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여긴 어디야?’
하늘이 붉었다.
고층빌딩은 다 무너졌고, 길가에는 부서진 자동차가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종말을 맞이한 듯한 세계였다.
“제발…….”
마치 막바지에 몰려 신에 기대 목숨을 구걸하는 듯한 간절한 목소리가 들린다.
알트페리아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
익숙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세상 불행을 다 짊어졌어도 무덤덤하게 버티던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끌어안았다.
슬픔에 짓눌린 그가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그에게 새로운 짐을 더해주기만 할 뿐일 것이다.
‘그건 싫은데.’
이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한단 말이야.
미소를 짓고 싶었다.
나는 너를 구해 만족한다고.
괜찮다는 뜻을 보여주고 싶지만, 온몸이 너무나도 아파서 미소는커녕 자꾸만 얼굴이 찌푸려졌다.
남자가 통곡한다. 그의 서글픈 감정이 전해진다.
온갖 슬픔이 뒤섞여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 * *
“…….”
알트페리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자신의 방을 바라보자 꿈에 대한 기억이 점점 옅어졌다.
그 때였다.
[<시스템> 특수효과가 발동됩니다!]
푸른 빛과 함께 나타난 알람에 눈이 번쩍 뜨였다.
원작에서도 특수효과는 일정한 확률로 발동되었다.
‘내가 가진 스킬은 재산과 관련된 거잖아.’
복권 1등 당첨! 이자율 증가!
이런 걸 주지 않을까?
알트페리아는 잔뜩 기대되는 마음에 두근두근, 다음 알람을 기다렸다.
빠바밤―!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요란한 음악 소리가 기대감을 한껏 증폭시켰다.
[<시스템> 일정한 확률로 오늘의 운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다.
‘장난해?’
아니, 스킬은 모든 능력치가 하락한다는 희한한 걸 주더니 특수효과마저 이따위냐?
어이가 없어진 알트페리아는 베개를 집어 알람창에 휙 던졌다.
하지만 알람창은 마치 누가 조종하는 것처럼 날아오는 베개를 휙 피했다.
저거 아무래도 누군가 조종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째려보고 있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알람창이 제 할 말을 내뱉었다.
[<시스템> 오늘의 운세 ― 운명의 상대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대체 운명의 상대가 뭐란 말인가.
보통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얼굴이 새빨개지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운명의 상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원작에서 말하길, 시스템은 사람 가지고 놀기를 좋아한단다.
무슨 말장난을 쳤을지 모르니까 제대로 알아야 했다.
알트페리아의 침대에는 베개가 여럿 놓여 있었다.
그녀는 양손에 베개를 하나씩 들어 올리며 성난 황소의 눈으로 시스템창을 노려봤다.
심상치 않은 살기를 느낀 건지 시스템창이 놀란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방 안에 있는 물건을 죄다 던지면 한 번쯤은 맞지 않을까 싶은데.”
[<시스템> ……!]
“상태창은 내 서포터 시스템이라고 했어. 도움이 될 거면 제대로 설명해.”
기어이 맞히고 말겠다는 의지를 느꼈는지 시스템창이 깜빡깜빡했다.
왠지 땀을 흘리며 쩔쩔거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특수효과: 오늘의 운세]
오늘 하루 당신과 운명이 연결된 사람은 둘입니다.
운명적인 사랑을 할 상대 1.
운명적인 결투를 할 상대 1.
―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사랑과 결투?
게다가 만날지도 모른다고?
그 말은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이다.
알트페리아는 시스템창을 노려봤다.
“그 상대를 알아보는 방법은 있어?”
[<시스템> 운명의 상대가 당신을 발견한 순간 알람이 옵니다!]
요컨대 운명의 상대가 자신을 보는 즉시 알 수 있단 것이다.
사랑이라…….
누군지 모르겠지만 재수 없게 앨런 같은 걸 만났다가, 운명의 상대가 되면 골치 아프다.
게다가 결투는 뭔데.
르블레아의 결투는 진검승부다.
검도 들지 못하는 이 허약한 몸으로 어떻게 싸우라고.
운세 좋아하네.
알트페리아는 저주가 내려졌다고 느꼈다.
침대에 털퍼덕 앉은 그녀는 시스템창을 노려보며 생각에 빠졌다.
“결정했어.”
운명의 상대는 오늘 하루 연결되어 있단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아무도 만나지 않기로 했다.
알트페리아는 혼자 있고 싶다고, 시녀도 물리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이대로 쭉 자야지.’
