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예쁘고 재력이 넘침-26화 (26/91)

제26화

흑표범단과 계약하고 나온 알트페리아는 벽에 기댄 채 회중시계를 빤히 보는 루크를 바라봤다.

그런 루크의 주변에 있는 단원들은 그를 훔쳐보기 바빴다.

다들 루크의 정체는 이미 파악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계속 수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왠지 그들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저 얼굴로 배우를 하면 돈을 쓸어 담겠는데?’

‘한 번 부탁해 봐?’

‘아서라, 그 전쟁 영웅이라잖아. 소드마스터라고! 잘못 건드렸다간 우리 다 죽어.’

루크를 쳐다보는 눈빛을 보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루크를 탐내는 걸 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알트페리아는 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거래는 무사히 끝나셨습니까?”

알트페리아는 그가 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

“거래의 내용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공자님께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제게 말입니까?”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까 보답으로 준비한 거예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루크는 30분이 되기까지 2분 정도 남은 회중시계를 닫아 다시 품속에 넣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날을 세우듯 단단히 벼르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지만 기껏 사라진 살의는 해가 지는 대로 다시 생겨났다.

그녀가 단역으로 연극에 참여하게 된 것까진 문제가 아니었지만, 맡은 역 때문이었다.

* * *

두 사람은 루크가 찾아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낮의 꿀소가 독특한 맛이었다면, 이번엔 보는 눈부터가 즐거워지는 곳이었다.

일단 거대한 빵 덩어리같이 생겼는데 꽃 모양이라 화려했다.

나이프로 빵을 베어내자 안에서는 잘 익은 윤기 흐르는 소고기가 반겼다.

짙은 향이 나는 버섯으로 만든 양념을 바른 소고기를 바삭한 파이로 감싸 통째로 구워낸 요리였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자 어느덧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요. 저택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아까 그 연극단이요.”

“연극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단역을 하나 맡기로 했어요.”

그녀의 목적은 루크가 사용할 검을 찾는 것.

머지않아 드래곤의 봉인이 풀리고, 토벌에 나선 루크가 다친다.

그러므로 제대로 설명하기로 했다.

“공자님께 선물로 무기를 드릴 거예요. 그걸 찾기 위해서는 흑표범단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그들이 의뢰를 맡아주는 조건으로 연극을 돕기로 했어요.”

꼭 필요한 일이지만 알트페리아는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데이트 도중 갑자기 다른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앨런이 잘하던 짓이었는데.’

그는 자신과 데이트를 하던 도중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떠올랐다며 휑하니 사라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앨런이 약속을 깰 때마다 잔뜩 기대해서 부풀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꺼져 축 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나 당해놓고 똑같은 짓을 하다니!

“상의도 없이 다른 약속을 잡아서 미안해요.”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공녀님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합니다.”

“보러 오실 거예요?”

“제 연인이 참석하는 연극이니까 빠질 수 없죠.”

“제가 맡은 건 대사 하나 없이 그냥 서 있기만 하는 역할이에요. 저 때문에 와서 보시는 건 재미없을 거예요.”

“공녀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찾는 재미가 있겠군요.”

“…….”

“게다가 연인이 홀로 수상한 놈들의 소굴로 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호위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해 주지만 여전히 미안했다.

알트페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를 위해 잡은 약속이지 않습니까. 너무 미안해 하지 마십시오.”

죄책감이 완전히 덜어진 건 아니지만 덕분에 다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루크와 함께 흑표범단의 막사를 찾았다.

알트페리아를 기다리던 라파엘이 반갑게 맞이해 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쪽에 분장을 도와줄 단원을 준비했습니다. 무대에 대한 설명은 가는 길에 해드릴 겁니다.”

라파엘의 지시로 단원 두 명이 알트페리아를 분장실로 안내하며 무대에서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알트페리아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바닥에 옅은 표시가 되어 있단다.

표식이 있는 자리에 조용히 서서 소드마스터를 내려다보다가 마지막에 계단을 타고 내려와 부축해 주는 걸로 끝이라고 했다.

도착한 분장실에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딱 똑같은 은색의 옷과 가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옷을 들어 올린 단원이 말했다.

“무대용 의상이라 크기 조절은 쉽게 할 수 있어요. 귀족 저택의 시녀로 일한 적 있으니, 갈아입는 걸 도와드릴게요.”

