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원작에서는 루크가 포상금을 힐다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동료들의 합류 시기가 늦었다.
이번에는 포상금을 안전하게 지켰으니까 그들이 루크를 따라 발트레에 올 확률이 높았다.
‘생각하지도 못했네.’
그랑힐데는 루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포상금 외의 재산 같은 건 보유하지 않고 있어 몸만 오면 끝날 줄 알았다.
줄줄이 딸린 객식구가 있었구나.
‘상당히 강하다던데.’
다시 밑바닥부터 백영을 키워야 할 생각에 막막했는데 잘 훈련된 기사들이 온다면 이득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세 번의 영지전을 버티지 못한 발트레의 백영은 해체된 상태다.
‘우리 힘 다 잃었어요’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간 새로운 적만 나타날 게 뻔하기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만 않았을 뿐.
그렇기에 다른 공작 가문은 발트레의 기사단이 겉으로 보기에 온전해서 저러는 거였다.
명분 싸움이니 백영이 해체된 걸 공식으로 발표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힘이 약해진 걸 떠벌릴 수야 없지.’
외부에 발트레가 더욱 튼튼해졌다고 알려져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그랑힐데는 무력이 뛰어난 가문이었다. 그런 그랑힐데 기사들이 합류하면 레번트는 알아서 겁을 먹어 물러날 테지.
그러니 황제에게는 말을 잘해야 한다.
“폐하, 북부가 힘을 기르는 건 국경을 마주하는 적과 마물 때문입니다. 저희의 적은 그들이옵니다.”
“발트레의 소명은 잊지 않았구나. 하나 주군으로서 다른 공작 가문의 입장도 생각해 봐야 한다.”
다른 가문의 핑계를 대지만 사실 황제도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공작 가문의 의견 같은 건 알 필요 없었다.
그냥 황제 하나만 설득하면 끝나니까.
“발트레에 폐하께 받은 소명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 다른 공작들은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
“그래서 감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북부는 영주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더는 방치할 수 없지요.”
“…….”
“제가 충실한 신하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폐하께서 작위를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발트레의 후계자는 자신뿐이었다.
스스로 임명식을 개최하여 작위를 물려받으면 곧바로 공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맡기면 공작이 되기까지 시간이 꽤 소요될 것이다.
‘당장 필요한 건 작위가 아니야.’
황실과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대영주에게 작위를 직접 내려주라는 건, 황제로서도 꽤 끌리는 제안일 것이다.
작위를 받는 대영주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으로 보일 테고 위신이 서니까.
물론 남은 공작 가문들은 대영주가 황제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모양이라 싫어할 거지만, 알 바인가?
“괜찮은 제안이구나. 하나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라도 있느냐?”
“저는 작위를 물려주실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자리를 폐하께서 맡아주신다면 큰 영광입니다.”
“짐이 미처 배려하지 못하였군. 좋다, 짐이 맡아주도록 하지.”
황제는 만족해 하며 기록관을 불러 작위 계승식의 날짜를 곧바로 잡았다.
준비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몇 달을 기다려야 하지만 꽤 좋은 날을 잡아줬다.
황제 또한 작위 수여식을 기대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발트레 공녀와 영웅의 결혼식에는 선물과 함께 시종을 보내도록 하지.”
황제가 직접 나서서 루크와의 결혼을 축하해 준다고도 했다.
휴우, 이로써 한 건 해결.
이제 서둘러 결혼하고, 드래곤의 봉인이 깨어나기만을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
깔끔하다.
……지금 당장은 여기저기 퍼져 있는 인간 지뢰들을 피해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조심해야지.’
사랑과 결투의 상대를 만나지 않도록.
알현실에서 나온 알트페리아는 챙겨 온 부채를 촥 펼쳐 얼굴을 가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안내를 해줬던 시종을 따라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시스템> 운명의 상대 A를 발견하였습니다!]
[<시스템> 운명의 상대 B를 발견하였습니다!]
거지 같은 시스템창이 떴다.
무려 두 개나.
운명의 상대를 둘 다 찾았다는 뜻이었다.
* * *
루크는 알트페리아에게 연락을 받았다.
<결혼식 날짜를 잡았어요.
식은 따로 사람을 초대하지 않고 저희끼리만 진행할 거예요.
