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에델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내가 한 경고는 그새 잊었어?”
기사가 아니라 여자로 보면 죽여버린다고 경고했었는데.
화가 난 그녀는 존대도 때려치우고 살벌하게 그를 노려봤다.
“나를 쓰러뜨린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오. 이렇게 멋진 여자는 처음 봤으니 부디 저와 사귀어주시오!”
그 때였다. 얌전히 앉아 있던 리베르트가 총알처럼 튀어 나간 것은.
“잠깐! 넘보지 마십시오. 에델은 제 사람입니다!”
심사를 맡은 시종은 경기 종료를 알렸었다.
그러니 훈련장에 다른 사람이 올라가는 건 상관없긴 하지만, 느닷없이 벌어진 삼각관계에 당황한 시종이 얼어붙었다.
반면 경비대원들은 흥미진진한 상황에 얼른 하나를 선택하라며, 응원까지 보내고 난리였다.
리베르트는 에델의 손을 꽉 붙잡으며 데이모스를 노려봤고, 에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리베르트를 바라봤다.
음, 개판이군.
알트페리아는 세이룬을 데리고 천천히 훈련장으로 향했다.
한 여자를 두고 서로를 사납게 노려보는 두 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시종이 알트페리아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를 쟁취하신 발트레 공녀십니다!”
“내가 직접 한마디 해도 될까?”
“예, 물론이죠!”
시종은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아티팩트를 알트페리아에게 건넸다.
아, 아, 목소리를 테스트한 알트페리아가 말했다.
“이번 결투는 내가 알고 있는 공작 부인의 비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힐다의 매서운 시선이 알트페리아에게 꽂혔다.
패배의 쓴맛을 봐서 속이 쓰리긴 하지만, 사실 이 결투는 승리든 패배든 힐다에게 이득이었다.
애초에 승패를 다 생각하고 던진 결투장이었으니까.
승리하면, 명예를 더럽힌 알트페리아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혹여 패배하여 알트페리아가 암살 시도를 폭로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암살을 시도한 증거가 없으니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신을 암살범으로 몰아갔다가는 도리어 알트페리아만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래, 차라리 밝히렴.’
거짓말쟁이 공녀라는 꼬리표가 붙어 아무도 너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
“남의 비밀은 함부로 폭로하는 게 아닌 듯하다. 그러니 공작 부인의 비밀은 내 마음속에 고이 보관하지!”
알트페리아는 힐다의 죄를 폭로하는 대신 지켜주는 쪽을 선택했다.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던 힐다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 * *
실력이 좋기로 소문난 드레스 살롱은 여인들이 모여 하나의 사교계장을 만들었다.
옷을 맞추러 온 부인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발트레 공녀가 알고 있다는 그랑힐데 공작 부인의 비밀이 대체 뭘까요?”
“무엇인진 정확히 모르지만…… 왠지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요.”
“하긴, 그랑힐데는 뒤숭숭한 일이 있었죠.”
멀쩡하던 그랑힐데 공작이 하루아침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대체 뭐길래 결투까지 해가며 비밀을 지키려고 애쓰는 걸까요. 너무 궁금해요.”
“분명히 아주 큰일일 건데 말이에요.”
“발트레 공녀가 그랑힐데의 공자에게 청혼받았으니, 그에게서 들은 것일까요?”
너무나도 궁금하지만 알트페리아가 입을 다문 덕분에 비밀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하지만 알트페리아가 힐다의 큰 비밀을 알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알트페리아가 루크에게서 들은 힐다의 비밀을 목줄처럼 쥐고 흔드는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알트페리아가 붙잡은 목줄이 어떤 일을 벌일지 귀족들의 온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딸랑―
그 때 맑은 종소리와 함께 살롱의 문이 열리며, 화려한 인상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랑힐데 공작 부인이었다.
“어머, 그랑힐데 공작 부인!”
열심히 힐다의 이야기를 나누던 부인들은 입을 꾹 다물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재빠르게 배시시 웃으며 힐다를 맞이했다.
“그랑힐데 공작 부인 아니신가요.”
“오랜만에 뵙네요.”
힐다는 부인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을 다 보았다.
저렇게 대놓고 놀라는 걸 보면, 조금 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리라.
‘그놈의 비밀에 관해 이야기했겠지!’
제도에 떠도는 소문은 이미 힐다의 귀에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증거도 없으면서 나를 죄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속 시원하게 밝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암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는 아예 나오지 않는 것이 좋으니까.
알트페리아를 떠올리자 속이 쓰렸다.
자신의 말이 나도는 걸 뻔히 아는데도 밖에 나와야 하는 상황도 짜증스러웠다.
공작 부인 정도라면 디자이너를 저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그녀가 살롱을 직접 찾은 이유는 소문 때문이었다.
