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라파엘이 단장실로 들어갔다.
뭔가 들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부단장이 말했다.
“의뢰는 어떤 분이 넣으실 겁니까?”
알트페리아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나야.”
“단장실에는 의뢰자 한 분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동행인께선 밖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이런 수상한 곳에 공……. 제 연인을 홀로 들여보내라는 겁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루크는 공녀라고 말하려다가 황급히 연인으로 바꿨다.
알트페리아가 아직 제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단장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단장님을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불편하셔도 저희 길드의 규칙을 따라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니 더 수상합니다. 제 연인의 안전을 위해서 동행해야겠습니다.”
“안 된다니까요.”
루크는 막아서는 부단장을 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냥 눈길만 준 것이 아니고 오라를 사용했는지 힘겨워하며 주춤거리는 부단장의 모습이 보였다.
루크의 숨은 힘을 파악한 부단장이 알트페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의뢰를 넣고 싶으시다면, 데리고 온 남자분 좀 해결해 주십시오.”
이런 어둠에서 일하는 자들의 규칙은 그녀도 잘 알았다.
아예 거부할 거면 처음부터 매몰차게 내치지, 번거롭게 짝을 나눠서 처리하진 않는다.
“괜찮으니까 믿고 기다려줘요.”
부단장을 살벌하게 바라보던 루크의 시선이 알트페리아에게로 향했다.
“빨리 끝내고 올게요. 못다 한 데이트도 마저 해야 하니까요.”
루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속에 있던 회중시계를 꺼냈다.
“30분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시선이 알트페리아의 귓불로 향했다.
여차하면 연락을 넣고,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실력을 발휘하겠단 뜻 같았다.
* * *
그렇게 단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공간이 완전히 바뀌었다.
막사 안에 마련된 작은 공간 정도로 생각했는데 중후한 느낌이 나는 짙은 색상의 가구와 짐승의 털로 만든 카펫 등으로 장식된 거대한 방이 나타났다.
아무리 봐도 어느 저택의 방인 것 같았다.
‘아티팩트구나.’
신기한 느낌에 알트페리아는 주변을 가볍게 둘러봤다.
라파엘은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책을 허겁지겁 올리고 있었다.
곁눈질로 보니 죄다 로맨스 소설이었다.
“연극에 사용되는 책인가 봐?”
뭔가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움찔거리던 라파엘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예에, 아무래도 사랑 이야기가 인기가 좋으니까요.”
그렇게 답한 라파엘은 빠르게 책을 치우고, 빈 곳이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 손수 꺼낸 찻잔을 올렸다.
“고용인은 어디 가고?”
“딱 두 사람만 들어올 수 있게 설계된 아티팩트입니다.”
노리는 사람이 많다더니, 이런 아티팩트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흑표범단은 의뢰를 받으려면 어느 정도 신분을 노출해야 한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손수 차를 따라주던 라파엘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의뢰를 주는 손님은 처음이군요. 제게 맡기실 일이 무엇인가요, 여신님?”
“그 여신 소리부터 빼줄래?”
이름을 모르면 알려줄 테니까!
“실례했습니다. 저희의 눈에 발트레 공녀님은 여신으로 딱이라 저도 모르게 그리 부르게 됩니다.”
“…….”
“아, 실례. 이제 곧 공작님이 되시려나요.”
그의 말에 알트페리아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네.”
루크는 자신을 지칭할 때 공녀가 아니라 연인이라고 말했다.
자신 또한 발트레 공녀라고 소개한 적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현재 평범한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원단 등을 자세히 보면 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체까지 간파하긴 힘들 것이다.
“그 정돈 쉽죠. 그래서 예비 공작님께서 저를 찾으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물건을 찾고 있어.”
“어떤 물건입니까.”
“초대 소드마스터가 사용한 검을 일주일 안에 찾아줬으면 하는데.”
“전설 속에나 등장한 검을요? 게다가 일주일 안에 찾으란 말씀입니까?”
“왕국의 보물도 찾았다며, 자신 없는 거야?”
알트페리아의 도발에 라파엘이 픽 웃었다.
“저희를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는 겁니까. 재밌을 것 같아서 설렜던 겁니다.”
“나도 막무가내로 부탁하는 건 아니고 약간의 정보 제공은 해주겠어.”
원작에서 루크가 밝혔다.
초대 소드마스터와 관련된 장소에 묻혀 있던 검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그 장소들을 일일이 조사해서 땅을 파고 앉아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반면 정보 길드에 힌트로 주기에는 딱 좋았다.
