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에델의 길고 긴 전 남친 자랑이 끝났다.
“리베르트의 기본 교육은 제가 맡을게요!”
본인 스스로가 나서니 딱히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
전 남친과 마주치지 않도록 소속을 옮겨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걸 보니 그대로 두어도 될 듯했다.
알트페리아는 다시 신문에 집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세이룬이 찾아왔다.
“공녀님, 소백작께서 오셨습니다.”
“앨런이?”
“예, 출입을 거부했더니 소리를 지르고 계십니다.”
누구의 전 남친은 왜 헤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멀쩡한데 자신의 전 약혼자 상태는 왜 저럴까.
대체 언제까지 질척거릴 생각인지 모르겠다.
“어디 보이지 않는 장소로 끌고 가서 처리해 버릴까요?”
“일단 데려와.”
만나자는 이유는 뻔했지만, 저택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도록 둘 순 없었다.
* * *
“리아…….”
질리도록 본 앨런과 마주한 알트페리아는 내심 놀랐다.
한껏 힘을 내 정리하던 머리는 푸석푸석하고, 제대로 자지 못하는지 피로에 쩔어 보였다.
일주일 만에 만나는 그는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져 있지만, 어쩜 불쌍하단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지.
알트페리아는 생각보다 냉정한 제 마음에 놀랐다.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는 앨런을 사랑했다.
그런데, 한때는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 힘겨워해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그만큼 앨런과 함께였던 순간은 고통의 연속이었고, 잊고 싶었던 과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알트페리아는 공손해진 앨런을 한 번 훑어봤다.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
“할 말이 없으면 돌아가요. 남의 저택 앞에서 시끄럽게 짖어대지 말고.”
이 정도로 말했으면 울컥하며 화를 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트페리아의 냉정한 말에도 조용하게 듣기만 하고, 한참 말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알트페리아가 세이룬을 시켜 어디 길가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을 하려던 참에.
“리아, 오늘따라 유독 이쁜 것 같아.”
앨런이 왈왈 짖었다.
간장치킨을 맛본 알트페리아는 로제떡볶이도 먹기 위해서 아침부터 일어나 신경 썼지만, 앨런 따위에게 감상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 없으니 본론만 말하세요.”
“이제야 알았어. 너한테 차인 뒤에.”
이별 통보를 했다는 의미의 찼다가 아니라 진짜 발로 걷어찬 일을 말하는 거였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그간 너에게 너무 심하게 굴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참 빨리도 깨닫는다.
알트페리아는 손가락을 펼쳐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매번 약속을 깨고, 방치하고, 무시하고, 폭언을 쏟아붓고.”
“…….”
“거기에 눈앞에서 대놓고 바람을 피워놓고선 이제야 잘못을 깨달은 거예요? 어린아이도 앨런보다 빨리 뉘우칠 거예요.”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살다 살다 앨런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줄 몰랐다.
사람이 하지 않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래도 앨런은 세이룬과 시녀들이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 걸 본능으로 알아차린 모양인데.
앨런은 기가 죽은 듯 우물쭈물했다.
본론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를 다시 저택으로 들여준 걸 보면 역시나 마음이 남아 있는 거지? 너도 나랑 헤어지고 후회한 거야. 맞지?”
“…….”
“사과했으니까 우리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명언이 참 많다.
그중 하나가 사람을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소백작을 데려오라고 지시한 이유는 시답잖은 사과를 받기 위함이 아니에요.”
“시답잖다니……. 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어!”
“소백작의 진심 따윈 알 바 없으니 이만 돌아가세요. 저는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거든요.”
“뭐? 그렇게 차려입은 이유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기 위해서야?”
“맞아요. 곧 남편이 될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예요.”
앨런은 늘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차려입었냐는 소리를 내뱉었고 알트페리아는 ‘네’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와 다른 대답을 돌려줬다.
“그 괴물 자식과 진짜 결혼할 거야?”
“맞아요.”
“그런 놈이랑은 당장 파혼해! 사생아 따위랑 결혼하면 네 평판에도 좋지 않다고!”
“누구 마음대로 파혼하라는 겁니까?”
그 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지며 존재감을 똑똑히 드러냈다.
루크였다.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그나저나 루크는 웬일로 검은 옷이 아닌 푸른색 계열의 정장을 맵시 있게 차려입고 있었다.
크라바트와 소매는 보석으로 맞춘 커프스로 장식했고, 머리 또한 깔끔하게 뒤로 넘겼다.
