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아, 물론 그건 나중에 할 거야. 지금 당장 여기저기 부러져 있으면 일하는 데 지장이 생기잖아.”
알트페리아는 오늘 앨런과 만나고 깨달았다.
자신이 앨런, 정확하게 로저필드 가문에 해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도박 때문에 용돈 금지령이 내려졌긴 하지만 앨런의 재산이 될 로저필드 가문의 사업은 자신이 돈을 대줬기 때문에 성행하고 있었다.
특히 요즘 한창 잘나가는 요식업으로 이름을 날리는 중이었다.
‘다 돌려받겠어, 앨런.’
세이룬이 손봐서 여기저기 부러져 있으면 돈을 뱉어내기까지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팔다리 붙여놔야지.
“그러네요! 그럼 공녀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풀어놨다가 손볼게요!”
세이룬에게도 찍힌 걸 보면 앨런은 곱게 죽지 못할 것 같았다.
* * *
알트페리아가 떠난 옷가게.
직원은 앨런을 좀도둑 취급하며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당장 옷값을 지불하시지 않으면 경비를 부를 거예욧!”
“저택으로 청구서를 보내라니까? 나중에 갚는다고.”
“저희 매장은 신용을 쌓아야 청구 거래가 가능한 건 아시죠? 소백작님의 신용 점수는 전혀 없어욧.”
“…….”
“지금 당장 전부 내라는 것도 아니에요. 3분의 1만 지급하시면 나머지는 청구서를 보내드릴게욧.”
귀족들은 청구 거래를 애용했지만, 처음 이용하는 가게에는 일정 금액의 선금을 내고 신용을 쌓는 것이 규칙이었다.
“아니, 이때까지 잘만 해줬지 않아?”
“그야 발트레 공녀님의 신용도가 높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로저필드 소백작님의 신용 점수는 영이랍니다. 영!”
직원은 숫자 영을 강조해서 말했다.
앨런은 건방진 태도의 직원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귀족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게라 뒤를 봐주는 가문 또한 대단하므로.
하필 인기가 많은 가게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이 난리를 다 보고 말았다.
구경하던 손님들이 앨런을 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머, 저분 로저필드 소백작이 아니신가요.”
“요새 도박에 빠지셨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옷 한 벌 살 돈도 없으신가 봐요.”
소곤거렸지만, 앨런은 다 듣고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빈털터리 취급을 받으며 무시당했다는 치욕에 그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된 앨런은 저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알트페리아에게 화가 났다.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울면서 비는 것만으론 넘어갈 수 없었다.
‘리아, 너 나한테 이렇게까지 했단 말이지?’
어차피 알트페리아는 자연스레 자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현재 그랑힐데 공작은 몸이 좋지 않아 오늘내일하고 있으므로 공작가의 실세는 힐다였다.
종종 아버지를 따라 고모를 만나러 그랑힐데 저택에 방문한 적이 있던 앨런은 루크를 몇 번 만났었다.
사람의 꼴도 갖추지 못하고 짐승처럼 사육되던 루크의 몰골은 처참했었다.
뼈밖에 남지 않았던 놈이 그렇게까지 자란 건 의외지만, 그래봤자 본질은 어디 가지 않는다.
‘하, 제까짓 게 감히 알트페리아와 결혼하겠다고 말해?’
불쌍해서 어쩌냐, 결혼 자금으로 쓰겠다던 포상금은 전부 고모님이 가질 예정인데.
루크가 살아서 귀환한다는 소식을 들은 고모님이 다 손을 써놨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참자.’
개선식이 끝나고 나면 루크의 포상금은 모두 고모님의 손에 들어간다.
그때가 되면 알트페리아도 루크가 가난뱅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돌아와 울면서 무릎을 꿇을 것이다.
‘나한테 이런 치욕을 줬으니 두고 봐.’
눈물 몇 방울 떨어뜨린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장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비참하게 만든 다음에야 받아줄 것이다.
* * *
옷을 갈아입고 편히 쉴 준비를 하던 알트페리아는 귀가 간지러워 귓불을 슥슥 긁었다.
‘누가 내 이야기 하나?’
거슬리게 근질근질한 걸 보니 아마 앨런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닌가 싶다.
그녀의 곁에서 침구를 정리하던 세이룬이 물었다.
“공녀님, 어디 불편하세요?”
“귀가 간지러운 걸 보니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싶어.”
“으, 분명히 소백작일 거예요. 다음에 손볼 때 공녀님의 귀를 간지럽힌 죄까지 더할게요.”
