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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예쁘고 재력이 넘침-17화 (17/91)

제17화

당연하게도 앨런은 약혼이 취소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란 듯한 힐다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알트페리아의 의중을 확인하듯 살폈다.

“올해는 강추위가 예상되는지라 미리 대비해야 하지 않나? 특히 공녀는 로저필드 가문의 지원이 필요할 텐데.”

힐다는 대놓고, 북부의 가난한 너희 영지는 겨울을 나기가 힘드니 로저필드의 재산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로저필드 가문이 대성한 건 다 발트레에서 사업 자금을 대줬기 때문인데도.

발트레의 속사정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앨런이 힐다에게 온갖 얘기를 다 한 모양이었다.

음, 당연히 영지를 살피기 위해서 돈은 필요하긴 한데 앨런은 사양이다.

알트페리아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북부는 춥다는 편견이 있는데요, 발트레는 생각보다 따뜻하답니다.”

우리 영지에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랫도리 가벼운 놈이랑 평생을 사는 건 끔찍해요. 모든 영애가 그리 생각할 거예요.”

님 조카 쓰레기라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거예요!

알트페리아의 숨은 말뜻을 알고 있는 힐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현재 알트페리아의 상황은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함께 사는 자신과 같았다.

여기서 뭐라고 더 말을 했다간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되는 거였다.

그렇다고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나쁜 앨런을 감싸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힐다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힐다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대화를 중단하곤 앞을 조용히 응시했다.

알트페리아도 대화를 끝마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힐다와의 관계에 아주 큰 균열이 갔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루크는 조금 뒤 자신에게 청혼을 한다.

그녀와의 관계는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뭐, 조금 뒤에 나빠지거나 지금 나빠지거나.

알트페리아는 자세를 고쳐 앉다가 맞은편의 고위 귀족석에 앉아 있는 앨런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놈은 뭘 잘났다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과 힐다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제멋대로 상상을 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큰 나팔 소리와 함께 황실의 문장을 수놓은 거대한 깃발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호명관이 크게 외쳤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루크 폰 그랑힐데 공자께서 입장하십니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두꺼운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황실 악단이 개선 행진곡을 연주했다.

동시에 검은 투구를 쓴 남자가 입장했다.

투구로 얼굴을 가렸지만 휘날리는 망토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으로,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웅장한 행진곡에 목소리를 묻으며, 귀족들이 소곤거렸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죠.”

“적군이라지만, 사람을 베어 넘길 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답니다. 감정이 없는 그 모습이 마치 악마 같았다더군요.”

“제국군 사이에서도 피를 탐하는 미친개라 불리고 있대요.”

“어머, 무서워라.”

괴물 같은 실력으로 적은 물론 아군까지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어찌 되었든 루크 폰 그랑힐데는 제국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그런 영웅을 노골적으로 깔보며 무시하는 이유는 루크가 그랑힐데 공작가의 정당한 후계가 아닌, 사생아이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황제의 호위기사가 외쳤다.

“제국의 태양께 예를 갖추십시오!”

루크가 투구를 벗으며 황제 앞에 부복했다.

“세상에……!”

“흉측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놀란 귀족들이 예의도 잊고, 큰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흉흉한 소문이 가득 붙은 영웅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남자였다.

가볍게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드러난 짙은 눈썹과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

절묘하게 깎인 턱선과 입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루크의 얼굴에 그를 깔보던 귀족 몇몇이 태도를 바꾸며 소곤거렸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영웅의 칭호와 함께 작위 또한 내릴 예정이시라더군요.”

“포상금도 상당히 나온다죠?”

저열하기까지 한 악명을 상쇄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확인한 귀족들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제국이 패배하기 직전까지 갔던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엎을 정도의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 그리고 견줄 자가 없는 빼어난 검술 실력까지.

비록 사생아이긴 하나 공작 가문의 차남이고 황제로부터 따로 작위를 받을 예정이다.

