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발로 밟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이번에는 루크의 주먹맛을 보여줘서 좋았다.
흙투성이가 된 앨런이 볼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이……. 이게 무슨……. 힉!”
앨런은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루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그를 덮쳤기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찔 떨었다.
“크윽…….”
루크의 시선을 피한 앨런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벌벌 떠는 사내가 한심해진 루크가 살기를 거뒀다.
그제야 앨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시 주저앉았다.
겁을 잔뜩 먹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쿡.”
알트페리아는 그의 하찮은 모습을 보며 낮게 웃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앨런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여자의 팔을 붙잡고 윽박지르다니, 신사가 할 짓입니까?”
“내 여자를 어떻게 하든지는 내 마음입니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내 여자라고 하셨습니까? 아직 아무런 관계도 아닐 텐데요.”
귀족이 혼인을 올리면 황실에 공식적으로 등록된다.
하지만 알트페리아와 앨런이 정식으로 혼인했다는 이야기는 돌지 않았다.
약혼 이야기가 오갈지는 몰라도 혼인한 사이는 아니란 거였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아직 남남인 것이다.
“리아와의 혼인은 바로 내일 진행할 겁니다!”
알트페리아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뭐래?’
작위부터 내놓으라며 약혼을 피하더니, 루크와의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당장 내일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
‘어휴, 저놈 덜 맞았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루크가 한층 더 싸늘해진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중에도, 그 어떤 관계도 아닐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제가 공녀께 청혼할 테니, 당신에게 순서가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앨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찬가지로 알트페리아도 눈을 크게 떴다.
한번 생각해 보겠다던 루크가 다른 사람 앞에서 청혼 운운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앨런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공자가 리아를 언제 봤다고……!”
“조금 전에 처음 뵈었지만, 한눈에 반했습니다.”
알트페리아가 휘청거렸다.
앨런 때문이 아니라 루크 때문에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공녀님?”
루크가 서둘러 손을 뻗어 알트페리아의 몸을 지탱했다.
그녀는 얼떨떨해 하며 루크의 부축을 받았다.
‘연기 잘하네.’
아무래도 루크는 실전에 강한 모양이었다.
한 대 맞았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앨런이 외쳤다.
“지금에 와서 약혼을 무르진 못합니다! 이제 남은 건 결혼뿐입니다!”
루크가 픽 웃었다.
“적장의 머리를 여럿 베었더니 포상금이 두둑이 나왔습니다. 쓸 곳도 없었는데 지금 당장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리면 되겠군요.”
전장에 참여한 루크가 적장의 목을 잘라 쓸어 담았다는 소문은 제도 전체에 퍼져 있었다.
허세 부리지 말라며 윽박지르자니, 애석하게도 사실이었다.
루크는 앨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큭, 지금은 바쁜 일이 있어서 다음에 마저 이야기하죠!”
웃는 얼굴과 달리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진 탓에 등에 소름이 쫙 돋은 앨런은 황급히 사라졌다.
알트페리아는 구두 끝을 바닥에 톡톡 쳤다.
“도와주지 않으셔도 제가 해결했을 텐데요.”
“제 도움이 쓸모없었습니까?”
“앨런 앞에서 청혼 이야기를 꺼낸 건 잘하셨어요. 덕분에 앨런은 쉽게 떼어낸 것 같아요. 이제 영웅께 붙은 황제를 떼어낼 차례네요.”
“…….”
“그나저나 왜 다시 돌아오신 거예요?”
돌아간다더니.
“머리 장식을 돌려드리러 왔는데 막상 드리지 않아서 말입니다.”
맞다, 머리 장식!
핑계 삼아 줘놓고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주먹 쥔 손을 풀자 엉망으로 조각난, 머리 장식이었던 것이 들어 있었다.
“……조금 전 주먹을 휘두르다가 부러진 모양입니다.”
당황한 그가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그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는 조각 사이에서 빠져나온 보석 한 알을 쥐었다.
“돌려받은 거로 칠게요.”
* * *
머리 장식을 돌려준 루크는 다음 날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잡고 돌아갔다.
뒷정리를 끝마친 세이룬이 알트페리아를 찾아왔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뭐가?”
“앨런 님은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돌아가시고……. 머리 장식을 주워 온 사람은 소문의 그 영웅이라면서요!”
“아, 아. 앨런이랑은 헤어졌고, 공자껜 청혼받았어.”
“잘되셨어요! ……으음, 네?”
세이룬은 루크의 헛소문을 잔뜩 들은 참이었다.
그러니 그를 두려워할 법도 했다.
“너도 그랑힐데 공자를 봤지? 신문에 실린 건 다 헛소문이야.”
“하긴……. 뿔이 달린 괴물이라더니, 막상 보니 저와 같은 사람이더라고요. 그…… 그래도요!”
여전히 루크에 대한 경계는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뭐, 앞으로 자주 볼 테니,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스스로 깨닫겠지.
구두 끝으로 땅을 툭툭 치던 알트페리아가 말했다.
“그나저나 구두 수선을 해야겠어.”
“수선이요? 발이 불편하세요?”
알트페리아는 신고 있던 구두를 쑥 벗어 앞부분을 손끝으로 쿡쿡 찔렀다.
