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퀘스트를 받아 마물을 퇴치하다 보면 종종 저주에 걸린다. 모든 능력치가 하락하는 저주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고통이 상당했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루크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모든 능력치가 하락하면 그만큼 아프실 겁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공녀님을 만날 생각에 혼자 들떠서 저택에 찾아왔습니다…….”
알트페리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그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아서였다.
머리가 아프고 피곤하지만 죽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다.
아픈 건 싫지만 그녀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서 기뻤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비능력자로 살기가 얼마나 힘겨웠는지!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돈을 벌 생각이었으니까요.”
“…….”
“여기 쓰여 있잖아요. 재산이 많을수록 강해진다고. 그러니까 돈만 채워 넣으면 금방 튼튼해져요.”
“…….”
“나중에 가면 공자님보다 훨씬 더 강해질지도 모른다고요. 걱정하지 마요!”
열심히 위로했지만, 루크는 잔뜩 풀이 죽었다.
괴로워하는 그를 위로하고 싶어 몸을 일으켰더니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았다.
열이 식어서 잠깐 괜찮았을 뿐 여전히 몸 상태가 별로인 거였다.
괜찮긴 무슨, 죽겠어.
“으…….”
세상이 뱅글뱅글 도는 것을 느낀 알트페리아가 휘청거렸다.
“공녀님!”
놀란 그가 양손을 뻗어 알트페리아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루크의 품에 폭 안겼다.
알트페리아의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던 루크는 그녀의 무게를 느끼자마자 아찔해졌다.
그녀가 제 곁에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고양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그는 알트페리아를 살펴봤다.
“괜찮으십니까? 사람을 부를까요?”
머리가 깨질 듯이 울리는 와중에도 알트페리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이 상태로 루크가 시녀들을 부르러 가면 진짜 난리가 날 것이다.
시녀들의 입장으로선 루크는 담을 넘고, 공녀의 방 창문을 따고 들어온 무뢰한이기 때문이었다.
‘으으……. 맞긴 하지만…… 시녀들이 명부에 루크의 이름을 올릴 거야.’
그리고 앨런과 쌍으로 묶어 엄청나게 싫어하겠지.
알트페리아는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들을 좋아했다.
마찬가지로 루크도 좋아한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힘겹게 양팔을 뻗어 그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다른 사람은 부르지 마요.’
자신의 필사적인 몸짓이 통하길 바라며.
어지러운 와중에 고개를 흔들었더니, 몸에 열이 확 오르는 기분이 들며 잠이 쏟아졌다.
‘아, 진짜 돈 벌어야겠어.’
포상금이 들어오는 대로 하려던 일이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고 부족한 잔액을 채워 넣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었다.
지독한 무력감이 덮치는 것과 동시에, 알트페리아는 정신을 잃었다.
알트페리아의 행동이 뚝 멈췄다.
“공녀님?”
그녀를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레 내려다보니 알트페리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자고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색색, 일정한 속도로 호흡을 내뱉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루크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어댔다.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그녀가 깨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쿵쿵거렸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번 심호흡한 그는 알트페리아를 안아 올려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그리고 제 목을 감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 가지런히 정돈해 줬다.
“으……. 추워.”
그녀가 추운 듯 몸을 잘게 떨기에 이불도 덮어줬다.
정리를 끝냈으니 올 때처럼 조용히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가 출입문 대용으로 삼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뒤척이던 그녀가 루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파…….”
중얼거리는 그녀의 손은 뜨거웠다.
루크는 자신이 각성한 날을 떠올렸다.
가족이 없던 그는 홀로 열을 억누르며 밤새 끙끙 앓았다.
단순한 몸살 수준이었지만…….
아플 때 혼자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서러웠다. 누군가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꽉 붙잡았다.
그제야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 * *
다음날, 알트페리아는 환한 빛이 성가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에는 어느새 초승달 대신 푸른 하늘에 환한 해가 떠 있었다.
해의 위치를 보니까 정오는 지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침실에는 자신 혼자만 있었다.
‘루크는 돌아갔나?’
온몸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알트페리아는 밤새워 뒤척이며 중간에 깨어나기도 했다.
드문드문 잠에서 깨어나면 곁에 있던 루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심이 되어 다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크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시녀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돌아간 모양이었다.
“으으!”
알트페리아는 몸이 찌뿌둥해서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러다가 침대 주변에 웬 종이쪽지가 하나 놓인 것을 발견했다.
먼저 각성한 선배께서 친히 남기고 간 경험담이었다.
<각성의 여파로 한동안 계속 몸이 피로할 겁니다. 이틀 정도는 푹 쉬셔야 합니다.
몸이 괜찮아지면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루크가 남기고 간 흔적을 확인하자 웃음이 나왔다.
혹시 누군가가 먼저 발견하여 곤란한 상황에 놓일까 봐 은밀하게 남기고 간 쪽지는 무려 한글로 적혀 있었다.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발견해 봤자 정체를 모를 암호로 보일 거였다.
앞으로 종종 루크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한글을 사용해도 될 듯했다.
그렇게 침대에서 일어난 알트페리아는 식사하고, 신문을 읽다가 루크가 예고한 대로 쏟아지는 피로에 패배해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냈다.
다음날도 같았다.
조금 다른 점은 중간중간 알람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둥실 떴다는 거였다.
한창 잠에 취해 있을 때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그녀는 정작 잠에서 깨어났을 땐 잠결에 본 알람창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앓고 일어나니까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 죽다 살아났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열병이었다.
‘부족한 1천만 르블라는 하루라도 빨리 채워 넣어야지.’
한 번 시름시름 앓고 나니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이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장에 돈을 빵빵하게 채워 넣어야겠다 싶었다.
똑, 똑, 똑.
세이룬이 문을 두드리며 알트페리아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공녀님, 오늘 몸은 좀 어떠세요?”
“이제 멀쩡해. 살 거 같아.”
“일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의원 말로는 가벼운 몸살이라고 하는데 며칠 내내 누워 계셔서 걱정했어요.”
가까이 다가온 세이룬의 눈매가 붉었다. 잔뜩 걱정한 모양이었다.
“정말 괜찮아. 몸이 한결 가벼워졌는걸.”
매의 눈으로 알트페리아를 샅샅이 살펴보던 세이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녀님이 쓰러지신 건 다 공자님 때문이죠?”
“응?”
“연약한 공녀님을 며칠 내내 데이트라는 핑계로 끌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요. 다 공자님 때문이에요!”
“…….”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앨런과 똑같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다른 건 몰라도 앨런 같은 쓰레기랑 동급 취급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속상했다.
마치 자신이 모욕받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알트페리아가 성을 내자 세이룬이 찔끔거리며 눈치를 봤다.
“그렇지만 며칠이나 쓰러져 계셨는데 의원도 원인을 모른다잖아요……. 무리한 외출이 원인인 것 같아요.”
“데이트 약속은 전부 내가 먼저 잡았어.”
“뭐라고요? 아니, 공자님은 공녀님이랑 데이트할 생각도 안 하셨대요?”
뭐야, 어느 쪽이든 욕을 할 생각이잖아!
“비록 내가 먼저 연락을 넣었지만, 데이트 코스는 공자님이 알아 오셨어. 내가 모르는 근사한 곳도 많이 데려가 주셨단 말이야.”
“…….”
“나는 공자님과 함께 다니는 게 즐거웠어. 절대로 내 몸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어!”
“…….”
“그리고 난, 며칠 돌아다녔다고 픽 쓰러질 정도로 허약한 인간도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