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됐어요. 다행히 시간은 있으니까 공자님의 옷을 사러 가요.”
“저는 괜찮…….”
“괜찮지 않아요. 귀족들은 체면을 따지거든요. 공자께서 입은 옷, 걸친 장신구, 신은 신발에 따라 상대의 태도가 달라져요.”
“…….”
“물론 곁에 있는 저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고요.”
“그렇다면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옷을 고르는 감각을 익혀두면 나중에 홀로 영지를 운영하실 공자님께도 힘이 될 거예요. 잘 차려입는 것만으로도 위엄이 살거든요.”
“혼자라…….”
그가 중얼거렸다.
뭐, 더는 묻지 않는 것을 보니 이해한 모양이었다.
사실 알트페리아에겐 속셈이 하나 더 있었다.
‘성좌님들, 답답하셨죠?’
원작의 루크는 늘 검은 옷만 고집했다.
그것도 아무런 무늬가 없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검은 정장만 골라 입었다.
성좌들은 그 얼굴 뒀다가 뭐에 써먹느냐며 난리였지만, 애석하게도 루크는 옷을 고르는 센스가 멸망한 거나 다름없어 차라리 검은 옷이 나았다.
‘아니, 성좌들의 말론 차라리 벗는 게 낫다고 했던가?’
하여튼 루크를 잘 꾸며놓으면 성좌들이 감동해서 뭔가를 꺼내줄지도 모른다.
성좌들의 후원! 로망이었다구!
이런 알트페리아의 꿍꿍이는 꿈에도 모른 채 생각을 정리한 루크가 입을 열었다.
“공녀님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옷을 따로 골라본 적이 없습니다.”
“전쟁터에선 뭘 입고 다니셨어요?”
“제복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거의 없던 센스가 아예 제로까지 증발해 버리지.
알트페리아가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남자 옷은 또 잘 고르거든요.”
“소백작의 옷을 자주 고르셨나 봅니다?”
그의 목소리에 약간 날이 섰지만 알트페리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맞아요. 저보다 그놈 옷만 잔뜩 골라서 보는 눈이 생겼어요.”
미친, 또 흑역사가 튀어나오네.
그래도 이번 흑역사는 조금 도움이 된다.
앨런 그놈은 워낙에 멋 부리는 걸 좋아했는데, 때문에 제도에서 유명하다는 남성용 살롱은 다 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련되었던 가게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 꼴뚜기를 사람으로 만든 곳이지.’
꼴뚜기를 사람으로 만들어줄 정도니, 남신이나 다름없는 루크는 훨씬 더 멋져지지 않을까?
오늘의 외출목표는 검은 옷 신사인 루크의 정복을 사는 것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눈요기할 좋은 기회였다.
솔직히 기대도 되었다.
알트페리아와 루크는 가게에 도착했다.
앨런과 함께 수십 번은 다녀간 곳이었다.
그만큼 매상을 잔뜩 올려줬기에 맨발로 나와서 반겨야 할 텐데 직원들은 조용했다.
아마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늘 앨런의 등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앞머리도 길게 길러 눈을 가리고 다녀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단골임을 알아보진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헉!”
그렇게 다가온 직원이 헛숨을 들이켜더니 루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직원의 저런 반응이 이해되긴 했다.
미의 신이 지상에 강림한 것같이 감동을 주는 미모니까.
알트페리아가 침착하게 말했다.
“진열된 옷부터 살펴볼 테니, 따로 카탈로그를 준비해 줘.”
“아, 알겠습니다.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직원이 자리를 비우자 알트페리아는 루크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가 움찔거렸다.
“불편하세요?”
“아뇨, 조금 낯설어서 그럽니다.”
“저도 그래요. 데이트하면서 이렇게 팔짱 낀 건 처음이네요.”
앨런은 여자가 있는 티를 내고 싶지 않다며, 데이트할 때도 거리를 뒀다.
‘에휴.’
짜증 나는 똥수레의 생각은 그만두고, 지금은 루크의 옷을 고를 차례였다.
알트페리아는 루크를 데리고 안쪽에 있는 옷들을 살펴봤다.
전장에서 오래 구른 사람답지 않게 루크의 피부는 하얀 편이었다. 그래서 밝은 색상의 옷도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녀는 옷을 꺼내 루크에게 직접 대보았다.
뭐야, 다 잘 어울리잖아?
손에 잡히는 아무 옷이나 들었는데 마치 화보를 찍는 것처럼 완벽했다.
꺼내는 족족 괜찮아서 계속 옷들이 쌓여갔다.
“놀랍게도 뭐든 잘 어울리시네요.”
옷걸이가 완벽해서 그런가?
맨날 검은 옷만 입는다고 툴툴거리던 성좌들이 그래도 루크 곁에 계속 남아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적때기를 입혀놔도 빛날 거 같기 때문이리라.
“고민이네요. 공자님의 정복으론 어떤 색이 좋을지.”
“공녀님은 어떤 색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푸른색을 가장 좋아해요.”
“아, 과연.”
그는 알트페리아가 입었던 파란 드레스를 떠올렸다.