결혼식 준비는 제가 할 테니 공자님은 몸만 오세요!>
그녀의 필체는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고양이를 닮은 듯한 그녀의 눈매가 떠올라 괜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루크는 알트페리아의 필체를 음미하며 몇 번이고 편지를 다시 읽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유진이 입을 열었다.
“몇 번을 읽으시는 겁니까? 종이 뚫리겠습니다.”
“…….”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길래 그리 헤벌쭉 하시는 겁니까?”
기쁜 일이라 유진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공녀님께서 결혼식 날짜를 잡으셨답니다.”
곁에서 소식을 들은 유진이 감동한 듯 두 눈을 반짝였다.
“대장! 드디어 결혼하시는 겁니까!”
“…….”
“저는 사실 대장이 평생 연애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대장께서 워낙에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 말입니다.”
동년배의 이성이 다가오면 한 번쯤 눈길도 주고, 괜스레 말도 걸어보고, 아니면 부끄러워서 뻣뻣하게 있든가 한다.
하지만 루크는 달랐다.
“이름은 모르지만, 한눈에 반했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당신을 보고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을 느꼈어요. 책임져 주세요.”
전장에서 굴러 꼬질꼬질해져도 루크의 미모는 숨길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발견한 주민들은 루크의 정체도 모르고, 냅다 청혼을 날리기도 했다.
상대가 저 정도로 관심을 보이면 조금이라도 반응할 법도 한데.
루크는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것 같은 시선과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목소리로.
“거절합니다.”
단 한 마디를 내뱉고 사라지기 바빴다.
곁에서 듣는 자신이 다 민망할 정도로 매몰찼었다.
회상을 하던 유진이 중얼거렸다.
“하도 반응이 없으셔서 남자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공녀님 정도의 미인이 아니면 반응하시지 않는 거였지 말입니다.”
[‘사자의 서기관’이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며 맞장구를 칩니다.]
[‘흑화한 염룡’이 알트페리아의 미모가 눈부신 건 인정한다고 합니다.]
루크의 기분이 묘해졌다.
사자의 서기관의 말을 쓸데없다고,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흑화한 염룡의 말은 맞기 때문이었다.
감히 평가할 순 없지만, 알트페리아보다 빼어난 사람은 없다.
초월자들까지 다 포함해서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명계의 지배자’가 진짜 결혼할 거냐고 묻습니다.]
“예.”
[‘명계의 지배자’가 무척 충격이라고 합니다.]
[‘흑화한 염룡’이 루크의 행복 지수 수치를 확인하라고 합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루크의 행복 지수를 확인합니다…….]
[‘명계의 지배자’가 루크가 행복하다면 OK라고 합니다.]
괜한 소리를 하면 한동안 차단해 버릴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 성좌들의 알람창을 모르는 유진이 말했다.
“날짜도 잡혔으니, 대장도 한동안은 결혼 준비를 하시느라 바쁘겠습니다.”
루크는 말이 없어졌다.
유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설마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신 겁니까?”
“따로 지시하신 건 없습니다.”
그저 몸만 오라고 했을 뿐.
유진이 말했다.
“옷은 준비하셨습니까?”
“공녀님께서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식장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공녀님께서 신전에 연락을 넣어두셨다고 합니다.”
“대장……. 너무 몸만 가시는 거 아닙니까?”
양심이 있으신지?
유진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왠지 이대로 몸만 덜렁 갔다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파혼당할 것 같았다. 그건 곤란했다.
‘솔직히 우리 대장 얼굴은 쓸 만해.’
몸도 괜찮고.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요리도 만들 줄 안다.
하지만 장점은 이걸로 끝이다.
단점을 꼽아보자면 사생아라고 귀족들은 무시하지, 포상금을 힐다에게 빼앗길 뻔할 정도로 귀족 사회에 대해 잘 모르고, 그랑힐데에서 심심하면 암살자를 선물로 보낸다.
암살자 공격은 발트레에 가서도 계속되겠지.
어떻게든 예쁜 짓을 추가로 더 시켜야 할 듯했다.
‘뭘 시키지?’
그렇게 유진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루크가 입을 열었다.
“사실 준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결혼반지를 준비해 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