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팔지 않는다고 말 바꿀까 봐 겁나니까 얼른 받아.”
그녀의 말에 리암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 저는 모릅니다. 나중에 환불해 달라고 하셔도 못 해드립니다.”
“환불을 해? 누가? 내가?”
“…….”
“절대 그럴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당장 처리해 줘. 나는 내 땅을 한시라도 빨리 가지고 싶거든.”
“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리암이 설렁줄을 흔들자 가게 안쪽에 있던 상단원 한 명이 밖에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소후작님?”
“거래가 성사되었다. 은행에 수표를 넣고 와.”
“알겠습니다.”
상단원은 수표를 들고 은행으로 사라졌다.
수표를 사용해 계좌에서 5억 르블라를 빼내면, 모든 능력치가 감소하여 비실댈 것이다.
‘그전에 돌아가야겠네.’
알트페리아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
“릴리.”
존대를 관둔 리암이 그녀를 옛 애칭으로 불렀다.
“거래가 끝났으니까 이제 사적인 이야기를 해도 될까?”
리암의 태도가 변했다. 알트페리아에겐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그는 두꺼운 안경을 벗고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모두 쓸어 올렸다.
안경에 가려졌던 서글서글한 녹색 눈이 드러났다.
다정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루크의 눈앞에 성좌가 보낸 푸른 알람창이 떴다.
[‘흑화한 염룡’이 자신의 취향이라고 합니다.]
[‘사자의 서기관’이 제법 강적이라고 합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루크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자의 서기관’이 루크에게 없는 반전미 속성을 가졌다고 덧붙입니다.]
눈높은 성좌들이 반응하다니.
루크는 성좌들이 리암을 인정한 점이 못마땅했다.
리암의 시선은 그런 루크의 존재를 무시한 채 알트페리아에게만 향했다.
“아버지의 등쌀에 밀려 급하게 발트레를 떠나오느라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잖아. 그간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이제야 궁금해졌어?”
“발트레를 떠난 다음날부터…… 궁금해져서 편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더라.”
“뭐? 나한테 편지를 보냈다고?”
“그래, 몇 통을 보냈는지 모르겠어.”
“나야말로 수십 통을 보냈는데 답장 하나 못 받았다고! 물론 리암의 편지는 한 통도 받지 못했어.”
그 말에 리암과 루크 둘 다 입매를 굳혔다.
리암이야 제 편지가 사라졌으니 놀랄 법한데 루크는 왜?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생각을 정리한 리암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편지를 중간에서 누군가 가로챈 거 같은데?”
“뻔하지. 후작님이시겠지.”
“맞아, 아버지가 그랬을 거야.”
리암이 무시한 게 아니구나.
에드먼드 후작만큼이나 리암도 자신에게 크게 실망해서 연락조차 하기 싫어진 줄 알았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리암은 친오빠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마치 가위로 잘라내듯 인연을 끊어버리자 서운했었다.
오해가 풀리자 마음의 짐이 하나 덜어지는 기분에 속이 시원해진 알트페리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기분이 풀린 것을 확인한 리암이 나른하게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청혼받았다며. 작위도 넘길 거야?”
리암의 질문에 루크가 끼어들었다.
“공작 작위는 공녀님의 것입니다.”
“그쪽에게 물은 것이 아닌데.”
“저를 바라보며 물으시길래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릴리의 대답이 듣고 싶어.”
“대답은 같습니다. 더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바라봤다.
절대로 좋은 의미가 아니라, 눈으로 서로를 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트페리아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날카로운 기류를 눈치챘다.
‘왜 나를 두고 싸우는 거야?’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던 참에, 전생에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은 까닭일까. 촉이 하나 왔다.
리암은 자신이 어떤 남자를 데려와도 별로라며 내치는 친정 가족 포지션이고, 루크는 자신과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외간 남자가 마음에 들지않는 것이다.
양쪽 다 성을 내는 이유를 알겠지만, 어느 쪽 편도 들어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리암은 진짜 가족이지만, 루크의 눈에는 외간 남자가 맞다.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있으니까 질투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또 에드먼드 후작의 상단은 꼭 필요하기에 리암에게도 밉보일 수 없었다.
후우, 이런 인기는 필요 없는데.
곤란할 때는 뭐다?
‘도망친다.’
오늘의 목적 달성도 다 했으니까.
“아, 머리가…….”
알트페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루크 쪽으로 픽 쓰러졌다.
“공녀님!”
뛰어난 소드마스터인 루크는 알트페리아를 재빠르게 받아 들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눈을 감기 전, 그녀는 순간 루크의 표정을 보았다.
