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루크는 시끄러운 명계의 지배자 때문에 알트페리아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공작 부인이 손해를 입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공작 부인은 개선식 무도회가 끝나는 날 거대한 사업을 하나 진행하거든요. 그에 대한 착수금도 함께 보내요.”
“…….”
“공작 부인의 유용 자금으론 받아들일 수 없는 사업인데 공자님의 포상금을 이용할 생각에 진행해요. 물론 그 사업은 망할 예정이랍니다!”
그 말은 즉, 공작 부인이 마지막까지 돈을 쥐어짜 내게 만들기 위해서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흑화한 염룡’이 사탄도 울고 갈 것 같다고 합니다.]
[‘사자의 서기관’이 루크의 돈을 지킨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결국 명계의 지배자도 이해했는지 헛소리를 멈췄다.
알트페리아가 한 말을 떠올린 루크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 * *
개선식 다음날.
제국은 개선식 축제로 들썩였다.
도시는 화려하게 꾸며졌고 음식을 파는 노점들이 잔뜩 나왔다.
또 곳곳에서는 연극이 개최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힐다는 밖으로 나오는 대신 저택에 머물렀다.
내키지 않는 개선식엔 참여했으니까 그 이후의 축제에는 굳이 나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작 부인! 큰일 났습니다!”
조용한 저택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목소리의 주인은 가문을 관리하는 총괄 집사였다.
“무슨 일로 이리 소란이지?”
집사의 얼굴은 피가 다 빠진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게……. 하루아침에 가문 예산의 절반이 증발해 버렸습니다!”
밀테아 후작이 재촉하길래 착수금으로 수표를 보냈었다. 수표를 가지고 은행에 찾아갔을 테니, 그랑힐데 가문의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갔을 것이고.
큰돈이 빠져나갔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지난번에 말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예? 부담이 커서 신중하게 결정하시겠다며 미루지 않으셨습니까.”
무려 가문의 1년치 예산의 절반이었다.
그런 큰돈을 당장 마련하려면 가진 재산도 어느 정도 처분해야 하고, 대출까지 받아야 했다.
게다가 사업이라는 게 꼭 성공만 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수익이 큰 만큼 실패했을 시 오는 부담도 크기에 힐다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고 결정을 미뤘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집사. 그 천것이 돌아오지 않았나.”
“예, 그렇지요.”
천것은 그랑힐데 저택에서 루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다들 그를 공자 대신 천것이라고 불렀다.
“폐하께서 그놈에게 포상금을 내렸다. 하나 천것의 계좌는 내 것으로 되어 있지.”
힐다는 루크의 계좌를 독립시키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루크의 계좌의 권한은 여전히 자신의 것이고, 입금되었을 포상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준비된 차를 우아하게 마시며 힐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어제 아침, 계좌의 상태도 확인했다. 여전히 내 소유로 되어 있더군.”
이로써 모든 게 해결되었다.
집사가 안심이 된다며, ‘역시 공작 부인이십니다!’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할 때였다.
하지만 집사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창백했다.
“왜 그러지, 집사.”
“그게……. 갑자기 큰 예산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은행에 가서 확인했었습니다.”
집사에게는 가문의 자금을 관리하는 권한이 있었다.
출금은 힐다의 신분패가 필요하지만, 금고의 잔액이나 상태 등은 집사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천것의 계좌가 독립되어 있었습니다.”
“뭐?”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히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었다.
힐다는 제대로 확인을 하기 위해서 직접 은행을 찾아갔지만, 집사의 말대로였다.
평온했던 힐다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챈 집사가 안절부절못했다.
“공작 부인, 이 예산으로는 영지를 꾸려나가지 못합니다.”
밀테아 후작은 이미 수표를 사용해 돈을 뽑아갔다. 계약서가 오갔기에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집사는 망했다는 것을 느꼈다.
집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고, 공작 부인! 어떻게 할까요?”
힐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쩌긴.
계좌가 반 토막이 되었으니까 기껏 모아둔 귀중품들을 팔아서라도 채워야지.
한동안 사치를 참아야 하는 것보다 더욱 화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내가 천것에게 당했어?’
제 품으로 들어왔어야 할 포상금을 천것에게 빼앗긴 것이 더욱 억울한 힐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 *
개선식 무도회가 끝났다.
알트페리아는 계획을 점검했다.
일단, 루크에게 닥칠 일 중 하나인 포상금 날치기는 막았다.
다음은 개선식 이후에 봉인이 풀릴 드래곤에 대비해야 한다.
‘개선식 축제가 끝나고, 몇 달 뒤였지.’
시간은 넉넉하지만, 루크는 드래곤을 퇴치하다가 크게 다친다.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미리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토벌 도중 그가 다치는 이유는 검이 부러져서였다.
웬만한 검은 그의 오라를 버티지 못한다.