혈통만 빼고 본다면 더할 나위 없는 근사한 사윗감인 것이다.

알트페리아는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저런, 이미 찜해 둔 사람이 있답니다.’

그렇게 탐이 날 것 같았으면 미리 찾아서 손을 썼어야지요.

잠시 후 다소 지루한 황제의 치하 연설이 시작되었다.

혐오, 질투, 동경, 선망.

루크는 온갖 감정이 담긴 시선들에도 흐트러짐 없이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는 루크에게 작위와 함께 포상금을 내렸다.

“짐은 그대에게 백작위와 함께 포상금을 내리겠노라!”

긴 치하 연설을 끝낸 황제가 작위와 포상금을 내리며, 루크에게 물었다.

“새로이 탄생한 영웅에게 묻겠다. 그대는 짐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원래라면 루크의 대답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이고, 신이 난 황제는 루크의 힘을 황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이 차 나는 황녀를 배필로 정하겠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알트페리아가 알고 있던 미래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루크가 투구를 벗어 만천하에 얼굴을 공개하면서부터 원작과 달라졌다.

루크의 입이 달싹였다.

“그렇다면 이 자리를 빌려 청혼의 기회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호오, 마음에 둔 여인이 있던 것인가.”

“예.”

“누군지 궁금하구나. 좋다, 허락하지.”

황제와 영웅의 대화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머리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그랑힐데 공자와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지만, 혹시 그가 자신을 연모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황제의 허락을 받은 루크는 미리 정해진 길을 걷는 것처럼 막힘없이 걸음을 옮겨 알트페리아의 앞에 섰다.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중얼거린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한눈에 보고 반했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루크는 청혼 대사를 자기가 선택하겠다고 했다.

진부하고 단순한 말이지만, 알트페리아는 이 순간 왜 다들 가슴이 떨린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계약 결혼인데도 불구하고, 반했다는 말에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반면 모인 귀족들은 경악했다.

“뭐? 발트레 공녀에게 청혼을?”

“공녀는 약혼자가 있잖아…….”

알트페리아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똥차는 이미 정리했답니다.’

맞은편에 있던 앨런은 루크를 죽일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황제까지 허락한 일을 자기가 째려보면 어쩔 건데.

기다렸다는 듯 루크의 손을 붙잡은 알트페리아가 답했다.

“기꺼이.”

황제를 속이기 위해 다정한 연인인 척 연기하는 건 이제 시작이었다.

알트페리아가 승낙하자, 앨런은 눈이 뒤집힌 것처럼 뛰쳐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황제가 허락한 자리에 끼어들어 반대한다 외쳤다간 대역죄를 뒤집어쓸 수 있다.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는 로저필드 백작이 앨런의 입을 틀어막으며 필사적으로 뜯어말렸고, 그 바람에 자연스레 다른 귀족의 시선도 쏠렸다.

“우읍!”

입이 틀어막힌 앨런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나가자.”

보다 못한 로저필드 백작이 꿈틀거리는 앨런을 바깥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 다소 소란스러운 개선식이 막을 내렸다.

* * *

개선식이 끝나고, 무도회가 곧바로 준비되었다.

루크는 알트페리아의 가르침대로 완벽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중앙 홀로 향했다.

알트페리아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치맛자락을 장식한 흰 보석이 반짝였다.

그런 그녀를 이끄는 루크는 그녀와 미리 맞춘 듯한, 검은색을 기본으로 푸른 장식이 들어간 정복을 입었다.

‘미리 맞춘 것도 맞지만.’

루크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무도회 홀의 정중앙에 도착했다.

그리고 알트페리아의 손을 놓으며, 춤을 추기 전 가볍게 인사를 올렸다.

“준비한 청혼은 어땠습니까?”

알트페리아는 한 손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답했다.

“음, 10점 만점에 8점 정도예요.”

“남은 점수는 춤으로 만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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