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알트페리아가 픽 웃었다.
“제 입술을 지키려고 무대에 올라오신 거예요?”
그녀의 손이 루크가 쓴 투구 아래 드러난 볼을 훑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 대신 입맞춤을 받으러 온 건가요? 어느 쪽이에요?”
루크의 입술이 달싹였다.
선택을 할 수 없어 그대로 얼어버린 모양이었다.
이미 극은 클라이맥스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뻣뻣하게 굳어 있을 수는 없었다.
알트페리아는 그의 양 볼을 쥐며 쪽, 입술을 피해 그의 입가에 입술을 댔다가 떨어지며 속삭였다.
“다음엔 제대로 결정하세요. 어느 쪽을 원하시는지.”
“와아아!”
연극의 끝을 알리는 장면에 많은 사람이 손뼉을 치고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대로 막이 내려가 관객들과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제 루크의 정체를 숨기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알트페리아가 감싼 루크의 볼이 뜨뜻해졌다.
왠지 그의 표정이 궁금해져 그녀는 루크의 투구를 벗겼다.
검을 들고 신나게 뛰어다니던 그는 몸에 열이 올라 있었고, 앞머리는 왜인지 땀에 젖어 엉망이었다.
덕분에 단정한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고스란히 얼굴을 내보인 그는 새빨개진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중얼거렸다.
“……혹시 제가 뭘 원하는지 티가 났습니까?”
키스를 막고 싶어 하는 건지,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 둘 다 비슷하지 않을까.
“네.”
루크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는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래서 싫습니까?”
알트페리아는 드러난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싫진 않지만 입맞춤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어요.”
“…….”
루크는 입매를 굳혔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랑과 입 맞추고 싶다.
알트페리아의 마음엔 제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말이 루크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녀의 말은 곧 사랑하는 사람과는 입을 맞추겠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그는 제 볼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리고 알트페리아의 손등에 입술을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
“공녀님이 제게 진심으로 반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그 안에 열기가 서려 있었다.
* * *
막이 내렸는데도 여전히 관중들의 환호가 들렸다.
연극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무대 인사가 시작되었다.
알트페리아와 루크는 참석하지 않았고, 무대 뒤편으로 이동했다.
무대 뒤쪽에 있던 길드원들이 알트페리아를 발견하곤 활짝 웃었다.
“그 도도한 시선! 완벽한 르블레아 여신이었습니다.”
“건국 신화 연극만 이번이 여섯 번째인데, 단연코 최고의 반응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신의 역할을 구하지 못해서 쩔쩔매던 자신들을 구제해 줬다며, 거듭 감사 인사를 올리는 길드원들을 뒤로하고 알트페리아는 막사 안쪽으로 향했다.
무대에 서는 대신 신화의 내용대로 입맞춤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조건을 라파엘은 물론 단원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 알면서 루크를 보내?’
사실대로 입맞춤이 아니라 부축하는 거로 각색했다고 설명했으면, 루크가 무대 위에 올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큼성큼 걷던 알트페리아는 라파엘을 발견했다.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진 그녀가 말했다.
“마스터.”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한 라파엘이 도망치려는 듯한 시늉을 했다. 곁에 있던 루크가 입을 열었다.
“저자를 붙잡으면 됩니까?”
“부탁드릴게요.”
루크는 라파엘을 슥 훑어봤다. 시선이 닿자 라파엘은 순간 자신이 거대한 포식자 앞에 선 토끼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라파엘은 냉큼 양손을 들어 올려 포기한다는 뜻을 밝혔다.
“항복, 항복이니까 쫓지 마십시오.”
“잘 생각했어. 마스터는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일단 이동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관중들의 환호성이 무대 뒤편까지 들릴 정도였다.
대화가 조금 길어질 테니,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안내해.”
그 말에 라파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자신을 따라 자리를 이동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덜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난 협상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그러나 알트페리아의 말 한마디에 라파엘은 다시 바짝 긴장했다.
* * *
이번 일의 피해자는 알트페리아와 루크였다.
그래서 두 명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마스터의 방이 아닌 부마스터의 방에 들어왔다.
