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제멋대로 전장에 나타난 루크는 뛰어난 실력을 드러냈고, 그와 함께 전장에 선 자들은 하나둘 루크를 인정해 주군으로 모셨다.
그중 일부는 유진처럼 외부에서 온 용병이었지만, 그랑힐데의 기사들 중에서도 루크의 실력에 감화되어 동료가 된 자들도 있었다.
“그러면 다들 어디에 있습니까?”
“그랑힐데에 돌아가지 않고 따로 거처를 구해서 모여 있습니다. 소문을 듣자 하니 대장이 작위를 받을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우리 모두 대장 밑으로 갈 생각입니다. 어디든 따라갈 준비가 끝났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황제는 제국을 구한 영웅, 루크에게 작위를 준다고 했다.
작위만으로 입을 닦을 수는 없으니 영지도 딸려오지만, 그다지 좋은 지역은 아닐 것이다.
포상금이 나온다지만, 아무것도 없는 영지를 사람들이 살 만한 땅으로 만들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할 것이다.
그렇게 척박한 곳으로 가는 것인데도 루크를 믿고 따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든든하군요. 하지만 당신들을 받아들이는 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예상외의 대답을 들은 유진이 깜짝 놀라 테이블을 양손으로 탁탁 두드리며 물었다.
“에엥? 뭡니까, 설마 우리를 버릴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크게 감동하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줄 알았으니.
“…….”
그들을 내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알트페리아와 혼인하면 자신은 그녀의 영지인 발트레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그녀가 허락해야 할 일이었다.
‘부부가 되면 상담할 게 많아지겠군.’
루크는 순간 자신의 생각이 낯설었다.
하지만 왠지 미소가 나와 한 손으로 입술을 쓸어내렸다.
그의 모습에 유진은 움찔했다.
아까 전 루크에게서 풍겼던 수상한 기류가 다시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다시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간 화가 난 루크의 손에 최소한, 죽을지도 몰랐다.
이럴 땐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얌전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루크가 말했다.
“제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
뭐요, 결호오온?
사교성이 좋은 유진은 사교계의 일을 두루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돌아온 그랑힐데의 차남에 관한 이야기는 괴물이니, 악마니 하는 근거 없는 헛소문뿐이었다.
혼담은커녕 연애 이야기도 없었는데.
그런 루크가 결혼을 한다고?
수상한 기운을 팍팍 풍기는 모습을 보면 단순한 정략결혼도 아닌 것 같다.
아니, 대장이 제도에 올라온 지 사흘밖에 안 되었는데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혹시, 사기당하셨습니까?”
“…….”
“아니면 뭐 잘못 드셨습니까? 아니면 흑마법에 걸리시기라도?”
루크는 전장에서 검은 투구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녔다.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얼굴이 팔리지 않는 게 좋다나.
다만, 그가 맨 얼굴로 돌아다닐 때면 그의 미모에 홀린 사람이 종종 정체도 모르면서도 결혼하자고 매달렸다.
그러니 저 얼굴로 제도를 돌아다녔다면, 청혼이 쇄도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붙잡을 거라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들이민 사람이 있을지도.
우리 대장, 살벌하긴 하지만 상대가 불쌍하게 나오면 도와준다고 나선단 말이야.
“대체 누가 우리 순진한 대장을 데려가는 겁니까!”
루크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유진은 고이 키운 자식을 보내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떠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예에?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어느 가문 영애인지 알려주십시오!”
하지만 루크는 듣지 못한 척, 침묵했다.
어차피 개선식까지는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조만간 자신의 상대가 밝혀지긴 할 거지만, 유진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아졌다.
* * *
로저필드 백작의 저택.
앨런은 아침부터 가문의 주치의를 불러 짜증을 냈다.
“얼굴 꼴이 이게 뭐야?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잖아!”
앨런의 얼굴은 루크에게 맞아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죄송합니다, 소백작님.”
“하루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더 부었잖아!”
“약은 제대로 썼습니다. 어떤 연유로 낫지 않는지는 저도 잘…….”
앨런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오늘 캐서린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알트페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캐서린은 돈이 많은 가문의 영애였다.
그러므로 잘 보여야 하는 상대인데 이 꼴로는 나갈 수 없었다.
“하, 됐어. 사제나 불러와!”
단시간에 상처를 없앨 수 있는 건 신전의 사제들뿐이었다.
문제는 무진장 비싸다는 것.
큰 상처는 아니어서 적당한 등급의 사제를 불렀는데도 제법 돈이 나갔다.
‘아버지가 용돈을 줄이셔서 돈이 부족한데.’
앨런은 종종 도박을 즐겼다.
여자와 더불어 도박은 그의 삶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꽤 큰 돈을 날렸더니, 아버지인 로저필드 백작이 자신의 용돈을 제한해 버렸다.
여태는 부족해지면 알트페리아에게서 금전을 뜯어냈는데 요 며칠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해 돈이 떨어져 갔다.
상처 치료를 위해 신전에 선금을 보낸 앨런은 사제를 기다리며, 발트레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그렇게 내 관심을 끌고 싶나?’
알트페리아가 자신에게 헤어지자고 하는 건, 그냥 하는 소리일 것이다.
요새 들어 그녀에게 소홀했으니까.
저 좀 봐달라고 한 짓일 것이다.
그렇게 튕기는 것 정도야 짜증이 나긴 하지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질투를 유발하기 위함이라 해도 방법이 잘못됐다.
다른 남자를 끼고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으니까.
