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겨울이 가도 꽃은 피지 않는다>
그런 제목을 가진 판타지 소설이었다.
모든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주인공은 얼굴을 가리고 다녔는데 분명 먼치킨인데도 다치는 것은 기본이요, 배신에 사기에 온갖 시련을 다 겪는다.
하도 피폐하다 보니 남주 말고도 주변 인물들까지 죄다 불행해졌지.
원작의 내용이 하나하나 떠오른 알트페리아의 얼굴이 순간 파래졌다.
‘잠깐, 이대로라면 앨런이 내 남편이 되잖아.’
약혼장에 서명하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남남이지만 소설대로라면 머지않아 부부가 될 예정이었다.
앨런의 이름은 잊을 수 없었다.
원작 속 쩌리 악역 중 하나인 그는 답이 나오지 않는 찌질한 인간쓰레기였으니까!
여자들에게 해가 되는 범죄를 저지르던 앨런은, 급기야 2황자의 연인에게까지 마수를 뻗는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실수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난 2황자의 연인은 앨런을 공개적으로 고발한다.
그는 진심으로 억울해 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가 여태 저지른 범죄들이 탄로 나게 된다.
결국 황족이 될 여인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 죄로 그는 물론 그의 부인까지 처형된다.
앨런이 등장할 때마다 가스라이팅당하고 학대당한다고 묘사되는 불쌍한 부인의 이름이 바로 알트페리아였다.
‘하필이면 덩달아 죽는 악역의 부인이 나였냐고!’
심지어 그녀는 끝까지 남편을 용서해 달라고 황자에게 빌기까지 한다.
모든 기억이 떠오른 알트페리아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 자식이 바람피우는 건 진작 알고 있었잖아.’
실제로 알트페리아는, 의도치 않고도 그가 비열하게 구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 다만, 바람 현장을 들킬 때마다 앨런은 양손을 싹싹 비벼대며.
“다른 여자랑 시간을 보낸 건 사실이지만, 내 진짜 사랑은 너뿐인 거 잘 알잖아?”
―라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구질구질하게 매달렸다.
버려도 시원찮을 마당에 자신은 또.
“믿어요, 앨런.”
―이라며 쉽게 용서해 주고 넘어갔다.
‘아니, 남들은 주워가지도 않을 쓰레기를 왜 끼고 살려는 거야.’
앨런은 얼굴이 조금 반반하긴 하지만 그뿐이다.
인성은 물론 행실까지 고약한 놈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인 자신을 떠올리니.
‘악, 내 흑역사!’
처음 헤픈 모습을 보았을 때 뺨을 때리지 못한 게 후회됨과 동시에, 앨런에게 푹 빠졌던 저를 떠올리면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으아악, 기억 삭제! 삭제해 줘!’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알트페리아는 먼 길을 여행해 피곤하다는 이유로 제도의 발트레 저택에 틀어박혔다.
정확히는 자기반성을 했다.
뉘우침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손을 써야지 연좌제로 싸잡혀 죽는, 악역의 부인이 되지 않을 테니까.
‘당장 앨런이랑 파혼해야 해.’
쓰레기를 위해서 작위 같은 건 양도하겠다는 개소리를 지껄였다니.
‘내가 작위를 왜 넘겨. 공작 자리는 내 것이야.’
자리만 지키면 전생처럼 배를 곯으며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 필요도 없다.
나면서부터 받은 권력 수저를 놓을 생각을 했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발트레 공작이 되어도 문제가 있는걸?’
발트레 영지에는 종종 마물이 출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요 몇 년간은 전쟁 때문에 마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원작에 의하면 마물들은 힘을 비축하고 있다가 무리 지어 나타났다.
마물과의 싸움에 익숙한 발트레의 고용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강해서, 손도 쓰지 못하고 패배했고, 영지는 쑥대밭이 되었다.
‘망했는데?’
발트레 가문의 사람들은 대대로 소드마스터의 재능을 타고났다.
그러나 알트페리아는 검에 전혀 재능이 없어 영지 관리를 중점으로 교육받았다.
그러니, 영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자신은 있지만, 무력을 사용해 마물로부터 영지를 지킬 순 없었다.
이대로라면 작위를 물려받아도 마물 떼의 공격을 받아 멸망이었다!
* * *
며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알트페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방 앞을 지키던 시녀 세이룬이 크게 기뻐했다.
“공녀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응. 별일 없었지?”
요깃거리를 준비하던 세이룬이 말했다.
“제도는 이번 개선식의 주인공 때문에 시끌벅적해요.”
“아, 그 소문의 영웅 말이야?”
그 덕분에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었지. 아주 큰 충격이었어.
“맞아요. 사람을 100명이나 잡아먹은 괴물이래요. 오늘 제도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혹여 마주칠까 봐 걱정되네요.”
세이룬은 루크에 대한 악명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쟁이 10여 년이나 계속되어서 이야깃거리가 잔뜩 나오는 모양이었다.
