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대신 답해 주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황제가 루크와의 대화만을 원하는 듯해서 끼어들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귀족 화법에 대해서도 가르칠 걸 그랬나.’
후회해 봤자 이미 황제 앞이었다.
루크가 입을 열었다.
“저는 제국의 검입니다. 제국이 위험에 빠진다면 언제든 검을 들 겁니다.”
“호오 그대가 말하는 제국이란?”
“폐하께서 다스리는 르블레아입니다.”
제국은 황제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황제의 검이나 다름없으며 위험해질 때 돕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괜찮은 대답이었다.
“앞으로도 그대의 활약을 기대한다.”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폐하.”
“다들 남은 연회를 즐기도록.”
공손한 태도의 루크를 뜨겁게 바라보던 황제는 보좌관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후우, 잘못되는 줄 알고 걱정했네, 진짜.
“잘 넘기셨어요. 다행히 귀족들의 예절은 잘 숙지하고 계셨네요.”
“벼락치기의 효과입니다.”
알트페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벼락치기요?”
“어젯밤 공녀님께서 주신 책을 열심히 외웠습니다.”
<속성으로 배우는 사교계 예절 ― 이것만 있으면 망신은 당하지 않아요!>를 말하는 거구나.
루크는 주변을 한 번 슥 둘러보더니 허리를 굽혀 알트페리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황제 앞에서는 제국을 위해서란 말만 되풀이하라더군요.”
그의 말에 알트페리아는 쿡 웃었다.
그래, 그 말만 하면 적어도 절반은 가긴 한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준비한 책인데 진짜 효과가 좋았다.
“잘하셨어요.”
“잘한 겁니까.”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왠지 귀엽게 보였다.
흐뭇하게 웃는데 왠지 모를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자 루크와 자신을 노리는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조금 전, 루크가 황제와 멀쩡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난폭하단 소문과 달리 예의 바른 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는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원작과 달리 투구를 벗어버린 그는 누구보다도 빛났다.
말 한 번 섞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만 벼락치기로 만들어진 예법이라 긴 대화를 하면 들통날지도 몰랐다.
‘도망쳐야지.’
목표였던 황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홀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거였다.
“저희는 이만 테라스로 이동해요.”
“…….”
“지금 사라지면, 딱 오해하기들 좋을 거예요.”
“오해?”
“우리 사이가 돈독하다는 오해요.”
그 말에 루크가 뻣뻣해졌다.
알트페리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긴밀한 사이에서는 춤 같은 건 대충 해치우고 둘만의 장소로 이동한다고 했지.
“남들의 눈을 피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거죠. 예를 들어 키스나…….”
그녀가 준 책에서도 나왔다.
무도회장의 테라스는 사랑을 은밀하게 속삭이기에 최고라고.
루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 황제의 태도를 보았지 않나.
알트페리아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가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자신을 탐냈다.
황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진짜 그녀에게 푹 빠진 연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역시 키스는 조금…….
괜한 상상을 한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흑화한 염룡’이 루크가 이상하다고 지적합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어제 루크가 읽은 책에서는 눈 맞은 커플들이 테라스에서 뜨거운 열기를 해소하곤 했다고 합니다.]
[‘흑화한 염룡’이 어떻게 열기를 해소하는지 묻습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뽀뽀라고 답합니다.]
[‘흑화한 염룡’이 루크의 첫 키스를 응원합니다.]
[‘사자의 서기관’이 레몬맛은 아니라고, 명심해 두라고 합니다.]
루크는 성가신 성좌들의 메시지들을 없애고자 손을 휘휘 저었다.
“각오했습니다. 갑시다.”
알트페리아는 그런 그의 태도를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뭘 각오했다는 거지?’
그는 마치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을 한 채 테라스로 향했다.
앞장선 루크가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루크가 문을 걸어 잠갔고, 바깥의 음악 소리가 완벽히 차단되어 조용해졌다.
등이 없는 테라스는 어두웠지만, 달빛 덕분에 상대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오히려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한 무도회장보다 과하지 않은 빛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트페리아는 루크를 빤히 바라봤다.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
“이제부터 저희가 테라스에서…….”
“테라스에서?”
“…….”
“사이좋은 연인의 연기를 계속해야 하니까요.”
“…….”
“테라스에서 열기를 해소하면 된다더군요. 책에서 읽었습니다. 가령 키스라든지.”
알트페리아는 그제야 루크가 왜 저렇게 뻣뻣하게 굳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함께 춤을 추다 보면 서로 눈이 맞는다.
상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해소할 수 없는 커플은 테라스에서 가벼운 스킨십으로 열기를 식히곤 한다.