“뭐, 재밌을 것 같으니 받겠습니다. 다만 막무가내로 찾아오신 만큼 추가 보수를 받을 겁니다.”
그는 알트페리아를 위아래로 흘끗거렸다.
뭔가 재는 듯한 시선으로 훑어보는 것이 왠지 기분이 좋지 않은데.
“내게 뭘 원하는 거야.”
수상한 눈빛 같은 거 보내지 말고 본론을 말하라고.
“오늘 밤, 저희의 무대에 딱 한 번만 서주시지 않겠습니까?”
“뭐?”
“그 눈빛, 태도!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맨 여신 역에 부합합니다! 공녀님께 르블레아 여신 역할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원래 배우는 어디 가고?”
“없습니다!”
뭐가 이리 당당해?
“당장 연극이 오늘 저녁인데 배우가 없다고?”
괜히 수작 부리는 거 아니냐고!
“아침에 사고를 당해서 말입니다. 급하게 구하고 있는 중인데 마땅한 분이 없었습니다.”
“위장용으로 운영하는 연극단이잖아? 그냥 아무나 세워.”
정보 길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아야 한다.
그래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연극단을 운영한다고 들었다.
“저희가 연극에 꽤 소질이 있는지 요새는 본업 못지않게 성황이라, 고심해서 준비한 연극입니다!”
“…….”
“르블레아 여신의 자리는 아무나 앉힐 수 없어 계속 사람을 구하던 찰나 딱 공녀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아까부터 여신, 여신, 헛소리한다 했더니 이 뜻이었나!
“공녀님 말고는 아무도 여신 역할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 팍 느껴졌습니다! 조용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쉬운 역할입니다.”
알트페리아는 건국 신화 속 르블레아 여신을 떠올렸다.
언제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여신은 그저 방관자였다.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마물과 싸우는 소드마스터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초대 소드마스터가 다 죽어갈 때 지상에 강림한 그녀는 그에게 입맞춤하여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준다.
알트페리아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여신은 마지막에 소드마스터랑 키스하잖아.”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다지만 모르는 사람과 입을 맞추는 건 싫거든.
“아, 물론 그 장면은 빼고 대신 부축하는 걸로 바꾸겠습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감동할 만한 장면이 될 테니까요.”
“사기당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해 놓고 막상 무대에서는 키스하게 하는 거 아냐?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시오! 발트레를 상대로 사기를 칠 생각 없습니다. 발트레 시녀들의 실력이 무시무시하다는 건 저희 단원 모두가 다 알거든요.”
알트페리아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건국 신화를 다룬 연극에 참여하는 건 시간 낭비긴 했다.
하지만 원작의 내용을 토대로 소드마스터의 검을 찾는다고 땅을 파헤치는 쪽이 더 시간 낭비다!
“좋아. 딱 한 번만 무대에 서겠어. 대신에 내 신분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 만약에 소문 나면, 알지?”
“…….”
“밤에 길을 걷다가 발트레의 시녀들은 물론 밖에 있는 내 연인까지 만날지도 몰라.”
자신의 정체를 간파했다는 것은 저와 함께 온 사람이 전장의 괴물로 불리는 제국 최고의 소드마스터라는 것도 잘 알 거란 말이었다.
“물론입니다.”
조율이 끝났다.
라파엘은 계약서를 꺼내왔고 알트페리아는 꼼꼼하게 확인한 후 서명을 끝냈다.
이로써 루크가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연극은 오늘 저녁 8시에 시작됩니다. 한 시간 전에만 도착해 주십시오.”
“그래.”
“검을 찾는 것도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찾는 대로 빨리 가져다줘.”
“예.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는데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듣고 답해 줄게. 뭐가 궁금해?”
“개선식에서 청혼받으셨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짜로 받아들이신 겁니까?”
“응.”
“무섭지 않으십니까? 살기를 뿜어내는 걸 보면 보통 무시무시한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요.”
루크의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언젠간 저런 질문을 한 번쯤 들어볼 것 같았다.
그래서 미리 준비한 대답이 있었다.
“솔직히 난 남자는 얼굴을 봐. 저런 얼굴로 청혼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해?”
그에게 붙은 소문이 두렵지 않냐고 물어보면 얼굴이 개연성이라고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아, 과연.”
심지어 루크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누구든 납득할 수밖에 없지.
정보 길드의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황제에게 써먹어도 넘어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