햇살 아래에서 환하게 웃던 그녀와 특히나 잘 어울려 주변이 반짝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기분 좋은 과거를 회상한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저는 푸른색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 정복이었으면 합니다.”
그 말에 알트페리아는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멍하니 서 있자 루크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뇨. 저는 늘 상대에게 맞출 생각만 했어요.”
돋보이는 건 앨런이어야 하므로, 자신은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입고 싶은 색상의 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앨런의 기준에 맞추고 자신을 죽였다.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루크의 정장을 먼저 고르고 자신이 맞출 생각만 했었다.
“이번에는 제가 공녀님께 맞추겠습니다.”
“…….”
고개를 끄덕인 알트페리아는 푸른 드레스에 어울리는 남성용 정장을 몇 벌 골랐다.
한동안 제도에 계속 머물면서, 루크와 함께 다녀야 했다.
사이좋은 연인이었다가 부부가 되는 모습을 보이며, 많은 귀족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할 예정이었으니 그만큼 외출도 자주 할 것이다.
이왕 온 것, 루크가 입을 옷을 잔뜩 고르는 게 좋겠지.
“무도회 옷은 이게 좋을 것 같아요. 한 번 입어보실래요?”
알트페리아가 고른 옷을 받아 든 루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까지 따라간 적은 없는데, 듣기로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탈의실이 여러 개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동행인이 기다릴 수 있는 대기실이 있었다.
알트페리아는 직원이 준비해 온 카탈로그를 보며 루크를 기다렸다.
“……!”
“……!!”
그런데 안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왠지 익숙한 목소리인 듯한데…….
소리가 작아서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알트페리아는 작은 소란이겠거니 무시하고, 카탈로그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제도 제일이라더니.’
확실히 근사한 옷이 많았다.
이미 루크에게 잘 어울릴 법한 옷은 잔뜩 골랐지만 눈이 계속 갔다.
알트페리아는 직원을 불렀다.
“여기, 이 코트도 가져다줘.”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까 고른 옷 말고도 추가로 몇 벌 더 고르려는데.
촤르륵―
쳐져 있던 커튼이 젖혀지며 옷을 갈아입은 루크가 나타났다.
무도회에서 입는, 장식이 많은 화려한 정복 차림이었다. 이런 옷은 익숙하지 않은지 그가 소매를 매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어떻습니까?”
“…….”
옷까지 받쳐 주니 그의 미모가 한층 더 돋보여서 알트페리아는 잠깐 멍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루크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와 그의 가슴으로 향했다.
단추가 살려달라고 비명 지르고 있는데요?
조금만 툭 쳐도 단추가 튕겨 나갈 거 같은데요?
누구 기준으로 만든 옷인지 모르겠는데 빈틈이 없어서 아주 오예였다.
그는 알트페리아의 시선을 좇아 팽팽해진 제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많이 조이는데, 역시 별로입니까?”
“아뇨, 보기 좋아요.”
“…….”
본심의 일부를 저도 모르게 내뱉은 그녀는 침착하려 애쓰며 추가로 준비한 코트를 들어 올렸다.
괜히 이대로 루크를 계속 바라봤다간 속마음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이 코트도 괜찮을 거 같아서 준비했어요.”
그는 알트페리아가 고른 코트를 걸쳤다.
역시나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려서 정말 놀라웠다. 눈이 즐거워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크라바트가 흐트러졌네요.”
방금 코트를 입으며 움직인 탓에 묶어둔 크라바트가 살짝 풀린 것 같았다.
“아, 다시 묶고 오겠습니다.”
루크는 거울이 있는 안쪽으로 이동하려고 했지만, 알트페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아니에요. 제가 묶어드릴게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거절하는 이유는 접촉이 부담스러워서겠지.
“제 손길에 익숙해지셔야죠.”
“……부탁드립니다.”
살짝 발돋움한 그녀는 루크의 목깃을 고정한 크라바트의 핀을 빼낸 뒤 천천히 묶었다.
스르륵, 서로가 입을 꾹 다물자 천끼리 맞부딪히는 소리만이 유난하게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루크는 알트페리아의 세심한 손길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풍성한 은발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중 일부가 앞으로 내려와 커튼처럼 축 처져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그는 손을 올려,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겨줬다.
“접촉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하셨죠.”
마치 연인같이 세심한 손길을 느낀 알트페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잘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알트페리아의 시선이 다시 크라바트에 고정되었다.
루크가 집중하여 그녀를 지켜볼 때 다른 쪽 문이 열리며 익숙한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
한쪽 볼에 하얀 거즈를 붙인 앨런이었다.
루크를 발견한 앨런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루크는 그제야 자신이 앨런을 저 꼴로 만들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역시 목을 부러뜨렸어야 했는데.’
앨런을 향한 살의를 느끼던 루크는 알트페리아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어제 알려주신 것 말입니다. 제대로 연습했으니 한번 봐주십시오.”
루크의 크라바트를 반듯하게 묶은 알트페리아가 손을 떼어냈다.
“좋아요.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