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제국을 구한 영웅이 반했다고 먼저 나서면, 앨런은 물론 그의 아버지인 로저필드 백작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전쟁 영웅을 어린 황녀와 혼인시키겠다는 황제도 미친 생각을 접겠지.
황제도 참 또라이였다. 황녀는 아직 열 살밖에 안 됐는데!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청혼하기까지 하면 황제가 뭘 어쩌겠는가.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픽 웃었다.
“나와 결혼하고 싶어서 아무렇게나 던지는 말이 아니고?”
“어머, 자의식이 참 충만하시네요.”
“공녀님께서도 방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잘생겼다고. 전쟁터에서도 저를 보고 청혼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지라.”
“누가 평생 부부로 지내자고 했나요? 제가 약혼자를 떼어내고, 작위를 물려받고 영지가 안정되면 군말 없이 깔끔하게 이혼해 드릴게요.”
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저 얼굴을 달고 있으면 자의식 과잉 정도야 당연할 것 같아.’
그렇지만 자신은 루크에게 수작 부리는 게 진짜로 아니었다.
“계속 의심하는 것 같아 제대로 말씀드릴게요. 영웅께서 잘생긴 건 맞지만, 제 취향은 전혀 아니거든요. 평생 반하지 않을 자신 있으니, 이혼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취향은 화려한 금발을 가진 화사한 미남 쪽이었다.
‘그래서 앨런을 좋아했었던지도.’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거래라고 하셨죠. 그래서 공녀님께 청혼한 제가 얻게 되는 건 무엇입니까.”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한 이야기였다.
사실 알트페리아는 루크에게 줄 것이 없었다.
작위는 물려받기 전이고, 발트레의 가용 재산 대부분은 로저필드 가문의 사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루크가 필요로 할 만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정보였다.
눈썰미가 좋은 그를 쉽게 속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아예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좋으리라.
“저는 정보를 드릴 생각이에요. 영웅께서는 앞으로 곤란한 일을 아주 많이 겪으실 건데, 제가 있으면 편하게 해결할 수 있으실 거랍니다.”
루크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오는 대로 막 뱉는 소리 같지만, 나를 믿어야지 우리가 편해진다고!’
애석하게도 루크가 황녀와 원치 않는 약혼을 하는 건 시작일 뿐이었다.
원작이 어마어마하게 매운맛 피폐물이다 보니, 주인공인 루크도 엄청나게 고생하게 된다.
드래곤을 쓰러뜨리다가 크게 다치고, 재산을 다 빼앗기기까지 했다.
‘살고 싶으면 나를 붙잡으렴.’
알트페리아는 싱긋 웃으며 미래를 한 가지 알려주기로 했다.
“영웅께서도 약혼 문제로 꽤 골머리를 썩이고 계실 거예요.”
무표정했던 그의 입매가 굳어졌다.
황녀와 혼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정작 당사자인 루크도 오늘 밤에 막 들었던 참이니까.
게다가 황제는 아직 확실하게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이런 극비 정보를 알고 있는 알트페리아는 한눈에 봐도 수상한 사람이었다.
알트페리아는 덤덤하게 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약혼은 추진될 거예요. 영웅께서는 쉽게 거절하지 못하실 거랍니다. 물론, 파혼도 못 하실 거고요.”
특히 황제는 루크가 드래곤을 쓰러뜨리고 나서 그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황제의 압박을 받은 루크는 원작이 끝날 때까지도 약혼을 파기하지 못한다.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그쪽은 빙의자죠? 저도 빙의했거든요.”
그는 피를 닮은 듯한 새빨간 눈동자로 알트페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는 잘 벼려진 칼날이 제 목에 드리우는 기분이 들었다.
‘또 협박하네!’
루크가 인내하고 있을 때 설명을 잘해야 했다.
책에서 보았느니, 말았느니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의심을 사고, 사실을 증명하는 건 어려웠다. 그보다 그가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공감할 수 있도록 빙의자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저는 운이 좋게도 특별한 능력을 조금 갖고 있어요. 바로 미래를 보는 거죠.”
<겨울이 가도 꽃은 피지 않는다>에는 루크가 헌터로 활동했던 전생 이야기가 나오는데 종종 예지자라는 특별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지자들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다지.
알트페리아는 예지자인 척을 하기로 했다.
“가까운 미래에 영웅께선 불행해질 거랍니다.”
루크가 피식 웃더니 답했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는 그만두십시오. 혹여 제가 신전에 당신을 고발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실 이 세계에 빙의한 것은 루크 혼자가 아니었다.
드물지만 종종 루크가 살던 헌터 세계의 사람이 기억을 가진 채 태어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신전에 끌려가 화형당하므로 대부분은 눈치껏 숨기고 살아간다.
뭐, 일반적으로는 빙의자라고 해도 전생의 능력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에 밝혀봤자 좋을 것도 없다.
루크 또한 전생의 모든 능력을 잃었지만, 검 하나로 지금의 실력을 쌓아 올려 영웅이 된 거였고.
