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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예쁘고 재력이 넘침-27화 (27/91)

제27화

루크한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라파엘은 살기에 익숙하다.

한번 스카우트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한마디 꺼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라파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와.’

정보 수집이 주된 목적이긴 하지만, 그들 또한 어둠에서 활동하는 길드였기에 살의를 접한 적이 많았다.

온갖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사람을 만나왔기에 나름 면역이 생겼으리라 생각했는데도 몸이 절로 떨릴 정도였다.

‘이기지도 못할 거고.’

어차피 그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일단 진정하시고, 왜 화를 내시는지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공녀님께선 연극의 내용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그녀는 제국 건국 신화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루크는 확인을 하고 싶었다.

“알고 계십니다.”

“어떤 역을 맡으신다는 것도요?”

“예, 다 설명했습니다.”

“입맞춤 장면이 있다는 것도 말입니까?”

“…….”

“제 연인입니다.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그런 역할을 시킨 거라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아하, 로맨스 소설 하드 독자인 라파엘은 루크가 살벌한 기운을 뿜어대는 이유를 알았다.

‘질투네.’

알트페리아가 다른 사람과 입을 맞추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물론 진짜 키스하면 반응은 끝내주겠지.’

관객의 반응이 탐난다지만, 공녀께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제넘게 일을 진행했다간 무시무시한 시녀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발트레에게 고소당하는 것도 골치다.

그러니 소드마스터 역을 맡은 부단장도 알트페리아가 자신을 부축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설명을 하면 끝날 문제지만, 라파엘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번득였다.

“하긴, 결혼을 앞두셨으니 신경이 쓰이시겠군요. 그렇지만 이미 공녀님께선 계약을 끝내셨고, 무대에 서 계십니다. 지금에 와서 내려와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말한 루크가 싱긋 웃었다.

비록 빈손이긴 하나 주변에 굴러다니는 막대만 쥐어도 무시무시한 흉기로 둔갑한다는 것을 라파엘은 잘 알았다.

라파엘은 항복의 의미로 냅다 양손을 들어 올렸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시죠! 공녀님의 입술을 지킬 방법이 있으니까요!”

* * *

장면이 바뀌고 막이 내렸다.

알트페리아는 바닥의 표식을 따라 다음 계단으로 이동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이동하는 것도 알트페리아의 일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배우들도 교체되었다.

이제 마지막 장면을 연출할 셈인지 봉인된 드래곤이 준비되었다.

‘오, 잘 만들었네.’

빛에 반사되는 비늘에 거대한 날개. 날카로운 뿔과 발톱.

순식간에 주변을 얼어붙게 할 것만 같은 눈동자는 파충류의 것이 그러하듯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눈동자가 굴렀다.

근처에는 아티팩트를 쥔 사람이 뭐라 외치고 있었다.

라파엘은 이 연극을 고심해서 준비했다고 했었다.

아티팩트까지 동원하여 생동감 있는 드래곤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저 정도면 정말 반응이 좋겠는데.’

짧지만 연극의 일원이 된 알트페리아도 관객들의 반응이 점점 즐거워졌다.

많은 사람이 기뻐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사심도 있었다.

아티팩트를 사용할 정도면 자본이 많은 길드라는 소리다.

그만큼 성공률이 높은 정보 길드라는 뜻이고.

‘친해지면 좋겠어.’

일단 연극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호감을 사기 좋겠지.

준비가 끝나고, 다시 막이 올랐다.

웅장한 연주와 함께 무대에 불이 밝혀지고, 다시 극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배우가 달라졌는데?’

알트페리아는 연극이 시작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단 위에 서서 소드마스터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속 그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어서 아는데 분명히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더 길고 허리는 얇다.

그럼에도 체격은 더 좋아 보인다.

특히 넓은 어깨와 두툼한 가슴이 도드라진 제복은 터질 듯이 팽팽했다.

“크아아악!”

굉음과 함께 무대 위에 드래곤이 살포시 내려앉더니 입을 쩍 벌리며 촘촘한 이빨을 내보였다.

“꺄아악!”

진짜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소드마스터의 망토가 펄럭펄럭 휘날렸다.

그리고 그가 멋지게 검을 쥐더니.

“재앙의 원흉인 악룡 크레치만이여……. 여기서. 잠들. 어. 라!”

국어책 읽기를 시전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목소리마저 작다!

관중석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더니, 이내 야유가 쏟아졌다.

“비싼 입장료 받고 이게 뭐야! 제대로 해!”

“우우우, 잘하다 갑자기 왜 이래!”

계단 위에 서 있던 알트페리아 또한 순간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을 뻔할 정도로 당황했다.