세이룬은 손바닥에 주먹을 팍팍 두드리며 의욕을 불태웠다.
* * *
개선식 날이 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영웅의 귀환을 환영하는 자리는 성대하게 꾸며져 있었다.
펑! 펑! 펑!
높은 철탑 위로 마법사들이 쏘아 보낸 폭죽이 터졌다.
개선식 준비를 끝낸 원정대가 말을 타고 제도를 돌기 시작했다고 알리는 거였다.
루크는 그들의 가장 앞에 서서 환영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고 있을 것이다.
알트페리아는 세이룬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시종관이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신분패를 확인하겠습니다.”
“여기.”
“발트레 공녀님이시군요. 마련된 자리는 이쪽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입구에 있던 시종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알트페리아를 안내했다.
자리는 계급에 맞춰 나뉘어 있었다.
단상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황족이 앉아 있고, 좌우로 각 지방의 영주와 고위 귀족들이 자리 잡았다.
북부의 영주인 발트레 공작 가문의 자리는 그랑힐데와 나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랑힐데 가문에서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공작을 대신해, 장남과 함께 공작 부인인 힐다가 참석했다.
힐다는 루크와는 확연하게 다른 외양으로, 화려한 금발에 짙은 녹색 눈동자를 지닌 사람이었다.
한 가족으로 묶여 있는 루크보다는 오히려…….
‘앨런과 닮았어.’
앨런의 아버지, 로저필드 백작과 힐다는 남매였다. 그래서인지 힐다는 특히 앨런과 닮았다.
하지만 외형만 비슷하다뿐이지, 힐다는 앨런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한 기품이 넘쳐났고, 장성한 아들을 둔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그녀는 덤덤히 앞을 응시하고 있었고, 주변에 앉은 다른 영주들이 자기네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전쟁의 최대 공은 그랑힐데 공자가 세웠다고 들었소.”
“차남에다 사생아라지? 다른 건 몰라도 사생아라는 점은 거슬리는군.”
“이렇게 성대한 자리를 준비하신 걸 보면, 폐하께서도 그 사생아를 인정하실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와, 마지막 말은 좀 쎈데?
황제가 인정했으니까 루크를 사생아가 아닌 그랑힐데의 차남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알트페리아는 곁눈질로 힐다를 흘끔거렸다.
그녀는 속눈썹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루크의 업적을 칭송하는 자리니까 불쾌함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감정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영웅의 칭호와 포상금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하시는지, 작위도 내리신다죠.”
‘그러고 보니 힐다는 루크의 돈을 떼먹을 생각에 신이 났겠지.’
루크는 미래에 사기를 당할 예정이었다.
원작에서 루크가 겪는 시련 중 하나가, 힐다에게 사기를 당해 포상금을 모두 빼앗기는 사건이니까.
‘누가 그렇게 둘 줄 알아?’
그 포상금은 루크의 지참금이 되어 우리 가문으로 모조리 들어올 예정이거든.
물론 떼먹을 생각은 아니고, 몇 배로 불려서 원금은 고스란히 돌려줄 생각이다.
알트페리아는 자리에 앉으며, 힐다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힐다가 연장자이기도 하고, 지금 당장 그녀와 척질 이유는 없어서였다.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귀족들의 눈이 있었다.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야지 자신의 평판이 좋아진다.
“공작 부인. 알트페리아 폰 발트레라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힐다와는 앨런 때문에 참석한 파티에서 종종 마주쳤었다.
하지만 따로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기에 먼발치에서 시선만 교류한 것이 다였다.
알트페리아의 인사에 힐다가 반응하여 시선을 맞추며, 형식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발트레 공녀군요. 반가워요.”
힐다는 손에 쥔 부채를 들어 올리며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혼자 왔나요?”
“네, 오늘은 따로 파트너가 없어요.”
“저런, 식이 끝나고 무도회가 있으니 파트너를 찾아야겠군요. 마침 앨런은 맞은편에 있답니다.”
그녀는 필요 없는 정보를 굳이 알려줬다.
“아……. 앨런이요.”
힐다는 부채를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곧 있으면 나는 공녀의 고모님이 되겠군. 그러니 미리 말을 놓도록 하지. 나는 두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하나가 되어, 부부 동반으로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네.”
거기다 한 술 더 떠 필요 없는 소리까지 했다.
으음,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겠는데.
힐다는 남편의 바람으로 루크라는 사생아를 얻었다.
그 꼴을 봐놓고 바람둥이로 소문난 앨런이랑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라고?
“앨런과의 약혼은 취소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