앓아 드러누웠을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쉰 적도 없으니까 오늘 하루 뒹굴뒹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실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을 맞이한 세이룬이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두드렸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의 시종이 공녀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건드리지 마, 오늘 하루 방에 틀어박혀 있을 거야.
그렇게 내뱉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황제의 시종을 그렇게 거부할 순 없었다.
온 세상이 자신을 방해하는 기분에 알트페리아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안 돼, 표정 관리.’
시종에게 보인 모습은 황제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간다.
싫어도 싫은 티를 내면 안 됐다.
응접실에서는 황궁의 시종이라는 의미의 정복을 입은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저 시종이 운명의 상대는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시스템을 만드는 놈은 양심이 없는 것이다.
마음을 정리한 알트페리아는 완벽한 미소로 시종을 맞이했다.
“폐하의 시종이라지?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걸까?”
사실 궁금하지 않으니까 그냥 돌아가 줘.
아니, 차라리 그냥 내일 와.
알트페리아의 속마음을 모르는 시종이 사무적인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폐하께서 독대 시간을 나누고 싶다며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알트페리아는 화들짝 놀란 듯, 벌어진 입을 한 손으로 가렸다.
“폐하께서 나를 찾으신다고?”
황제에게 초대받는 일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깜짝 놀란 척하고 있지만.
‘사실 예상은 했어.’
한 번쯤은 황제가 자신을 찾을 거라고.
황제는 공을 세우는 루크의 소식이 제도에 퍼질 때마다 그를 탐냈다.
그래서 귀환하는 대로 사위로 들여서 손에 넣을 생각이었는데 자신에게 청혼하는 바람에 루크를 놓치고 말았다.
심지어 루크가 청혼한 상대는 북부의 영주인 발트레 가문의 후계자.
황제로서는 대영주가 전쟁의 영웅까지 손에 넣으니 거슬릴 것이다.
굳이 황실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를 뵙게 되다니, 영광이야. 감사드려야겠구나. 당장 입궁 준비를 할 테니 기다리거라.”
“예, 공녀님.”
운명의 상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은 만큼 저택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하지만 저택 밖으로 나가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인 만큼 이득을 취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었지.’
그녀는 끌어갈 대화의 내용을 정하고, 치장을 끝낸 뒤 시종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마차에 오른 알트페리아는 가져온 부채를 펼쳤다.
평소보다 크기가 큰 부채는 그녀의 얼굴을 대부분 가렸다.
운명의 상대 효과는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면 발동된다고 한다.
얼굴만 가린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나쁠 건 없었다.
‘황궁에 가서도 조심해야지.’
어지간하면 사람을 만나지 않게 피해 다녀야 할 듯했다.
* * *
한편, 황궁에서는 그랑힐데 공작 부인인 힐다와 황제가 독대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승리에는 그랑힐데 공자의 공이 컸다.”
그랑힐데 공자라는 말에 힐다는 볼 안쪽 살을 잘근 씹었다.
마음 같아서는 평소 지칭하는 대로 천것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 앞이라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황제 폐하께 쓰임이 되어 기쁩니다.”
“짐은 공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다.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해내리라 믿는다.”
더러운 사생아가 황제가 기대하는 인재가 되었다.
모든 주목은 제 아들인 첫째 일레이저가 가져가야 하는데.
하찮은 사생아의 핏줄이 섞인 놈이 아니라!
힐다는 불편한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뜨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제 편지는 받으셨습니까, 폐하?”
황제가 근처에 내려놓은 힐다의 편지를 들어 올렸다.
“오늘 아침에 읽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인가?”
편지의 내용은 루크와 그를 따르는 그랑힐데의 기사에 관한 것이었다.
루크가 공을 세운 만큼, 그가 통솔한 기사들의 위용 역시 덩달아 만만치 않아졌다.
오랜 전쟁의 참가로 능숙한 실력까지 갖춘 그들이 모두 그랑힐데를 떠나 루크를 따른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예, 사실이옵니다. 자칫하면 오랜 시간 유지되던 공작 가문의 균형이 깨질까 염려되옵니다.”
4대 공작 가문의 힘은 균등했다.
대영주인 그들이 운영할 수 있는 기사 수를 황실에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랑힐데에서 빠져나간 만큼 발트레에 더해진다?
물론 발트레의 백영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어 기사단의 수 제한에 걸리지는 않지만, 세력이 커지는 것은 확실했다.
다른 공작들은 물론 황제도 싫어할 만하다.
그래서 힐다는 이 정보를 일부러 황제에게 흘렸다.
루크가 발트레 공작가를 등에 업는 것을 막기 위함은 물론, 알트페리아 그 얄미운 계집이 이득을 보는 것도 싫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