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알트페리아의 손끝을 살짝 붙잡으며 저에게 이끈 루크는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춤을 출 준비를 끝마쳤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가 속삭였다.
“황제가 저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황제로서는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막내 황녀와 루크를 이어주고자 했을 텐데 무산되었으니 입이 쓰긴 할 테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아직 루크가 드래곤을 쓰러뜨리기 전이라 황제의 집착도 덜하단 점이다.
괜히 황제가 딴맘 품기 전에 자신들은 떨어뜨리면 못 산다는 걸 열심히 어필하고, 속전속결로 결혼까지 후다닥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제 시작이에요. 정신 바짝 차리세요.”
“예.”
알트페리아는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몸을 기댔다.
긴장한 그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왈츠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식을 알리는 첫 번째 춤엔 많은 이목이 끌린다. 그래서 다들 부담스러움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루크와 자신의 관계를 제대로 내보이기로 마음먹은 알트페리아는 첫 춤을 추러 나왔다.
알트페리아와 루크는 서로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스텝은 기억하시죠?”
“만점 받을 자신이 있을 정도입니다.”
감점이 아쉬운 모양인지 그가 의욕을 불태웠다.
“제 평가는 짜답니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선 다른 이의 의견도 들어야겠군요.”
“그렇다면 우리를 지켜보는 귀족이 감탄하면 만점으로 쳐요.”
귀족들은 눈이 높아서 쉽게 감탄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을 놀라게 할 정도라면 충분히 만점을 받을 만했다.
“알겠습니다.”
루크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집중하려는 모양이었다.
인사 후에는 서로 밀착하여 천천히 움직이는 동작이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는 알트페리아의 손을 꼭 붙잡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알트페리아는 그런 그를 올려다봤다.
루크의 붉은 눈동자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말, 실전에 강한 것 같다니까.’
연기라는 건 알지만, 루크의 그윽한 시선을 마주하니 묘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괜히 설레네.’
아까 루크에게 공개적으로 청혼받을 때 들었던 기분과 비슷했다.
자신이 이런 기분이 들 정도니까 지켜보는 귀족들도 루크가 사랑에 푹 빠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등을 끌어안더니, 자신에게 단단하게 밀착시켰다.
‘오, 시키지 않아도 잘하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상대를 간절하게 원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있는 그가 속삭였다.
“황제가 저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알트페리아의 방향에서 황제는 보이지 않아 대신 설명하는 거였다.
“지금 공자님의 표정만 보면 의심 같은 건 전혀 생기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능숙한 걸 보니 돌아가서 표정 연습을 많이 하셨나 봐요?”
“……딱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뭐야, 역시 타고난 재능인 건가?
시선이 마주친 그가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공녀님이라서 지을 수 있는 표정입니다.”
응?
그 말은 마치 자신이 진짜로 사랑스러워서 짓는 표정이라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알트페리아는 그에게 의도를 물으려 했으나, 서로 멀어지는 동작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루크와 거리가 생긴 때문에 대화도 자연스레 끊겼다.
다음부터는 제법 어려운 동작이 계속되기에 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루크 또한 알트페리아를 조심스레 이끌며 자신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루크와 알트페리아는, 시간이 없어 춤 연습을 충분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짧은 수업으로도 왈츠를 터득한 그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알트페리아를 에스코트했다.
멀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가까워졌고, 알트페리아의 푸른 치맛자락과 루크의 코트 옷자락이 서로 뒤엉켰다.
“와아, 두 분 정말 잘 어울리네요.”
“이렇게 완벽한 춤을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아요. 실력이 참 대단하시군요!”
집중해서 어울리다 보니까 너무 완벽한 춤을 췄나 보다.
주변에서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승리를 쟁취한 루크가 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비록 승리는 빼앗겼지만, 알트페리아는 기분이 좋았다.
루크를 가르친 건 자신이었다.
남들이 그를 칭찬하자 마치 아무도 모르던 원석을 먼저 발굴하여 내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제자를 키우는 사람이 있구나.’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와의 춤은 여기저기서 터지는 감탄과 탄식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춤곡의 연주가 끝나고, 알트페리아는 루크와 함께 홀에서 내려왔다.
