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허락이 떨어졌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붙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떨구며 그녀를 바라봤다.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에 그녀가 담겼다. 그의 눈동자에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알트페리아는 깜짝 놀랐다.
‘와, 진짜 잘하잖아?’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하는 루크였다.
솔직히 너무 잘해서 괜스레 쑥스러워 볼이 살짝 붉어졌다.
“어떻습니까?”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답했다.
“더 가르칠 게 없는데요?”
일부러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이니까.
“최고의 스승을 두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그와 훈훈한 미소를 주고받을 때였다.
“리아, 너! 뭐 하는 짓이야?!”
거슬리는 목소리에 알트페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앨런이잖아?
‘하아, 쟤가 왜 여기 있지?’
알트페리아는 싸늘한 시선으로 앨런을 바라봤다.
“리아가 아니라 발트레 공녀라고 불러요. 이제 애칭을 부를 사이가 아니잖아요?”
“뭐라고? 난 네 남편이 될 사람이야!”
“아직도 확인하지 않은 거예요? 우리의 약혼은 제대로 성사된 적도 없고, 그마저도 취소되었답니다.”
씩씩거리던 앨런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할 말이 없어진 것 같았다.
‘흐응, 확인은 했나 보네.’
솔직히 말해 약혼장도 못 찾아서 쩔쩔맬 줄 알았다.
그런데 집 어딘가에 던져둔 이전 약혼장은 찾은 모양이었다.
‘발전은 했네.’
그래서 그가 더 역겹게 느껴졌다.
약혼이 취소된 것을 확인했다면 더욱이 애칭을 내뱉으며 불러 세울 일 없단 걸 알 텐데.
“앞으로 나를 부를 땐 입조심해요. 소백작.”
친한 척하지 말라고.
앨런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리아,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아, 진짜 몇 번이나 같은 소리를 하게 하는 거예요?”
“…….”
“내 말, 똑똑히 기억해요. 역겨우니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시길.”
앨런은 알트페리아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곧바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루크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피를 가득 담은 듯한 새빨간 눈동자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을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섬찟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괴물 같은 새끼.’
알트페리아에게는 따질 것이 많았다.
하지만 옆에 있는 루크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앨런은 결국.
“큭……. 됐고, 여기 당장 계산해!”
혀를 차며 직원을 불렀다.
멀리 떨어져 있던 직원의 두 눈은 흥미로운 걸 보는 것처럼 초롱초롱했다.
아마도 직원의 눈에는 흥미진진한 치정 싸움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 소백작님. 늘 하시던 대로 발트레 공작가로 청구서를 보내면 되지요?”
그 말에 알트페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앨런의 옷값을 왜 나한테 내라는 건데?’
아, 맞다.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렸다.
앨런이 말하길, 자신의 가문은 사업을 하고 있으니까 쓸 돈이 당장 없다고 했다.
사업도 전부 자신과의 미래를 위한 일이니까 이해해 주라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자기가 투자하고 있으니까 데이트 비용같이 자잘한 금액은 모두 알트페리아에게 내라고 했다.
때문에 그가 입는 옷은 전부 자신이 사기로 했었다.
물론 그의 말은 다 거짓이고, 실상은 도박에 돈을 탕진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옷값을 대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미친, 저걸 놔두고 있었다니!’
앨런에게 준 것이 워낙에 많아서 잊고 있었다.
“잠깐.”
알트페리아는 품속에서 신분패를 꺼내서 직원에게 보여줬다.
그녀의 신분패를 확인한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굽혔다.
“허억, 발트레 공녀셨습니까?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요즘 스타일을 바꿔서 몰라볼 법하지. 뭐, 항상 앨런의 뒤에 있기도 했고.
“그보다 이제 소백작의 청구서는 보내지 말아줘.”
“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앨런이 따지고 들었다.
“뭐야, 여기서 사는 옷은 전부 네가 결제해 준다며?”
와, 이렇게 뻔뻔한 놈이 다 있나.
“그건 앨런이 우리 가문의 사람이 될 뻔했을 때의 이야기죠.”
“이미 잔뜩 주문했어. 몇 벌은 저택으로 보내기까지 했다고!”
“제가 알 바 아닌데요.”
앨런은 뭐 마려운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냥 자기가 계산하면 되는데 왜 저래?’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알트페리아는 무언갈 깨닫고 픽 웃었다.
‘맞다, 그랬었지.’
도박장에서 큰 돈을 잃은 앨런은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들켰다.
화를 낸 로저필드 백작은 앨런의 용돈을 줄여버렸다.
슬슬 돈이 떨어질 때지.
알트페리아는 일부러 직원더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에 힘을 줬다.