‘음, 그런데 그거 다 뻥인데.’
흑마법사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 제국은 10여 년간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영토의 절반을 빼앗겼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루크가 형세를 뒤바꿨다.
그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건 물론이요, 흑마법사의 목을 하나하나 쳐냈다.
패배 직전까지 간 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해야 마땅하지만, 제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그랑힐데 공작 부인이 손을 써서 온갖 악담을 만들어내 퍼뜨렸다.
영웅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 공작가의 사생아 루크 폰 그랑힐데.
그는 모든 사람이 데굴데굴 구르는 피폐물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이었다.
루크는 전장에서 함께 싸운 2황자와 우애를 쌓고 두터운 관계가 되었다.
그런 루크가 2황자와 거리를 두게 되는데, 바로 황제가 개선식에서 그와 막내 황녀의 혼담을 추진하기 때문이었다.
‘친우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생겼으니 심란할 거야.’
당연히 완곡하게 거절하지만 황제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특히 개선식 이후에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드래곤이 풀려난 뒤로는 더더욱.
날뛰는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건 루크였다.
비록 크게 다치긴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마물의 왕인 드래곤을 쓰러뜨린 건 대단한 일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루크의 힘을 알게 된 황제는 그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어휴, 지금 보니 나랑 똑같네.’
혼인 때문에 골치 아파지는 것이.
그런 생각을 하던 알트페리아는 무언가를 퍼뜩 떠올렸다.
수많은 소설을 보면 난처한 약혼 파기는 약혼으로 한다.
곤란한 사람끼리 약혼하면 서로 혼담을 피할 수 있고.
‘게다가 루크는 먼치킨이잖아.’
그가 있으면 마물이 개미 떼처럼 쏟아져도 문제 될 것이 없을 테다.
생각을 마친 알트페리아는 당장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오늘 밤, 루크를 만나야 해.’
원작에서 그에겐 특이한 설정이 붙어 있었다.
바로 빙의자라는 것이다.
진짜 루크 폰 그랑힐데는 그랑힐데 공작 부인의 학대를 버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어두운 다락방에서 굶어 죽었다.
그러다가 그가 눈을 다시 떴을 땐 다른 사람이 빙의한 상태였고.
현대 판타지 세계관 속의 헌터로 살다가, <겨울이 가도 꽃은 피지 않는다>의 루크 폰 그랑힐데에게 빙의했다지.
그는 헌터였을 때 검성이라 불릴 정도로 검을 잘 썼고, 성좌에게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 아직도 성좌를 데리고 있었어.’
성좌는 신, 혹은 초월자로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살펴보는 존재였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아이템을 후원해 주기도 하는데, 무슨 짓을 해도 구할 수 없는 현대 문물도 많다.
쉽게 말해 수호천사 같은 존재랄까?
루크의 곁에 있다가 성좌에게 잘 보이면 콩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주로 먹을 걸 후원해 주던데.’
그게 어딘가.
알트페리아는 루크의 작중 행적은 꿰고 있었다.
개선식 준비가 한창일 때, 루크는 홀로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제도에 도착한 오늘 밤에도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세이룬.”
“예, 공녀님.”
“외출복을 빌려줘.”
자신이 밤에 몰래 나갔다는 말이 앨런의 귀에 들어가면 귀찮아질 듯하니, 변장하고 조용히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제 옷을요? 뭐에 쓰시려고요?”
“오랜만에 제도에 왔으니 산책 좀 하고 오게.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게 변장해야겠어.”
얌전했던 평소의 알트페리아의 행동과 조금 달랐지만, 충성심이 강한 세이룬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야밤에 혼자 나간다고 하니 걱정이 앞섰다.
“혹시나 해서 여쭈는데……. 앨런 님께서 공녀님을 야심한 시간에 뵙자고 하신 건 아니죠?”
세이룬은 순진한 자신이 앨런의 말을 믿고 그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앨런이라면 당연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놈이지만 오해를 사는 건 싫었다.
“앨런과는 헤어질 생각이야.”
“네? 정말요?”
“응.”
세이룬은 기쁘다는 듯 가볍게 박수를 쳤다.
“세상에, 잘 생각하셨어요! 공녀님께서 앨런 님을 너무 좋아하셔서 차마 말하지 못했는데, 계속 여자를 끼고 다니는 걸 보면 좋은 사람 같지 않았어요.”
알트페리아는 당연히 앨런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한때는 절절히 사랑했던 듯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에 대한 마음은 싹 사라졌다. 미련은 단 한 톨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그놈 때문에 허비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흑역사를 떠올리니 괴롭기도 하고.’
“맞아, 그러니 기분 전환을 좀 해야겠어.”
“알겠어요. 빠르게 준비할게요!”
자신의 외출복을 꺼내 온 세이룬이 알트페리아의 환한 은발이 눈에 띄지 않도록 돌돌 말아 올려 머리 장식으로 고정하고 로브를 씌워줬다.
완벽하게 변장을 끝마친 알트페리아는 세이룬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