명연기에 속아 넘어간 그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크의 품에 안긴 알트페리아는 강렬하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속이는 것이 미안해져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겠다 싶었다.
“너무 어지러워요. 이만 돌아가요…….”
그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아마 맞은편에 있는 리암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양이었다.
‘아 씨,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아.’
리암과 지낸 햇수는 자신의 나이랑 맞먹는다.
그렇다 보니까 연기 같은 건 금방 들통날 것이다.
그 때였다.
[<시스템> 500,000,000 르블라가 감소했습니다!]
[<시스템> 현재 보유 재산: 490,000,000 르블라]
[<시스템>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수표가 입금되어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크게 울리는 느낌이 들더니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알트페리아의 몸에서 열이 올랐다.
그것을 느낀 루크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곁에서 그 모습을 보던 리암이 손을 뻗었다.
“하긴, 릴리는 어릴 때부터 종종 열이 올라서 쓰러진 적이 많았지. 어디, 열 좀 재볼게.”
탁, 루크가 리암의 손을 쳐냈다.
두 남자의 사나운 시선이 닿았다.
“제 약혼녀가 매우 피곤한 듯하여,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공녀님, 실례하겠습니다.”
리암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루크는 알트페리아를 번쩍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알트페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욱신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두통이 심하지만, 그래도 각성 직후처럼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번에 정신을 잃고 며칠 내내 앓았던 건 각성의 여파가 더해져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5억 르블라 감소의 고통 강도를 따지자면 생리통 심한 날이랑 맞먹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진통제를 먹으면 괜찮겠는데.’
알트페리아의 안색을 살피던 루크가 말했다.
“발트레 저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안 돼!
이대로 돌아가면 세이룬이 루크를 더더욱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레이 호텔로 가요.”
“하지만…….”
진짜 큰일 날 것 같으면 당장 은행에 가서 발트레 저택을 담보 잡혀서라도 대출받아 계좌를 채워놨을 건데 이 정도는 버틸 만했다.
“두통만 심하니까, 진통제를 먹고 쉬면 가라앉을 거예요. 그레이 호텔로 가주세요.”
세이룬의 눈을 피하는 건 물론, 거리상으로도 그레이 호텔이 훨씬 가까웠다.
“알겠습니다.”
루크는 마지못해 그레이 호텔로 향하는 마차를 붙잡았다.
마차를 타기 위해 알트페리아를 부축하던 루크는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 부동산 건물 2층에서 궐련을 피우며 내려다보는 리암과 눈이 마주쳤다.
성좌가 미모를 인정한 남자는 경계해야 했다.
알트페리아는 아름다운 걸 좋아하니까.
루크는 그녀를 바라보는 듯한 그를 사납게 노려보며 마차에 올라탔다.
* * *
그레이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루크는 진통제를 찾아 알트페리아에게 건넸다.
자신이 전쟁 중에 다쳤을 때 사용한 진통제로 현대의 약에 비해서는 효과가 느리다는 말도 덧붙였다.
알트페리아는 효과를 볼 때까진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기로 했다.
한숨 돌리는 알트페리아의 곁에 있던 루크의 표정이 어두웠다.
생각에 빠졌는지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의 눈빛이 마치 각오를 끝마친 사람처럼 매서워졌다.
“지니신 스킬 때문에 쓰러지신 겁니까?”
“정확히는 땅값을 내서예요. 10억 르블라 이하면 모든 능력치가 하락한다고 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며칠간 자리를 비울 테니, 한동안 공녀님을 뵙지 못할 겁니다.”
응? 갑자기 왜?
조만간 결혼식도 진행해야 한단 말이야.
“어딜 가시려고요?”
“5억 르블라 정도면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약발이 슬슬 도는지 찌르는 듯한 두통이 조금 가셔서 이것저것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말하는 걸 보면 돈을 벌러 가려는 모양인데, 단시간에 큰돈을 마련할 수 있는 건 불법적인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세요. 무엇을 해서 돈을 벌어 오실 생각이에요.”
제 속마음을 들킨 그는 살짝 기가 죽은 채로 답했다.
“그저…… 몸으로 때우는 일입니다.”
제대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를 만나지도 못한다는 거예요.”
똑바로 설명해!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는데, 일을 시작한 후에는 한동안 갇혀 지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루크는 돈 버는 방법을 밤낮으로 알아봤다고 설명했다.
밤늦게 나가 자리를 비웠다더니, 내가 걱정되어 돈을 벌기 위해 조사를 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원작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