‘진짜 배우가 바뀌었잖아!’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아니,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저건 분명히 루크의 목소리이기 때문이었다.

왜 루크가 저기에 서 있는지는 나중에 듣기로 했다.

일단 연극이 망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게 먼저였다.

“내…… 검을 받아라!”

그사이 루크는 또 국어책 읽기를 시전했다. 알트페리아는 제가 다 부끄러워졌다.

루크는 기억력이 좋다.

한 번 훑어보는 걸로 대사는 완벽하게 기억할 건데 왜 저렇게 뻣뻣한 거지.

마치 자신이 팔짱을 낄 때처럼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연극이 엉망진창이 되고, 흑표범단의 신뢰도 바닥을 칠 것이다.

이미 찬물은 한 번 끼얹어졌지만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알트페리아는 루크가 준 아티팩트의 보석을 꾹 누르며 소곤거렸다.

“공자님,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드래곤과 멋지게 싸우다가 픽 쓰러지세요. 그러면 제가 가까이 갈게요.”

그는 입만 열지 않으면 근사한 소드마스터였다.

검만 멋지게 휘둘러준다면 싸늘하게 내려앉은 관중의 공기도 금방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그녀의 말에 루크가 우뚝 멈춰 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까지 끄덕일 필요는 없는데.

지적하지 않아도 잘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알트페리아는 걱정스레 그를 내려다봤다.

루크는 연극용 가짜 검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뽑았다.

그리고 높이 도약하여 아티팩트로 만들어낸 드래곤을 베었다.

“와아아! 멋지다!”

“이제야 잘하는군. 얼른 쓰러뜨려!”

연극용 화려한 의상과 그의 움직임에 맞춰 나부끼는 망토.

게다가 누가 봐도 완벽한 검술까지 조화를 이루자 조롱을 내뱉던 관중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아티팩트 사용자가 루크의 움직임에 맞춰 드래곤이 괴성을 지르며 날뛰도록 조종했다.

따로 합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루크의 행동에 곧바로 따라오는 걸 보면 각종 다양한 돌발 상황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루크는 다양한 검술을 선보이며 드래곤과 전투를 치렀다.

이제 이 연극이 ‘제국 건국 신화’인지, ‘소드마스터 검술 쇼’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와아아! 잘한다!”

“그 못된 드래곤을 죽여버려!”

뭐, 사람들이 기뻐하면 된 것 아닌가?

싸늘했던 극장 안은 다시 뜨거운 열기로 차올랐다.

드래곤과 열렬한 전투를 벌이던 루크가 알트페리아를 흘끗 봤다.

이쯤 하면 되었냐는 뜻 같아서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루크는 손에서 검을 떨구더니, 가슴을 움켜쥐며 그대로 무대에 쓰러졌다.

죽는 연기는 시키지 않아도 잘했다.

그나저나 미인의 부가 효과인지 무대 위에 늘어진 모습만으로도 루크에게서는 뭔가 빛이 났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신전에는 초대 소드마스터가 드래곤과 전투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 거기 나오는 영웅의 모습보다 루크가 훨씬 잘났다.

“안 돼……. 얼른 일어나.”

“어떡해.”

관객들 또한 그렇게 느낀 것인지 루크에게 과몰입하면서 얼른 일어나라고, 훌쩍이고 난리가 났다.

조롱이 쏟아질 땐 망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분위기가 앞선 장면들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팟―!

알트페리아가 서 있는 계단 쪽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머리 장식이 빛을 받아 잘 커팅된 보석처럼 빛났다.

그녀는 귀족 예법의 완벽한 예시처럼, 우아하게 계단을 걸어 내려와 루크의 앞에 앉았다.

과몰입한 관객은 여기저기서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소드마스터보고 일어나라고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 알트페리아가 맡은 역은 여기서 그의 심장이 위치한 자리에 손을 올리면 끝이었다.

그녀는 그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곤거렸다.

“어쩌다 무대까지 올라온 거예요?”

“공녀님을 지키려고요.”

나를 지켜?

연극을 하다 보면 다치는 사람이 나온다.

그렇지만 자신이 맡은 역할은 그저 계단 위에 얌전히 서 있는 것이기에 딱히 위험할 건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자신이 위험해졌다면 연극을 끝내든가 했겠지, 이렇게 직접 참여하는 건 이상했다.

아.

알트페리아는 그가 지키려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가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굳어 국어책 읽기를 한 건지도.

얘 좀 봐, 엉큼한 구석이 있잖아?

“정확히 말씀하셔야죠. 제 입술을 지키려 했다고요.”

투구 아래로 드러난 그의 피부가 붉게 변하며,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지 그의 가슴이 크게 움직였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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