눈치를 슬그머니 보던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따로 나쁜 마음을 품고 벌인 짓은 아닙니다. 그저, 두 분의 사이를 좀 더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 마. 연극의 반응을 끌어내려고 벌인 짓이잖아.”
“아닙니다! 아니, 연극이 성공적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정말로 두 분을 응원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마스터가 우릴 언제 봤다고 응원하느니 마느니 하는데?”
“직접 뵌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개선식 때 청혼받은 소식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청혼하는 건 몇 년 만의 일이라 좀 설렜습니다.”
“청혼받은 건 난데 마스터가 왜 설레?”
미쳤냐고!
“오해 마십시오. 저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라파엘의 집무실 책상에는 로맨스 소설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인제 보니 사랑 이야기 같은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마스터의 생각은 알았어.”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라파엘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면 이대로 넘어가 주시는 겁니까?”
“아니, 나는 손해를 입었으니까 그에 맞는 보상은 해줘야겠어.”
“어떤 손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파엘로서는 알트페리아가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알트페리아는 루크가 준 아티팩트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예정에 없던 일을 수습하느라 내 연인이 준 소중한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말았어.”
예상 밖의 상황에 라파엘은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반면 루크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어떻게 해결할 거야!”
아티팩트는 내장된 마력이 소모되면 소멸한다고!
라파엘이 눈알을 굴렸다.
알트페리아가 아티팩트를 사용했을 줄은 몰랐다.
뭐든 간에 자신이 루크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아서 비롯된 일이었다.
심지어 알트페리아는 방 안에 들어오기 전에 협상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명백하게 있다는 뜻이었다.
“끙, 알겠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밀정을 키울 생각인데 사람을 좀 빌려줬으면 좋겠어.”
세이룬을 포함하여 발트레의 시녀들은 모두 전투에 능하다.
거기에 루크까지 더해졌으니까 발트레의 무력은 사실상 최강이나 다름없지만, 다른 부분은 상당히 빈약했다.
특히 주변의 영주들에 대한 동향을 수집하는 능력은 없다시피 했다.
영지의 미래를 위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흑표범단의 실력은 보증되어 있으니까, 밀정의 초석을 쌓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라파엘은 주저하는지 답이 없었다.
“뭣하면 그냥 흑표범단이 통째로 우리 가문 밑으로 들어와도 좋고.”
“저희는 그 어떤 가문도 섬길 생각이 없습니다.”
알트페리아 또한 흑표범단 전체를 가지는 건 사양이었다.
실력이 좋은 정보 길드는 적이 많다.
암살 위협에 시달린다고 출입 인원의 제한이 있는 아티팩트까지 사용하는 길드 마스터를 가신으로 삼았다간, 덩달아 자신 또한 위험해진다.
“뜻은 알겠으니 상급 길드원 한 사람만 석 달 정도 빌려줘. 우리 시녀들은 실력이 좋아서 그 정도면 충분히 배울 거야.”
그러니까 적당히 기술만 빼낼 생각이었다.
물론, 그 기술도 쉽게 주진 않을 테지만.
생각에 빠진 듯 조용히 있던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길드 마스터가 길드원을 내보낼 순 없습니다.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길드원을 골라 발트레로 떠나란 명령을 내리지 못합니다.”
마스터가 직접 발트레로 가라고 하면, 길드원 처지에선 좌천이었다.
“하나, 공녀님께 손해를 끼쳤으니 그에 대해 보상은 해야겠죠. 그러니 스스로 따라나서겠다는 길드원은 막지 않을 테니, 누구든 데려가십시오.”
순순히 허락해 주는 것 같지만, 라파엘의 새까만 속이 보였다.
발트레는 북부에 있어서 춥다.
시골인 것도 서러운데 주기적으로 마물까지 나타나는 위험한 땅이었다.
꽃과 낭만이 넘쳐나는 제도를 버리고 자진해서 발트레 영지에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트페리아는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생각했다.
스스로 따라가는 사람은 막지 않겠다고 했겠다.
“좋아, 그 정도 요구라면 받아들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