“이 끝에 강철판을 달아줘.”
“강철판요? 어떻게 사용하시게요?”
“호신용.”
“암기를 만드실 생각이군요! 그렇다면 강철판이 아니라 칼날을 넣는 건 어떠세요? 발길질에 날카로운 날이 튀어나오게 하는 방식이면 살상력이 올라가요!”
그렇게 험악한 건 싫거든.
“강철판으로 충분해.”
칼날 쪽이 더 좋을 텐데. 원샷원킬이고.
세이룬은 의아해 하며 알트페리아의 구두를 가지고 대장간을 다녀왔다.
주문은 했고, 완성품은 며칠 후에 나올 예정이란다.
“뛰어난 암살 무기 장인에게 맡겼어요! 공녀님에게 맞춰 가볍고 단단한 강철판을 달아주신대요!”
이로써 앨런을 처리할 무기 준비는 끝난 듯했다.
이제 남은 건 앨런과 파혼이었다.
알트페리아는 한때 소중히 보관했던 약혼장을 꺼냈다.
그녀가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던 약혼장에는 발로 밟은 흔적과 함께 구겨진 자국까지 있었다.
“에휴.”
다시 떠오른다, 내 흑역사!
그녀는 자꾸만 약혼을 미루는 앨런에게 제발 서명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앨런, 저번에 잃어버렸다던 약혼장은 새로 발급해 왔어요. 이제 앨런만 서명하면 돼요.”
하지만 앨런은 화를 버럭 내며.
“아, 자꾸 귀찮게 할래? 작위 양도가 먼저라고 했잖아!”
그런 말과 함께 바닥으로 휙 던지고 잘근잘근 밟은 걸 주워다가 보관한 거였다.
‘앨런은 약혼장이 내 손에 있는 걸 알기나 할까?’
아마 기억도 못 할걸.
그만큼 하찮게 생각했던 물건이니까.
그녀는 자신의 서명만 있는 약혼장이 황당하여 웃었다.
‘이것도 두 번째 만든 거지.’
첫 번째 약혼장은 서명하지 않는 건 물론 보관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잃어버렸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아, 약혼장? 그거 잃어버렸어.”
―라는 소리를 내뱉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펑펑 울었다.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존재조차 잃어버린 약혼장이 자신의 처지 같았다. 앨런이 자신을 그리 여긴다고 느꼈다.
이 세계에서 계약서는 신전의 공증을 받은 물건이었다.
계약서를 새로 발급받으려면 신전을 찾아가야 한다.
당연하게도 앨런은 귀찮아하며 가지 않으려고 했고, 이 상황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시녀에게 함께 가달라 부탁할 수도 없었다.
결국 알트페리아는 홀로 신전에 갔었다.
“약혼장을 실수로 잃어버렸어요. 지난번과 같은 내용으로 새로 발급받고 싶어요.”
그 말을 내뱉는 자신이 비참해서, 새로 발급받은 약혼장을 안고 그녀는 마차에서 엉엉 울었었다.
‘아, 쪽팔려.’
알트페리아는 과거의 기억을 잊고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서명에 선을 찍 그었다.
아직 양쪽 모두의 서명을 받지 않아 완성되지 않은 약혼장이었다.
그러니 알트페리아가 자신의 서명을 직접 지우는 것만으로 약혼 계약을 파기할 수 있었다.
앨런의 집에 있을지도 모르는 첫 번째 약혼장은 재발급과 동시에 효력을 잃었다.
그러니, 거기에 뒤늦게 앨런이 서명해 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 짜릿해.’
진작에 이랬어야 했는데 이까짓 종이를 끌어안고 있었다니 한심했다.
곁에 있던 세이룬이 마치 제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박수를 쳐줬다.
“축하해요, 공녀님! 드디어 그 똥수레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겠네요!”
세이룬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앨런을 보며 늘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 * *
알트페리아와 헤어진 루크는 곧장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방에 도착한 루크는 겉옷을 던져 버리고, 놀리는 듯 깔깔거리는 성좌들의 메시지를 바라봤다.
[‘사자의 서기관’이 청혼은 생각해 본다고 하지 않았냐고 합니다.]
[‘흑화한 염룡’이 루크의 오지랖이 발동했다고 합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루크는 오지랖이 넓어 세계를 구한다고 나선 거라며, 그를 욕하지 말라고 항의합니다.]
[‘사자의 서기관’이 욕하는 건지 실드를 치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루크가 입을 열었다.
“시끄럽습니다…….”
루크에게 결혼이란, 사랑하는 남녀가 맺어지는 것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제 상식에서 벗어난 행위라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앨런 때문에 괴로워하는 알트페리아를 바라보자 주먹이 멋대로 나간 건 물론, 입도 제멋대로 청혼하겠다고 내뱉었다.
성좌들이 말하는 대로 알트페리아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건 맞지만 무언가 걸린다.
‘아무리 그녀가 불쌍한 처지라고 하나 결혼하자는 소리까지 내뱉다니.’
어려운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곤 해도, 그에게도 명백한 선은 존재한다.
못된 약혼자에게서 구해낸다고 청혼을 하는 건 자신답지 않은 과한 행동이었다.
루크는 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뱉고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