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탈인간급인 시녀들 눈에 알트페리아는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연약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사람을 무슨 설탕으로 만든 공예품 취급하는데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고!
눈시울이 붉어졌던 세이룬은 결국 울음을 흐아앙 터뜨렸다.
“그렇지만…… 공녀님은 대검을 한 손으로 들지 못하실 정도로 연약하시잖아요. 제 눈엔 무리하신 걸로 보였다고요. 흐엉.”
“그 대검 말이야, 밀가루 포대 열 개랑 맞먹잖아.”
그 정도로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하는 건 정상이거든?
오히려 한 손으로 들고 휘두르는 게 이상하거든?
“아니, 대검이 뭐예요. 장검도 제대로 드시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시면서 날마다 밖에 나가시고……. 그러니까 탈이 나시죠. 흐어엉.”
아 진짜, 장검도 밀가루 포대 다섯 개 무게는 된다.
그런 걸 드는 너희들이 특출한 거라고!
알트페리아는 자신이 허약하지 않다는 걸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세이룬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가 더러워서라도 돈을 벌고 만다.’
재산을 빵빵하게 만들어 대검이든 장검이든 들어주고 말리라.
* * *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 없었다.
몸이 나았으니 계획한 바를 실행할 때가 왔다.
“밖에 나가야겠어.”
“네에? 안 돼요, 더 쉬셔야 해요!”
외출을 한다고 하니까 세이룬을 포함한 시녀들은 난리가 났다.
그렇지만 이대로 얌전히 저택에만 있으면 몸이 나아지긴커녕 골골거리는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멀쩡해지려면 보유한 재산을 늘려야만 했다.
알트페리아는 그레이 호텔에 있는 루크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러자 루크 대신 그의 보좌관인 듯한 사람에게서 답이 왔는데.
<공자님은 밤늦게 밖에 나가신 후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외출이야 할 수 있지.
그런데 밤늦게 나가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니?
앨런이라면 딴 여자 만나서 바람피우는 중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루크가 자리를 비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알트페리아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든 연락하라더니?’
그는 자신의 곁에서 잔뜩 걱정했었다.
그렇게 절절한 모습을 보여주며, 기다리겠다는 쪽지까지 놔두고는 정작 자리를 비운 것이다.
‘건강해진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당연하게도 루크가 제가 다 낫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조금 서운해진 그녀는 귓불에 꽂힌 아티팩트를 꾹 누르려다가 멈췄다.
‘됐어.’
냉정하게 생각하면 약속일을 잡은 건 아니니까 구태여 그가 자신을 기다릴 필요도 없는 거였다.
루크 대신 세이룬과 밖에 나가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치장을 끝낸 알트페리아가 저택 밖으로 나설 때였다.
끼이익―
아직 열라고 지시도 하지 않았는데 닫힌 문이 제멋대로 열렸다.
붉은 아네모네를 중심으로 건강을 의미하는 뜻을 지닌 다양한 꽃을 엮어 만든 다발을 든 루크가 서 있었다.
연락하라던 루크가 정작 자리를 비워서 섭섭한 느낌이 들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의 환상을 볼 정도로 간절하게 원하진 않았는데?
알트페리아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닿은 루크의 환상이 눈웃음을 지었다.
“찾아오겠단 연락을 넣었는데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말까지 하는 걸 보니 환상이 아니라 진짜 루크인 모양이었다.
“밤늦게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답신은 받았어요.”
그가 잠깐 주저하며 답했다.
“……그 이후에 하나 더 보냈는데 엇갈린 모양입니다. 허락받지 않고 저택에 찾아온 모양새가 되었군요.”
일부러 밤늦게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내뱉었지만,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 점이 알트페리아는 조금 서운했다.
루크는 알트페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며칠 전, 창문을 넘어 확인했었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다행이다.’
생기가 넘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창문 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시스템> 현재 행복 지수: 0/10]
꽃다발을 넘겨도 그녀의 근처에 두둥실 떠 있는 행복 지수 또한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같은 선물이라 싫으신 건가?’
아무래도 다음에는 꽃다발보다는 다른 선물을 준비해야 할 듯했다.
루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디에 가실 겁니까?”
“공자님의 포상금을 불리러 갈 거예요.”
마차가 향하는 장소는 여러 상단의 사무실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상단을 운영하실 겁니까?”
이 세계에서 사업을 하려면 먼저 상단을 만들어야 했다.
물론 알트페리아도 나중에는 상단 운영까지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상단을 만들어 시작하는 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기에 다른 일부터 할 생각이었다.