그렇게 루크는 먼치킨 주인공이 되었다.
“영웅께서는 신전에 신고 같은 건 하지 않으실 거예요.”
“무엇을 믿고?”
“영웅께선 제 정보가 필요할 테니까요. 원활한 거래를 위해서 제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증거를 하나 제시할게요. 2황자 전하는 내일 이스턴 왕국으로 떠나게 되실 겁니다.”
루크가 제도로 귀환한 바로 다음날.
그의 친우인 2황자가 황제의 명령으로 이스턴 왕국으로 떠난다.
황후는 시녀를 어머니로 두고 태어난 2황자를 아주 아니꼬워한다.
마치, 그랑힐데 공작 부인이 루크를 미워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죽으라고 전장에 떠밀어놨더니, 루크의 도움으로 승리하고 돌아와서 얄미워 죽겠을 것이다.
그래서 루크가 제도로 돌아오자마자 손을 쓴 것이다.
루크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당연했다.
황후는 지금 한창 손을 쓰고 있을 거고, 2황자조차 당장 내일 아침 해가 밝은 후에야 알게 되는 사실이니까.
“제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려면 몇 시간만 기다리면 돼요. 내일 해가 뜨는 대로 확인해 보시고 제 말대로 된다면 계약에 응해 주세요.”
이야기를 끝낸 알트페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덧붙였다.
“제게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면 발트레 저택으로 찾아와 주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시 만나면 하죠.”
그리고 그녀는 머리 장식을 뽑아서 루크에게 건넸다.
“발트레의 징표가 새겨진 장신구예요. 길에서 주워서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저를 찾아왔다고 하면 돼요.”
* * *
루크와 헤어진 알트페리아는 가게 밖으로 나오다가 멈칫했다.
골목 사이로 달려오는 세이룬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 역시 우리 집 시녀들은 유능하다니까.’
따돌려도 이렇게 금방 찾아내다니.
“세이룬!”
“공……. 아니, 아가씨!”
변장까지 하고 나온 걸 인식한 세이룬이 황급히 호칭을 바꿨다.
“흐어어엉, 사라지셔서 걱정했어요!”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을 그렁거렸다.
“잠깐 한눈을 팔다가 세이룬을 잃어버렸어. 그래도 잘 찾아왔네?”
“저는 아가씨가 대륙 반대편에 가셔도 찾을 자신이 있어요! 그보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죠?”
알트페리아가 무사한지 코를 훌쩍이며 샅샅이 살펴보던 세이룬이 무언갈 발견했다.
“묶어둔 머리가 풀어졌어요. 헉, 머리 장식도 사라졌네요!”
루크에게 머리 장식을 건네준 알트페리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레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어라, 정말이네……. 아끼는 거였는데 어디에 흘렸나 봐.”
“찾아볼까요?”
“아쉽지만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너무 늦으면 저택에서 나를 찾을 거야. 이만 돌아가자.”
그렇게 그녀는 왜인지 술집을 돌아보는 세이룬과 함께 조용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루크가 먼저 움직여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알트페리아는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었다.
‘루크는 지금쯤 성좌들과 상담을 하고 있으려나.’
성좌들은 루크를 통해 세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니 술집에서 루크와 자신이 대화를 나눌 때 곁에서 다 보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성좌들 얼빠라던데.
전생에서부터 루크에게 달라붙은 이유도 그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거울을 빤히 보던 알트페리아는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흐음, 앞머리를 잘라볼까?’
눈매가 날카로워 보여서 싫다는 앨런의 말에 충격받아 기른 앞머리는 눈을 가릴 정도였다.
왠지 답답해 보여 확 잘라버리고 싶었다.
앞머리를 매만지던 알트페리아가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오팔을 닮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보석처럼 예쁘기만 했다.
거울 안에서 새초롬해 보이는 눈이 살짝 휘며 웃었다.
‘나 정도면 괜찮지?’
루크와 같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성좌들 또한 함께하게 된다는 것이다.
설령 루크가 자신을 꺼린다고 하여도, 자신이 성좌들의 마음에 들면 그들이 루크를 설득해 줄지도 모른다.
* * *
알트페리아와 헤어진 루크는 술집 근처 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그랑힐데 공작 저택에 갈 수 없었다.
자신을 끔찍하게 미워하는 공작 부인이 장악한 저택엔 적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환대받지 못하는 저택에 가서 날을 세우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호텔 쪽이 좋았다.
‘얼른 작위를 받고 그랑힐데를 나와야겠군.’
개선식이 끝나는 대로 황제는 작위와 함께 포상금을 준다고 했다.
돈이 생기면 지긋지긋한 저택에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루크는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혼잣말했다.
“발트레 공녀의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까?”
그녀는 자신이 예지 능력을 지닌 빙의자라고 했다.
허풍이라 하기에는 황제가 추진하는 약혼까지 알고 있는 점이 걸렸다.
띠링, 루크에게만 보이는 성좌들의 알람창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