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확인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데.’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 줘봤자 앨런은 납득하지 않고, 계속해서 진상을 부릴 것 같았다.
‘차라리 대충 어울려주고 끝내는 게 낫지.’
사제는 기본적인 검사를 위해 계약서에 신성력을 사용했다.
신성력에 반응한 계약서에 글자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사제만이 확인할 수 있는 변경 내역이 떴다.
“반년 전에 재발급이 되었군요. 따라서 이 계약서는 모든 효력을 잃었습니다.”
그제야 앨런은 깜빡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알트페리아가 약혼장에 서명을 해달라고 매달리길래 귀찮아서 잃어버렸다고 말했던 것을.
“앨런, 저번에 잃어버렸다던 약혼장은 새로 발급해 왔어요. 이제 앨런만 서명하면 돼요.”
“아, 자꾸 귀찮게 할래? 해준다고 했잖아!”
계속 매달리길래 더는 귀찮게 굴지 말라고 그녀의 눈앞에서 약혼장을 밟았다.
그 후 약혼장이 보이지 않아서 잊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약혼장을 알트페리아가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일이 꼬이네.’
캐서린과의 데이트 시간을 조금 줄이고, 알트페리아를 만나러 일찍 가야 할 듯했다.
확인이 끝났는데도 사제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다시 확인해 보니까 재발급된 계약서도 효력을 잃었습니다.”
“무슨 말이지?”
“어제부로 약혼장에 적혔던 서명까지 파기되었습니다. 약혼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다행히 수호할 가정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군요.”
사제는 안심된다며 방긋 웃고는 자신의 일이 끝났다는 말과 함께 신전으로 휑하니 돌아가 버렸다.
앨런은 그런 사제를 붙잡을 수 없었다.
사제가 말한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약혼장에 적혔던 서명이 파기되었다고?
그 말은 알트페리아가 들고 있는 약혼장을 무효화시켜 버렸단 것이다.
‘설마 헤어지자는 말이 진짜였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알트페리아는 작위까지 넘기려고 할 정도로 저를 사랑했다.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매달리던 여자의 마음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자식이 그렇게 좋다고?’
솔직히 알트페리아가 데리고 있던 그 사생아의 얼굴은 좀 봐줄 만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던 알트페리아의 표정은 사랑에 깊게 빠진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 리아는 진짜로, 내 질투심을 자극하려는 걸 거야.’
자신과 약혼하기 위해 그 약혼장이라는 그 종이 쪼가리도 몇 번이나 재발급하지 않았나.
그까짓 약혼장은 새로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솔직히 요새 알트페리아에게 소홀했긴 하지.’
삐쳐서 잠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거라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 사생아는, 곧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고모님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거든.’
앨런의 고모는 루크의 어머니인 그랑힐데 공작 부인, 힐다였다. 힐다는 루크의 모든 것을 빼앗을 준비를 끝냈다고 말했다.
루크와 계속 만나면 알트페리아만 손해였다. 그녀도 머지않아 그 점을 깨닫겠지.
상황을 한 번 제대로 확인을 해볼 겸, 앨런은 자주 방문하는 옷가게에 찾아갔다.
앨런의 단골 가게 중 하나로 여기서 구매하는 옷값의 청구서는 전부 발트레로 간다.
“백작님께서 용돈을 줄이셨다고요? 그렇다면 앨런의 옷값은 제가 낼게요. 마음대로 사도록 하세요.”
알트페리아가 발트레 앞으로 청구하라고 가게에 말해 뒀기 때문이었다.
가게의 문을 열자마자 앨런을 알아본 직원들이 반겼다.
“어서 오세요, 소백작님. 이번에 새로 나온 신사복을 살펴보러 오셨나요?”
직원의 태도가 그대로였다.
그 말은 알트페리아가 지원을 끊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매달리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꿀 리가 없었다.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앨런은 기분 전환도 할 겸 알트페리아의 돈을 펑펑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이것저것 꺼내 입었다.
“다른 건 더 없어?”
“마침 소백작님께 잘 어울릴 법한 코트도 새로 나왔답니다. 함께 드릴까요?”
“전부 가져와.”
통이 큰 단골손님의 등장에 직원들은 굽실거리며 이것저것 꺼내 오면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어머, 소백작님의 훤칠한 키가 더욱 돋보여요.”
“워낙에 다리가 길어서 코트도 잘 어울리시네요.”
앨런은 알트페리아의 돈으로 제대로 기분을 전환하며 쇼핑을 즐겼다.
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른 채.
* * *
루크는 약속보다 이른 시간에 발트레 저택에 도착했다.
알트페리아의 시녀인 세이룬이 루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공녀님께선 현재 준비 중이십니다. 공자님께서 방문하셨다고 당장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릴 테니 따로 알리지 마십시오.”
“오래 기다리실지도 모르는데요?”
“제 방문을 알렸다가 괜히 마음이 급해지실까 염려되는군요. 저는 기다릴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루크의 말에 세이룬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세이룬은 사실 루크가 못마땅했다.