거기에 거대한 장미꽃다발까지 들고 있는 모습은 명화 속에서나 볼 법한 남신의 모습 그 자체였다.
잘 차려입은 루크를 발견한 앨런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자신과 알트페리아는 계속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방문했다며 시녀가 알리지 않았다.
그 말은 루크가 허락받지 않아도 발트레 저택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정사정해서 들어왔는데!’
앨런도 예전에는 집주인의 허락 없이 자유롭게 저택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녀들이 나서서 막아서는 바람에 매달리다시피 부탁해서 겨우 집에 들어왔다.
그러니 마치 제집인 것처럼 당당하게 들어온 루크가 아니꼬웠다.
앨런과 루크의 시선이 맞닿았다.
더러운 사생아인 루크의 시선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다 저 자식 때문이야.’
알트페리아는 제 말이면 뭐든 들어주는 착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자신에게 따지고 대들더니, 심지어는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그래, 이제 알겠어.’
저놈이 나타나고 나면서 알트페리아가 달라졌다. 더러운 사생아가 알트페리아를 나쁘게 물들인 거였다. 그렇게 생각한 앨런은 귀족의 체면 때문에 고수했던 존대도 내버리고 그에게 외쳤다.
“리아의 결혼 상대는 나다. 뒤늦게 나타난 놈은 빠져!”
“과거 이야기는 관두십시오. 지금은 제 약혼녀이십니다.”
“고작 며칠 어울렸다고 약혼자를 운운하다니 웃기지 않아?”
“저는 공녀님께 받은 약혼장에 서명까지 끝마쳤습니다만.”
무려 신전의 공인까지 받은 약혼자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앨런은 내심 놀랐다.
그 짧은 새에 약혼까지 다 끝냈을 줄은 몰랐으니까.
이대로 지고 싶지 않은 앨런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잠깐, 공녀님이라고?’
그러고 보니 알트페리아의 표정도 다르다.
앨런은 사랑에 빠진 알트페리아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았다. 심장도 내어줄 것처럼 굴었던 그녀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의 알트페리아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모종의 계약이나 거래가 오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공녀? 공자는 이름을 불러도 된다는 허락도 받지 않았나 봐.”
“…….”
“리아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속삭인 줄 알아? 공자는 한 번이라도 들어보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네!”
앨런의 지적에도 루크는 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겉과 달리 그의 속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의 지적대로 알트페리아에게 사랑은커녕 좋아한다는 등의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심지어 어젯밤의 그녀는 자신보다 불꽃을 더 예뻐했다.
두 눈 가득히 불꽃을 담고 즐거워하던 그녀를 떠올리자 신경이 곤두섰다.
기세가 등등해진 앨런이 따지고 들었다.
“리아가 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매일 보내는 편지에도 입술을 찍어 보낼 정도로 나를 사랑했어.”
아악!
가만가만 듣고 있던 알트페리아는 자신의 흑역사가 불시에 꺼내지자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리아가 나를 원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야. 이제 나를 리아에게 줄 거니까 넌 빠져!”
뭘 줘, 앨런 너를?
비료로도 만들지 못할 것 같은데 대체 뭐에 쓰라고 자기를 준다는 거야.
알트페리아는 앨런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루크가 먼저 대꾸했다.
“당신께 무슨 가치가 있다고, 공녀님이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기분 나빠하시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그거야 받고 나서 반응을 확인하면 되지.”
“분명히 불쾌해 하실 겁니다.”
“네가 어떻게 알아!”
“공녀님은 아름다운 걸 좋아하십니다. 소백작이야말로 알고 계신 겁니까?”
그렇게 말하던 루크는 앨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앨런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얼굴만은 쓸 만한 앨런이었기에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무시당한 적은 없었다.
“겉만 멀쩡하다고 단 줄 알아? 속을 봐야지.”
“저는 몸 또한 자신 있습니다만.”
“익! 마음 말이야! 네놈 평판보다는 내가 나아!”
루크가 쿡, 웃었다.
“정조 없으신 분께서 그런 말을 꺼내시다니.”
“나는 공자와 달리 인기가 많아서 여자들이 놓아주지 않던 거야. 수준이 다른 거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짐승처럼 욕구를 참기 힘들어 더러운 짓을 해왔다고.”
“뭐? 내가 짐승이라고?”
두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던 알트페리아는 왠지 팝콘을 꺼내 와작거리고 싶어졌다.
전장의 괴물이고 소문난 루크와 바람둥이 앨런과의 대결.
그렇게 두 사람의 기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