저택에 틀어박히면 알트페리아를 그만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당당하게 나섰지만, 위염만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억지로 외출을 끝마친 힐다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아픈 배를 손으로 짚었다.
“윽!”
“공작 부인, 괜찮으십니까!”
속 쓰림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의원을 불러봤자 하는 이야기라고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셔서 그렇습니다. 안정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쉬고 싶지만, 무엇을 해도 혹여 남아 있을지 모르는 암살 시도의 증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증거가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혹여 존재라도 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 없애야 했다.
힐다는 아픈 배를 부여잡으며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랑힐데의 집사가 힐다를 찾아왔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부인.”
“흑표범단에게 일러. 한시라도 빨리 결과를 내놓으라고!”
“부인의 요청대로 매일 독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재촉했다가는 의뢰를 파기할지도 모릅니다…….”
“제국 제일의 정보 길드라면서, 대체 뭘 하는 건지!”
배가 더 아파졌다.
비틀거리던 힐다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알트페리아.
그 계집이 천것과 함께한 뒤로 되는 일이 없었다.
* * *
힐다와 결투를 치른 지 며칠이 지났다.
그사이 알트페리아는 하루 정도 앓았다.
흑표범단에 힐다에 관한 의뢰를 넣고 착수금을 냈더니.
[<시스템> 20,000,000 르블라가 감소하였습니다!]
[<시스템> 현재 보유 재산: 470,000,000 르블라]
[<시스템>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능력치가 더욱 하락해 침대에 찰싹 붙어 있게 되었다.
두통이야 하루 시달리니 가라앉았지만, 문제는 체력이 전보다 약해졌다는 것이다.
‘이러다가 걷지도 못하는 거 아냐?’
알트페리아는 점점 심각해지는 몸 상태에 위기감을 느꼈다.
드래곤의 봉인이 풀릴 때까지는 큰 지출을 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야 할 듯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낫네.’
두통이 가시니까 몸이 가볍게 느껴져 외출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알트페리아는 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읽었다.
<그랑힐데 공작 부인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비밀이란?!>
<발트레 공녀의 진짜 승리.>
며칠 내내 신문의 상태가 저랬다.
‘공작 부인의 속이 더 쓰리겠네?’
위염도 획득했다더니, 더 심해지는 게 아닐지 몰라.
그러게 루크 좀 가만두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루크는 그랑힐데 공작 작위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데.
제 아들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어릴 때부터 학대하고, 전쟁터에 밀어 넣고, 포상금을 빼앗으려 하고.
거기다 결혼까지 훼방 놓기 위하여 황제에게 고자질까지 했다.
힐다가 적으로 돌아선 이상, 알트페리아는 가만있을 생각이 없었다.
신문을 다 읽은 알트페리아는 날짜를 확인했다. 이제 결혼까지는 앞으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결혼식 준비는 대강 끝나가고, 막상 할 일이 없었다.
드래곤의 봉인이 풀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전부니까.
빵빵하게 부푼 깃털베개를 가슴 위에 올려 끌어안으며 뒹굴뒹굴하던 알트페리아가 중얼거렸다.
“공자를 만나러 갈까?”
루크를 만나지 못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아직 결혼하기 전이라 루크는 그랑힐데 소속이었다.
결투장에 들어가면 그랑힐데의 자리에 앉아야 하므로 결투에도 불참하였다.
결투가 끝나고 승패에 관한 내용은 편지로 써서 루크에게 보내줬다.
그래서 문제였다.
직접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있는데 편지로 해결한 것이.
‘……생각해 보니 꽤 오래 만나지 못한 것 같은데?’
뭔가 허전한데.
최근 일상에 그가 당연하게 곁에 있었어서 그런가, 빈자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루크를 부를까 하다가 한 번쯤은 그를 만나러 직접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트페리아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루크에게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낸 뒤 빠르게 채비하기 시작했다.
루크에게 편지를 종종 보내서 그가 몇 호에 묵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레이 호텔의 가장 높은 층을 찾은 알트페리아는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끼익―
‘어라, 문이 열려 있네?’
잠가두지 않았는지 슬쩍 쳤을 뿐인데도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실례할게요.”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고 외출 준비를 했다. 편지가 충분히 도착했을 시간이기 때문에 절차상 문제는 없어 그녀는 열린 문을 통해 슬쩍 들어갔다.
귀족이 사용하는 호텔 룸은 하나의 저택처럼 긴 복도와 함께 방 여러 개가 함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기억에 의존하여 루크의 침실 쪽으로 향했다.
끼익―
침실 방문도 잠기지 않았다.
‘너무 조심성 없는 거 아냐?’
아무리 제국 제일가는 검사라고 하지만,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