루크는 알트페리아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며 옅은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귀족들이 그들을 흘끗거리며 조용히 의견을 나눴다.
“발트레 공녀가 저런 미인이었나요? 늘 소백작 뒤에 음침하게 서 있어서 몰랐어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소문과 다른 외양을 지닌 루크도 놀랍지만, 앞머리를 길게 길러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알트페리아가 달라진 것도 이야깃거리였다.
“아까 공녀가 말하길 소백작과 약혼을 취소했다고 그랬죠. 그대로 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일까요?”
“저는 솔직히 공녀와 소백작의 결혼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공녀께 너무 불리한 조건이지 않나 싶었어요.”
“저도요. 제 딸이었으면 뜯어말렸을 걸요.”
그들은 특히 행실이 좋지 않다고 소문난 앨런이 상대라 알트페리아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구마를 몇 개 먹은 듯 답답함을 느꼈었다.
약속에 늦는 앨런을 기다리느라 홀로 처량하게 앉아 있는 알트페리아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까 자연스레 신경이 쓰였다.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결혼은 집안과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끼어들 명분도 없고, 괜히 간섭했다가 로저필드 백작과 그랑힐데 공작 부인의 눈 밖에 날 수도 있으니 퍽퍽한 고구마만 계속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약혼을 취소했다니 다행이네요.”
“두고 봐야지요. 새로 탄생한 영웅이 좋은 사람일지는.”
소문이 워낙 흉흉하지 않나.
얼굴은 저렇게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붙은 걸 보면, 뒤가 구릴지도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그들은 알트페리아와 루크를 연신 흘끗거렸다.
그사이 루크는 음료를 가져와 알트페리아에게 건네며 다정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괴물 같진 않았다.
이쯤 되니 오히려 소문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 *
알트페리아는 루크가 가져다준 음료를 마시며 무도회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모여 있는 귀족들이 이따금 저를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하듯 고갯짓했다.
그녀는 공작 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귀족들의 호감을 얻는 건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무게를 얻는다는 뜻이니 좋았다.
알트페리아는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미소로 화답했다.
그 때였다.
다른 영주들과 대화를 끝마친 황제가 다가오기에 알트페리아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정중한 태도로 맞이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르블레아에 영광을.”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춤은 잘 보았다. 무도회의 시작을 잘 이끌어준 덕분에 분위기가 좋아졌어.”
주목도가 높은 첫 춤은 다들 꺼렸다.
반대로 많은 사람의 눈길을 최대한 끌어야 하는 알트페리아는 루크와 함께 처음으로 춤을 추었고, 성공적으로 마쳤다.
“자네 덕분에 개선식 분위기도 아주 좋았지.”
“과찬이십니다, 폐하.”
“검술도 출중하고 예법도 완벽하다니. 과연 그대는 짐이 탐낼 만한 인재구나.”
황제의 시선이 루크에게로 향했다. 친히 행차한 목적은 루크란 거다.
‘어휴, 조금 전 스텝 한 번 잘못 밟았으면 꼬투리 잡았어. 분명!’
루크가 알트페리아에게 청혼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황제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흑마법사의 나라에 패배했다면 각 지방이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 전쟁을 종결지은 루크의 힘이 탐이 나는 건 당연하긴 하다.
그런데…….
‘여기서 드래곤을 쓰러뜨리면 더 집착한다고?’
황제의 집념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약혼은 넘기고, 최대한 빨리 결혼해야겠어.’
최소 드래곤의 봉인이 풀리기 전까지는.
“아무리 탐이 난다고 하나 이렇게 잘 어울리니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군.”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알트페리아는 속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이 대화는 단순히 루크를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황제의 속뜻은 이거다.
‘나는 너를 거둘 생각이다. 그런데 너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구나.’
황제가 어떤 방법으로 루크를 붙잡으려는지는 모른다.
원작에서처럼 막내 황녀와의 약혼을 계속 추진할 수도 있고, 또 아니면 그냥 호위기사로 삼을지도 모른다.
‘잘 대답해야 할 텐데.’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가는 황제가 괜한 트집을 잡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