게 약혼장을 받아내겠어.”

앨런은 알트페리아와 약혼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

정작 약혼장에는 서명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앨런이 약혼을 자꾸만 미루는 이유는 알트페리아도 알고 있었다.

“작위만 넘겨. 그러면 바로 서명해 줄게.”

알트페리아는 사랑하는 앨런에게 많은 것을 내줬다.

충성스러운 가신이 등을 돌릴 정도로 그를 두둔했고, 가문의 재산으로 사업도 도왔다.

그러나, 모든 걸 내어줬지만, 작위만큼은 줄 수 없었다.

발트레에 남아 있는 가신 모두가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약혼장에 서명하면 가신들을 설득할게요.”

“작위가 먼저야.”

서명부터 해도 발트레 공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작위부터 내놓으라며 서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약혼은 벌써 반년이나 미뤄졌다.

‘작위부터 넘기자.’

앨런이 약혼해 준다는데 가신들의 반대가 대수인가.

가신을 모두 잃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사랑을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제도에 도착하기 전 생각이었고, 알트페리아에겐 흑역사가 되겠다.

열린 마차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들었어? 전장의 괴물이 돌아왔대!”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웃는 모습이 괴물 같다죠. 소름이 끼쳐요. 영웅이지만 무섭다구요.”

“폐하께서 작위를 내려주실 거예요. 앞으로 루크 백작님이라 불러야 할 거예요.”

알트페리아는 가신들을 설득하느라 북부의 영지로 돌아갔다가 막 제도에 돌아온 참이었다.

몇 달 만에 제도에 올라온 그녀는 영웅의 소문을 들었다.

‘루크라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피를 뒤집어쓰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귀신 같다는 그 이야기가 너무 익숙했다.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는데.

‘머리가 아파……!’

알트페리아는 순간 큰 두통이 일어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두통이 잦아들 무렵, 마치 연극을 보는 것처럼 어떤 여자의 삶이 알트페리아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많은 것을 포기했다.

돈이 없어 무시당하고, 빚쟁이에게 쫓기며 불안하게 살던 여자.

‘아, 미친!’

가난에 쫓겨 살던 여자는 자신의 전생이었다.

문제는 지난 과거가 아니었다.

전생과 다르지만, 익숙한 세상. 친숙한 사람들.

그녀는 단순히 풍경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이야기까지 익히 알고 있었다.

‘일하던 카페에서 봤어. 아니, 읽었어.’

기억이 떠오른 알트페리아는 자신이 무려 전생에 읽었던 판타지 소설에 빙의했단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이거, 그 판타지 소설 아니야? 꿈도 희망도 없던 피폐물 소설!’

남주는 물론 악역까지 불쌍하게 데굴데굴 구르는 매운맛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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