알트페리아는 모조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가면을 들어 올렸다.

눈만 드러내는 가면이라 이걸 쓰면 남들이 자신을 쉽게 알아보지 못할 거였다.

옷을 갈아입은 알트페리아는 머리에는 관을, 얼굴에는 가면을 썼다.

구두까지 모두 같은 은색의 물건이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단장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겠어.’

은발도 종류가 다양하다.

사람마다 어둡기가 조금씩 다른데 이 무대 의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자신의 은발을 실로 뽑아 만든 듯 완벽히 같은 색이었다.

의상이 맑은 빛이 도는 은발과 잘 어우러진 까닭에 가만있어도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잘 어울리는데?’

그래서 문제였다.

라파엘이 또다시 부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두 번은 없어.’

이런 일에 어울려주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다.

“준비되었습니다. 바닥에 있는 표식을 따라 올라가 계단 위에 서시면 돼요. 공녀님께서 보셔야 할 사람은 소드마스터예요. 관객석에는 눈길도 주지 마세요.”

고개를 끄덕인 알트페리아는 축 처진 커튼 뒤에서 밝은 무대로 나갔다.

거대한 무대에는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관객은 무시하자.’

그렇게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고 표식을 따라 계단 위에 섰다.

밝은 조명 덕분에 그녀의 옷은 다이아몬드로 실을 짠 것처럼 다양한 색깔로 빛났다.

눈부신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이번 르블레아 여신은 역대 최고네요.”

“정말 여신께서 강림하신 줄 알았어요.”

“사실 여신의 후예가 아닐까요?”

응, 그건 아니야.

실제로 원작 속에는 르블레아 여신의 후예가 한 명 등장한다.

바로 루크와 결혼할 뻔한 막내 황녀였다.

알트페리아는 그런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무시하고, 마물 분장을 한 상대 배우에게 열심히 칼을 휘두르는 소드마스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온몸을 검은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다.

무거운 투구까지 쓴 걸 보니 왠지 덥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한 표정을 지으라고 했지.’

가면으로 눈과 코는 가렸지만 입술은 드러났다.

귀족 특유의 오만한 입매가 더해지자, 그녀는 완벽하게 여신으로 거듭났다.

* * *

알트페리아가 막 분장실로 향할 때쯤.

라파엘은 루크에게 과한 친근함을 표했다.

“이거 이거, 연인분도 함께 오셨네요!”

그는 루크를 보며 눈까지 반짝였다. 루크도 알트페리아 못지않게 정말로 탐나는 인재였기 때문이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겠지만, 그는 혹시나 해 한마디 해봤다.

“혹시 배우에게 관심이 있어서 찾아오신 겁니까?”

“저는 공연을 보러 온 겁니다.”

“그것참 아쉽군요. 공자님을 스카우트하자던 단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

말을 이어가던 라파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루크의 몸에서 매서운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담은 되었고 표나 주십시오.”

이들 때문에 알트페리아와의 데이트가 중단되었다.

심지어 주제도 모르고 공녀를 무대에 세우는 짓거리까지 했다.

루크의 분노를 느낀 라파엘은 괜한 소리를 내뱉었다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순순히 표를 대령했다.

“여기 VIP석입니다!”

라파엘의 표를 빼앗듯 낚아챈 루크는 알트페리아가 배우로 참가하는 연극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제국 건국 신화…….’

루크는 귀족들의 생활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렇지만 제국 건국 신화는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다 보니까 그에게도 익숙했다.

왠지 이 이야기 속에서 알트페리아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딱 떠오르는 역이 하나 있으니까.

“공녀님이 르블레아 여신 역할을 맡으신 겁니까?”

“맞습니다! 역시, 공자님께서도 딱 알맞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공녀님을 뵙자마자 르블레아 여신이 현현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흑화한 염룡’이 불길한 이름에 몸을 떱니다.]

[‘사자의 서기관’이 하필 그 악신이랑 알트페리아를 비교하냐며 화를 냅니다.]

루크는 성좌들과는 다른 의미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르블레아 여신이 악신이든 뭐든 그의 관심 밖이었다.

문제는 그 여신이 쓰러진 소드마스터에게 입을 맞춘다는 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