계획대로라면 현재 계좌에 있는 돈을 불리는 건 확정이고, 잘하면 상단이 하나 딸려 올지도 몰랐다.
“상단 운영은 천천히 할 거예요. 일단 가진 돈을 늘리는 게 먼저예요.”
각성 당시 뜬 알람에 의하면 현재 자신은 9억 9천만 르블라를 보유하고 있었다.
10억 르블라 이하는 모든 능력치가 하향된다.
가뜩이나 금방 지치는데 여기서 더 투자했다간 한동안 침대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잔액이 0만 아니면 돼.’
조금이라도 남겨놓으면 죽지는 않으니까.
지금은 무조건 한 달 뒤에 가치가 오를 것들에 투자해야 했다.
“상단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부동산을 살 거예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루크가 반응했다.
“공녀님이 알고 계신 미래에 어떤 땅이 개발되기라도 합니까?”
“그런 노른자 땅의 위치는 제가 아니라 앨런이 잘 알아요.”
원작에선 앨런이 부동산으로 돈 좀 만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앨런은 단역으로 등장한 악역이다 보니까 자세히 설명되진 않아서 어디의 어떤 땅을 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원작과도 많이 달라졌으니, 앨런이 부동산으로 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듣던 루크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소백작을 제거하면 됩니까?”
“…….”
예전에 분명 암살 의뢰는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면 실토하게 만들 때까지 손을 볼까요?”
그 모습이 왠지 앨런을 비료로 만들고 싶어 하는 시녀들과 겹쳐 보였다.
사람은 취미를 공유하면 금방 가까워진다.
앨런을 어떻게 조질지를 토론하면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빠르게 친해질 것 같았다.
결혼하고 나서 루크는 발트레 저택에서 지내게 된다.
사용인들과도 잘 지내야 할 텐데, 괜히 다툴까 봐 신경 쓰였지만,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아 뿌듯해졌다.
“앨런은 내버려 두세요.”
그 말에 루크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차분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놈은 다른 사람이 처리해 줄 거예요. 괜히 더러운 놈에게 손을 댈 필요 없어요.”
“아―”
그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저는 앨런이 모르는 곳의 땅을 살 거예요.”
아마도 지금 사려는 장소에 대한 정보는 자신밖에 모를 것이다.
원작에서도 아무도 몰라서 땅값이 미친 듯이 뛰어오른 뒤에 한둘씩 투자하기 시작했으니까.
어느새 마차는 다양한 상단이 모여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갖가지 상단의 이름들이 보였다.
알트페리아는 상단의 이름을 한 번씩 훑어보다가 작은 사과가 그려진 익숙한 간판을 발견했다.
‘에드먼드 상단’.
유통업을 중심으로 땅이나 가게의 매입을 돕는 부동산 일도 하는 곳이었다.
알트페리아는 에드먼드 상단의 문을 익숙하게 열고 들어갔다.
상단의 주인인 에드먼드 후작이 발트레의 옛 가신이라 부모님과 함께 종종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에드먼드는 충성심이 강한 가문이었는데 현재는 발트레를 떠나 독립했다.
그가 자립한 이유는 기가 막힌다.
‘나 때문이지.’
앨런에게 푹 빠져서 가문의 재산을 갖다 바치다시피 하던 알트페리아를 보다 못한 에드먼드 후작이.
“접니까, 앨런입니까. 선택하십시오, 후계자님!”
―이라고 울부짖는 소리에 ‘당연히 앨런이지’라고 그녀가 답한 다음날 그는 자립한다며 떠나버렸다.
원래 가신들은 홀로서기를 할 수 없어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다양한 지원을 받는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독립하지 못한다.
하지만 에드먼드 후작은 고위 귀족이었고, 상단 일로 꽤 많은 부를 축적했기에 쉽게 자립할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과 같다.
발트레를 떠나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가문을 앨런 그 쓰레기와 맞바꾼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의 내가 한 짓은 눈 뜨고 못 보겠어.’
쪽팔려.
마음 같아서는 에드먼드 상단 근처에도 오고 싶지 않지만 자존심이 대수인가.
사업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에게 사기를 치지 않을 정도로 정직한 상단은 여기뿐이었다. 돈을 벌어 먼치킨 캐가 되려면 이 정도 부끄러움은 감수해야 한다.
‘후작은 없을 거야.’
에드먼드 상단에서 부동산은, 취미로 다루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소한 사업이었다.
그러니 후작가의 사람보다는 상단원만 있을 확률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