“맞아, 앨런은 지난달 도박장에서 돈을 다 날려서 백작님께 계좌까지 압수당했죠?”
정곡이었기에 앨런이 움찔거렸다.
“옷을 살 돈은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 말에 직원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 진상 도둑놈……!’
보통 귀족은 현장에서 바로바로 돈을 지급하지 않고 청구서를 저택으로 보내게 한 뒤 한꺼번에 결제한다.
하지만 앨런의 상황을 알렸으니까, 그는 당장 돈을 내야만 가게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저택으로 보낸 것까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 상황을 로저필드 백작 저택에 알리지 않고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잔뜩 망신당하렴.
* * *
유유히 가게에서 빠져나온 알트페리아는 루크와 함께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오늘의 일정은 쇼핑이었다지만 그 외에 따로 스케줄을 짜진 않았다.
루크의 정복을 고른 다음에는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왠지 아쉬웠다.
마치 알트페리아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루크가 입을 열었다.
“공녀님의 드레스도 보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근처 살롱에 들러 알트페리아가 입을 푸른색 드레스도 새로 골랐고, 그에 맞춰 장신구도 샀다.
드레스를 가봉하고 밖에 나왔더니 허기가 졌다.
“배고프지 않아요?”
두 사람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사람이 몰려 있기에 아무렇게나 들어간 곳이었는데 다진 고기를 잔뜩 넣은 토마토소스 파스타가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그들은 소화도 시킬 겸, 가볍게 걷다가 경치가 좋아 보이는 카페를 발견해서 차를 시켰다.
그렇게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니 본래의 목적대로 서로에게 조금은 익숙해졌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아쉽지만 오늘의 데이트는 이만 끝이었다.
알트페리아와 루크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먼저 발트레 저택으로 향했다. 왠지 모를 충만한 기분에 미소를 짓던 알트페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개선식까지 얼마 안 남았네요. 그동안은 낮에 드린 책을 보세요.”
“완벽하게 외우겠습니다.”
“맞아, 공자님이 준비하실 게 더 있어요.”
“뭡니까?”
“청혼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미리 대사를 정해놓을까요?”
계약 결혼이지만, 루크에게 눈독을 들이는 황제 때문에 많은 사람 앞에서 프러포즈받아야 했다.
루크는 쑥스러움이 많았다.
막상 닥치면 머리가 새하얘질지도 모르니 청혼할 때 할 말은 미리 정해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루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돈 제가 준비하고 싶습니다.”
미리 생각해 둔 말이 있나 보다.
하긴, 루크는 배울 땐 부끄러움을 타도 막상 실전에서는 강했다.
‘오늘도 잘했지.’
어제 알려준 표정 연기를 완벽하게 하던 그를 떠올리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실전파니까 청혼도 잘 해낼 것이다.
“기대할게요.”
동시에 알트페리아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루크는 그런 그녀의 손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이번 손짓은 손등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춤추기 위해 에스코트를 권하는 것도 아니었다.
뜻을 파악하려는 루크를 향해 알트페리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악수하자는 뜻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는 알트페리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잘 부탁합니다.”
이제 개선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잘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 * *
루크는 먼저 알트페리아를 발트레 저택에 내려줬다.
그렇게 루크와 헤어진 알트페리아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세이룬이 그녀를 반겼다.
“공녀님, 지난번에 의뢰를 넣은 암살 무기……. 아니, 구두가 도착했어요.”
“오, 어디 봐.”
세이룬은 포장된 상자를 풀어 안에 든 구두를 꺼냈다. 그것을 받아 든 알트페리아는 한쪽 발에 신고, 구두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깡! 깡!
마치 검으로 바닥을 후드려 패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튼튼한데 아무것도 덧대지 않은 것처럼 가벼워서 좋았다.
“마음에 들어!”
암살자들의 무기를 만드는 곳이라더니 진짜 범상치 않았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세이룬이 말했다.
“그런데 호신용이라니, 뭐 위험한 일 하실 생각은 아니죠?”
“아, 별거 아냐. 여차하면 앨런을 조지려고.”
“와아, 그건 잘 생각하셨는데요……. 으음, 완전히 헤어지셨다면 제가 손볼까요?”
세이룬이 미소를 싹 지우며 덧붙였다.
“물론 흔적은 남지 않게 할게요.”
발트레는 제국에서 넷밖에 없는 공작 가문 중 하나로서 북부를 지배했다.
그런 가문이니, 가문의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 시녀들에게 특수한 훈련을 시켰다.
루크 같은 먼치킨 캐릭터랑 비교할 순 없지만, 앨런같이 평범한 놈은 세이룬이 쓱싹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