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능력을 각성한 알트페리아는 쓰러져서 끙끙 앓았다.
몽둥이로 뚜드려 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고 열이 뜨겁게 올랐다. 더운지 추운지 알 수 없는 기분에 그녀는 계속 몸을 뒤척였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같이 웅웅 울렸다.
“……알트페리아.”
숨을 토해 내듯 걱정을 잔뜩 담은 목소리에 반응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찰박, 무언가 제 이마를 덮었다.
시원한 느낌에 몸의 열기가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낀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방 안이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으으, 몸이 무거워.’
푹 잤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졸렸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자 뒤척거렸더니 이마에 올려둔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아무래도 시녀들이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몸이 무거워.’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창문을 확인했다.
젖혀진 커튼 사이로 떠 있는 초승달을 발견한 알트페리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각성했다는 알람창이 뜬 건 아침이었는데.
달이 떴다는 것은 벌써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는 뜻이었다.
‘루크랑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제시간을 지키기는커녕 장소에 나가지도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는 홀로 자신을 기다렸다가 그대로 돌아갔겠지.
카페에 혼자 덜렁 앉아 소식이 없는 상대를 기다린 적이 있었기에 그 비참한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렸을 루크에게 미안해진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떡해…….”
“무엇이 문제이십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뜬 알트페리아는 곁에 있는 남자를 확인했다.
반듯한 이마에 드리운 검은 머리.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자였다.
저렇게 근사한 사람이 하나 더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루크가 확실했다.
“공자님?”
“예, 접니다.”
“제가 꿈을 꾸는 건 아니죠?”
“꿈이 아닙니다.”
몸살 기운에 잠식되었기 때문에 기분이 몽롱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지금은 늦은 밤이었다.
설령 그가 찾아왔다고 한들 시녀들이 막아서서 쫓아냈을 것이다.
알트페리아는 하품을 하며 웅얼거렸다.
“늦은 밤이니까 꿈이 맞는 거 같아요……. 시녀들이 공자님의 출입을 허락할 리가 없거든요.”
“우리는 약혼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동거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렇긴 해도…… 시녀들은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저를 너무 과보호하거든요…….”
알트페리아는 발트레 가문을 이끌기에는 허약한 몸으로 태어났다.
그런 그녀를 부모님은 물론 발트레에서 일하는 고용인들까지 모두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걱정하면서 조심스레 대했다.
“절대로 허락할 리 없어요.”
단호한 그녀의 답에 루크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리고 신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신자 같은 모습으로 설명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시녀들이 막아섰습니다.”
그 말에 알트페리아는 피가 식는 듯한 싸한 기분과 동시에 몽롱해지던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시녀들이 막아섰는데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녀들을 쓰러뜨렸다는 뜻과 같으니.
“설마…… 무력으로 해결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순순히 돌아가는 척한 뒤 몰래 담을 넘어 창문으로 들어왔습니다.”
남은 잠이 싹 날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네? 제 방은 어떻게 아시고요?”
“밖에서 보니까 이 창문만 커튼을 쳐놨더군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알트페리아는 눈을 여러 번 끔뻑거리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잘못한 걸 아는지 루크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고개까지 숙인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중얼했다.
“허락 없이 제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아티팩트로 공녀님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으시고 시녀들이 막아서는 모습도 영 수상해서 담을 넘었습니다.”
발트레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모두 특수한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다.
‘와…….’
그런 그녀들의 경비를 뚫고,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잠입한 루크의 실력이 놀라웠다.
‘하긴 루크니까.’
먼치킨이 잔뜩 있는 원작 속에서도 압도적으로 가장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오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알트페리아는 루크를 바라봤다.
그는 오늘도 근사하게 차려입었는데, 시녀들의 경비를 뚫고 잠입했는데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잘못된 행동인 건 압니다. 하지만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무단침입한 사실을 고하는 자신이 부끄러운지 그의 얼굴 전체가 새빨개졌다.
한 번 죄를 고백하기 시작한 그는 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줄줄이 나열했다.
“레이디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온 것도 모자라 공녀님께 손을 댔습니다.”
“네?”
이건 무슨 소리인데!
루크의 시선이 알트페리아의 이마에서 떨어진 물수건으로 향했다.
“열이 높은 것 같아서 물수건을 올려드리고, 흘러내린 이불을 정리해 드렸습니다.”
아, 난 또 뭐라고.
아무리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지만, 오해할 법한 소리를 하고 있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알트페리아는 잠결에 누군가 자신을 잔뜩 걱정하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제발 이 사람을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은 루크였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제가 걱정되어서 그러신 거잖아요. 공자님이 물수건을 올려준 덕분에 열도 내렸고요.”
그는 알트페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괜찮다며 웃음을 지었지만, 몸살기가 남았는지 버거워 보였다.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자신이 왜 쓰러졌는지, 루크에게도 설명하긴 해야 했다.
능력 각성에 관해서는 루크가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
“저 말이에요. 아무래도 각성한 것 같아요.”
루크가 눈을 크게 떴다.
“공녀님께서 각성하셨단 말입니까?”
“네.”
“각성 때문에 몸살이 나긴 하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닙니다. 혹시 다른 알람을 받은 것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제 능력 때문인 것 같아요.”
그는 시한부라 선고받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아픈 건 이쪽인데 왜 루크가 저리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구는지.
“어떤…… 능력을 얻으신 겁니까?”
원래 헌터들은 자기 능력을 꼭꼭 숨긴다.
설령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모든 패를 밝혀주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트페리아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루크의 능력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패도 보여줘야 공평하다는 생각이었다.
속으로 상태창을 외치자 눈앞에 푸른색 창이 떴다.
‘이건 알리지 않는 게 좋겠어.’
자신이 획득한 스킬을 살펴보던 그녀는 설명 맨 마지막에 붙어 있는, ‘보유한 재산의 잔액이 0르블라일 때 사망합니다’는 비공개로 놔두고 남은 정보를 공개로 돌렸다.
그리고 카드를 뒤집듯 돌려 루크에게 스킬창을 보여줬다.
[돈의 힘: 패시브 스킬]
랭크: F
효과: 보유한 재산이 많을수록 강해집니다.
※ 보유한 재산은 계좌의 잔액과 현금을 더하여 계산합니다.
※ 보유한 재산이 10억 르블라 이하일 때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 10억 르블라를 소모하여 랭크를 올릴 수 있습니다.
루크는 알트페리아의 스킬창을 읽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모든 스킬은 사용하는 대신 대가가 있다.
대부분 마력을 소모하지만, 간혹 수명이나 혈액, 보유한 재산 등을 제물로 삼아 발동하기도 한다.
보유한 재산을 소모하여 랭크를 올리는 스킬이라니, 사용할 때도 잔액을 소모하는 형태일 것이다.
이런 것이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문제는 보유한 재산이 일정 금액 이하일 때 모든 능력치가 하락한다는 부분이었다.
알트페리아가 다른 사람은 가벼운 몸살로 지나가는 각성 때문에 정신을 잃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