요컨대 테라스는 주로 남들 눈을 피해 뽀뽀하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대다수가 그렇게 사용하지만, 알트페리아는 남들 눈을 피해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잔뜩 긴장하는 걸 보면, 은근히 기대한 것 같아 장난기가 돌았다.
알트페리아는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미리 연습할까요? 결혼식 때는 해야 하니까요.”
흐릿한 달빛으로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루크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여성과의 신체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그로서는 입맞춤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루크의 입술이 달싹였다.
‘귀엽네.’
알트페리아가 그를 좀 더 놀리려던 때였다.
쾅, 쾅, 쾅!
누군가 테라스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 테라스에 있죠? 저와 이야기 좀 해요. 대장!”
“…….”
“아니, 진짜 좀 나와봐요!”
새빨갛게 익어 있던 루크가 점점 식어가는 게 보였다.
아니, 열기가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추울 정도로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루크가 왠지 저 사람을 죽일 것 같았다.
‘대장이라.’
루크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원작에서 몇 명 나왔는데, 그들은 모두 전장을 함께한 동료였다.
함께한 전우를 죽이게 둘 순 없기에 알트페리아는 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는 이만 헤어지죠.”
“…….”
“돌아가기 전에 공자께선 할 일이 하나 있으세요. 저희가 처음 계약할 때 공자께서 사기를 당하신다고 했던 말 기억하세요?”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사기는 당장 내일 아침에 당하실 거예요. 공자의 포상금이 전부 그랑힐데 공작 부인의 손에 넘어간답니다.”
“공작 부인에게 말입니까?”
“네, 공자님의 계좌 주인이 공작 부인이거든요.”
그 말에 루크는 제가 무엇을 놓쳤는지 알게 되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신분패와 함께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 취급받지 못하며 길러졌던 루크는 자신을 증명할 기본적인 서류조차 없었다.
가문의 오점이라며 아예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던 자신을 장남 대신 전쟁터에 내보낸다며, 급하게 신분패와 계좌를 만든 사람이 그랑힐데 공작 부인이었다.
때문에 계좌의 소유자는 공작 부인이었다.
자식은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에게 용돈을 받기 때문에 절차상 잘못된 건 아니었다.
다만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는 계좌 명의를 이전해 줬어야 하는데 그대로 뒀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성좌들이 반응했다.
[‘명계의 지배자’가 당장 내일인 것을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는지 의아해 합니다.]
루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공녀께선 미래는 자신의 패라고 하셨습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하루 전은 너무 심하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걸 알려주면 알트페리아는 저에게 대항할 무기가 없다.
그러니까 최후의 최후까지 미룬 거라며, 그는 마치 그녀를 옹호하는 듯한 투로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알트페리아가 씩 웃었다.
“일부러 오늘까지 비밀로 한 거예요.”
“…….”
“그래야만 공작 부인이 큰 손해를 입거든요.”
물론 루크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저를 믿으세요, 공자님.”
루크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믿습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그 말을 믿냐며 이마를 짚습니다.]
* * *
힐다는 황제가 퇴장한 직후, 홀을 빠져나와 저택으로 향했다.
그녀의 표정은 고요했지만 속은 용암이 분출되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많은 귀족 앞이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힐다는 개선식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루크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자신이 낳은 장남은 몸이 좋지 않았다.
정당한 후계자인 장남을 대신하여 루크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가신도 꽤 있었다.
그 점이 못마땅해 죽으라고 전장에 떠밀었더니 죽긴커녕 공만 세우고 돌아왔다.
심지어 함께 전쟁터로 향했던 기사들은 루크를 따르겠다며 그랑힐데의 기사단에서 우르르 탈단까지 해버렸다.
루크와 함께 보낸 기사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규 기사들이기에 꽤 큰 손해였다.
‘아니야. 메울 수 있어.’
루크가 전쟁터에서 굴러준 덕분에 큰돈이 들어오게 되었으니까.
제 수중에 떨어질 거대한 포상금을 생각하면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밀테아 후작에게도 착수금을 보내야겠군.’
마음에 드는 사업이라 계약은 했는데 착수금이 너무 커 쉽게 준비하지 못해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루크의 포상금 덕분에 그 돈을 내고도 한참이나 남을 터였다.
‘네 돈은 내가 알뜰하게 사용해 주마.’
포상금을 빼먹을 기대감에 부푼 힐다는 그랑힐데 저택에 도착했다.
힐다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시녀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부인. 밀테아 후작께서 하루라도 빨리 착수금을 보내시라고 독촉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