그녀의 눈에 루크는 사랑스러운 공녀님의 마음을 가지고 놀지도 모르는 도둑놈이기 때문이었다.
‘그 쓰레기도 처음에는 공녀님에게 잘해주는 척했었어.’
그러다가 점점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이룬은 사랑 때문에 상처받아 괴로워하는 알트페리아를 곁에서 다 지켜봤다.
얼마나 힘겨워했는지, 슬퍼했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이 잘생긴 남자는 쓰레기와 달리 약속도 잘 지키고, 점잖고, 예의도 차리고, 사과도 할 줄 알지만!
합격점을 주지 않고 계속 경계할 생각이었다.
‘공녀님은 내가 지킨다!’
세이룬은 루크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펴볼 심산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그는 태연하게 앉아 창문 밖 정원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세이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루크는 성좌의 알람을 보고 있었다.
[‘사자의 서기관’이 알트페리아의 드레스를 기대합니다.]
[‘흑화한 염룡’이 알트페리아에게는 어제 입었던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루크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흑화한 염룡’이 방에 붙여둔 알트페리아의 포스터는 뭐냐고 묻습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루크의 첫 춤을 기념해서 만들었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자기들끼리 시시콜콜하게 떠들던 성좌들이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사자의 서기관’이 코피를 뿜습니다.]
[‘흑화한 염룡’이 눈이 멀어버렸다고 합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기뻐서 기절했습니다.]
고개를 든 루크는 알트페리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기다리고 계신 줄 몰랐어요. 준비가 오래 걸렸죠?”
그런 말을 꺼내며 알트페리아는 제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그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요,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다행이에요. 오늘은 바깥에 나갈까 해요. 괜찮으세요?”
알트페리아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어제 춤추기 전 손짓의 의미를 배운 루크는 알트페리아의 손을 살짝 붙잡아 에스코트했다.
“예,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그들 뒤에 서 있던 세이룬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살짝 풀었다.
세이룬은 루크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알트페리아를 에스코트했다.
솔직히 말해 잘 어울린다.
‘음, 합격은 아니지만 가산점은 조금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세이룬은 잘 다녀오라고 두 사람을 배웅했다.
* * *
루크와 알트페리아는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어떤 수업을 합니까?”
배우려는 제자에게서 의욕이 넘쳐나자 알트페리아는 기분이 좋았다.
“춤과 표정 연습만으로도 개선식 무도회는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준비된 책을 하나 꺼냈다.
<속성으로 배우는 사교계 예절 ― 이것만 있으면 망신은 당하지 않아요!>
사교계 데뷔가 급한 사람이 벼락치기로 보는 책이었다.
“부족한 부분은 이 책을 읽으면 충분해요. 저도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이거든요.”
루크는 알트페리아가 건넨 책을 받아 들었다.
“꼼꼼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첫 장을 펼치더니 열심히 정독하는 게 아닌가.
알트페리아는 그의 손에 있는 책을 휙 뺏어 책장을 덮었다.
“책은 돌아가서 읽으시고요, 일단 오늘은 데이트할 거예요.”
“데이……트요?”
그 말에 루크가 긴장한 듯 멈칫했다.
표정도 조금 뻣뻣해진 거 같았다.
“혹시 외출이 싫으세요?”
“아니요. 싫은 게 아닙니다. 다만, 데이트는 처음인지라…….”
알트페리아는 그를 찬찬히 살폈다.
몸은 경직되었고, 귀 끝은 살짝 붉어졌다.
음, 자세히 보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역시, 미리미리 연습을 해둬야 할 듯했다.
“그게 문제예요. 황제가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찐한 사이의 커플이 되어야 하는데, 공자님께선 쑥스러움이 많은 것 같아요.”
“…….”
“자연스러워질 수 있도록 남은 이틀 동안은 매일 만나서 서로에게 익숙해져요.”
“익숙해지자는 것은…….”
“찰싹 달라붙을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예요. 그러니 제게 마음껏 붙으세요!”
한참 멍하니 있던 그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말은 잘 들어서 참 좋았다.
“일단 오늘은 쇼핑할 생각인데요…….”
알트페리아는 말끝을 늘이며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루크는 마치 점검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바른 자세로 고쳐 앉았다.
“……혹시 해서 묻는데 실례지만 공자께선 옷이 한 벌밖에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며칠 내내 같은 옷만 입으시는 거죠?”
처음 몬스테라 술집에서 만난 것부터 시작해서 루크는 늘 같은 검은 정장만 입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옷깃을 매만지며 답했다.
“다른 옷입니다. 어제는 여기 옷깃이 빳빳한 직선이었고, 오늘은 살짝 굴곡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매일 체크 남방만 입으면서, 다 다른 옷이라 우기는 공대생을 보는 기분이 든다.
자기들은 패턴이 다르다고 우기지만, 남들 눈엔 똑같은 체크무늬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