루크의 오라에도 끄떡없는 검을 미리미리 구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으음, 그런데 어떻게 찾지.’
원작 속 루크가 검을 손에 넣었을 때도.
“우연히 얻었습니다.”
저 설명 한 줄로 끝이었다. 아니, 하나 더 있는데.
“초대 소드마스터와 관련된 장소의 땅을 파니까 나왔습니다.”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는 정보였다.
초대 소드마스터가 워낙에 신출귀몰해서 그와 관련된 장소를 찾고, 땅을 파는 건 시간 낭비였다.
‘하아, 어디 정보 길드라도 찾아봐야겠는데.’
동시에 자신들은 사이좋은 연인인 척, 계속 연기해야 했다.
루크가 제게 청혼해서 황녀와의 약혼 발표라는 폭탄은 막았지만.
‘아직 황제의 미련은 사라지지 않았지…….’
뭐, 그거야 서둘러 결혼하면 해결될 건데, 일단 제도를 떠나 발트레 영지로 향하기 전까지는 계속 사이가 좋은 관계라는 걸 보여줘야 할 것 같다.
‘마침 축제가 남아 있어.’
개선식이 끝나고 진행되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많은 귀족이 거리로 나올 것이다.
루크와 다정하게 노니는 모습을 보여주면 효과가 좋을 것 같았다.
‘이왕이면 귀족이 많은 거리가 좋겠는데.’
알트페리아는 쌓여 있는 신문을 뒤적이며 요즘 어느 거리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지 찾아보았다.
최근 제도에는 요식업이 흥하고 있었다.
귀족 가문들까지 뛰어들어 사업을 벌였기에 신문에는 음식점을 홍보하는 광고가 많이 보였다.
“리아!”
한참 신문을 읽고 있는데,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겠다.
‘어휴, 저 똥차 놈.’
집착하는 수준이 루크를 탐내는 황제랑 같았다.
무시하고 신문에 집중하는데 앨런이 알트페리아를 찾아 집무실로 왔다.
앨런의 출입은 허락하지 않았다.
시녀들이 무력 대신 말로 막아서도 제멋대로 뿌리치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시체 처리는 번거로워서 말로만 막으라고 했는데.’
저놈은 인간 취급을 해주면 말을 듣지 않는다.
다짜고짜 쳐들어온 앨런이 말했다.
“너, 나랑 이야기 좀 해.”
“앨런과 할 말은 없어요.”
“당장 일어나서 따라와. 나는 너한테 들어야 할 말이 있어.”
앨런이 목소리를 낮추고,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어디서 개가 짖나, 대충 무시한 알트페리아는 앨런의 등 뒤를 흘끗 보았다.
그의 등 뒤에는 세이룬이 서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앨런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자신의 목을 칼로 자르는 듯한 시늉을 해 보였다.
저 손짓이 의미하는 것은.
‘공녀님, 이 새끼 지금 당장 죽여도 돼요?’
세이룬의 손짓은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근처에 있는 꽃 화분을 가리켰다.
‘이참에 비료로 만들어버리죠!’
명령만 떨어지면 인체비료로 만들 준비가 되었다는 듯 세이룬의 두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내 말 안 들려? 당장 일어나라고!”
“싫어요.”
“뭐? 당장 일어나!”
앨런이 알트페리아의 팔을 우악스레 붙잡았다. 세이룬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알트페리아는 세이룬에게 손짓을 했다.
지금 끼어들지 말라고.
세이룬은 주먹을 꽉 쥐며 그녀의 명령을 따랐다.
“당장 청혼을 거절해.”
“제가 왜요?”
“네가 나랑 결혼할 거라는 건 모든 귀족이 다 알아. 그런 상황에 다른 놈과 결혼한다고? 앞으로 사교계엔 어떻게 돌아다니라고! 인정할 수 없어!”
“앨런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는데요? 내 결혼에 간섭하지 말아요.”
“마지막이야. 계속 고집을 부리면 진짜 화낸다?”
알트페리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에게 존대를 하는 것도 질렸다.
한때는 사랑했던 놈이라서 계속 존중해 줬는데 눈앞의 놈은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참고 있는 건 이쪽이야. 앨런.”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앨런이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야! 아프잖아!’
검 대신 펜을 쥐던 놈이라 허약해 보였는데 꼴에 사내라고 손힘이 강했다.
손목뼈가 눌려서 아팠지만, 알트페리아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기죽지 않고 대드는 알트페리아가 성가신지 앨런이 소리를 질렀다.
“리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뭐?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진짜 화낼 건 이쪽이라고!”
알트페리아는 발끝에 모든 기운을 모으고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때를 위해 만들어둔, 철판을 부착한 구두가 앨런의 정강이를 정확히 가격했다.
뻐걱!
뼈 같은 게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아악!”
앨런이 그대로 픽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