감히 자신을 두고 한눈판 척한 건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고, 그 자식.
‘제가 뭔데 남의 연애에 끼어들어?’
심지어 눈치도 없이 알트페리아에게 청혼하겠다고 설치기나 했다.
‘바보 같으니라고, 리아는 나밖에 모르는데.’
약혼해 달라고 내게 얼마나 매달렸는지 알아?
그런 알트페리아가 자신을 내치고 다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일 리 없지만 확실히 해두는 게 좋았다.
‘하아, 결혼은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약혼에 앞서 작위부터 달란 건 핑계였다.
결혼 적령기의 귀족들이니, 약혼을 하면 머지 않아 결혼 예식일을 잡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다.
따라서, 결혼하고 공작이 되는 거나, 공작이 되고 결혼하는 거나 결국 순서만 다를 뿐 결과는 같았다.
사실 앨런의 속셈은 젊을 때 즐길 거 다 즐기고, 결혼은 뒤늦게 하려는 거였다.
그랬는데.
‘감히 내 여자를 노려?’
여자를 빼앗긴 루크의 굴욕에 찌든 표정을 보기 위해선 약혼장에 얼마든지 서명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약혼장이 어디에 있더라?’
받았던 약혼장을 대충 어딘가에 던져놨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앨런은 설렁줄을 잡아당겨 집사를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소백작님.”
“약혼장을 찾아와!”
앨런과 달리 집사장은 바닥에 나뒹굴던 약혼장을 주워 고이 보관했던지라 오래 걸리지 않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게 앨런의 앞에 약혼장이 준비되었다.
여기다 서명하면 자신은 유부남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하아, 기분 엿 같네.’
품절남이 될 생각만 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자신 같은 인기남은 여러 여인을 사랑해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부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앞으로는 눈치를 보며 여자를 만나야 했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쌍해진 기분이 들었다.
껄끄러운 약혼장에 서명은 하지 않고 노려보던 참에 호출했던 사제가 도착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얼굴을 다쳤다. 당장 치료해.”
“알겠습니다.”
사제는 퉁퉁 부은 앨런의 얼굴에 신성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많은 신성력을 쏟아 넣어도 그의 상처는 나을 기미를 안 보였다.
결국 사제는 손을 떼어냈다.
“다 되었습니다.”
앨런은 기다렸다는 듯 근처에 있는 거울을 바라봤다.
상처가 아주 약간 가라앉았을 뿐, 여전히 그의 볼은 붉게 부어 있었다.
“치료하긴 한 거야? 여전히 부어 있는데?”
사제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오라를 실은 공격이라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합니다. 상처에 머물러 있는 오라도 심상치 않아서, 완벽히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흐르거나, 대사제 예하 정도나 치료가 가능하실 겁니다.”
현재 앨런이 부른 사제는 하급이었다.
하급이라고 하나 긁힌 상처나 부어오른 것 정도는 치료할 수 있다고 하여 값을 치렀는데 대사제를 부르라고?
장난해?
고작 하급 사제 하나 부르는 데도 용돈의 대부분을 썼다.
‘아버지께 말할까?’
치료비 정도야 주시겠지만, 누구에게 맞았는지 물어볼 게 뻔했다.
다른 사람에게 얻어맞았다고 설명하자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돈이 없는 앨런은 진상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하급 사제를 괴롭히다 보면, 상관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지금 약혼녀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이 얼굴로 어떻게 밖에 나가란 거야?!”
사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앨런의 고집이 먹혀든다는 거였다.
“신전은 가정의 수호자라며? 당장 결혼할 여자를 만나러 가는데 이 꼴로 갔다가 파혼이라도 당하면 책임을 어떻게 질 거야?!”
물론 당장 만나러 가는 건 알트페리아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
하지만 약혼장에 서명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밤늦게 알트페리아도 찾아가려고 했으니까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그게.”
앨런의 말은 우기기에 불과했지만, 정론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크게 당황한 사제가 우물쭈물했다.
신전은 계약과 결혼을 주관하여, 신뢰를 가장 중요시하게 여긴다.
그런데 부어오른 상처 하나 치료하지 못해 가정이 무너진다면 사제는 책임을 져야 했다.
기세가 등등해진 앨런은 이것 보라며, 약혼장을 들어 올려 팔랑팔랑 흔들었다.
“여기, 보이지? 난 약혼장에 서명하려던 참이었어.”
“…….”
“부인이 될 여자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너 때문에 엉망이 되었잖아!”
신전이 제작한 약혼장까지 내민 이상, 사제로서는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치료해 보겠습니다.”
“대사제만이 가능하다며. 당장 대사제를 불러와!”
“그건…… 곤란합니다…….”
죄스러운 표정으로 굽실거리던 사제는 무언갈 발견했다.
‘이상한데?’
모든 계약서는 신전에서 제작하며 위조 방지 마법이 걸려 있었다.
따라서 신성력을 잔뜩 머금고 있고 사제들은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소백작님……. 이 약혼장은 이미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엉?”
“이곳에서는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앨런은 테이블 위에 있던 펜에 잉크를 듬뿍 찍어 서명을 써 넣었다.
그러나 약혼장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신전에서 만든 공증 계약서는 양쪽 모두가 서명을 끝마치면 빛이 난다.
하지만 약혼장은 평범한 종이처럼 잠잠했다.
“제 말이 맞죠?”
사제는 거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앨런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럴 리가 없어.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
신전이 만든 계약서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건 사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