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개선식에 참여한 영애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들은 그랑힐데 공자를 만나보신 거예요?”
“개선식에서 봤는데요, 그냥 근사한 정도가 아니라 예술품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아요.”
“정말요?”
개선식에 참여한 영애 둘은 열심히 루크에 관해 설명해 줬지만,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영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때였다.
“그랑힐데 공자시군요. 테라스 자리를 예약해 뒀습니다.”
그랑힐데 공자라고?
첫째는 그랑힐데의 영지에 있으니까 제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차남인 루크였다.
발트레 공녀에게 청혼한 전장의 괴물!
개선식에 참여하지 못한 영애는 입구를 흘끗거렸고, 곧 루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예술품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는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빤히 바라보는 건 실례였지만, 눈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예술품 감상은 괜찮지 않은가?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란히 선 발트레 공녀에게도 시선이 절로 갔다. 그들은 서로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곁에 계신 분은 발트레 공녀죠?”
“맞아요.”
“확 달라져서 몰라볼 뻔했어요.”
앨런에게 바람맞아 홀로 덩그러니 찻집에 앉아 있던 알트페리아에게서는 보기만 해도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루크와 함께 있는 알트페리아는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빛나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그녀의 곁에 선, 루크는 부드러운 미소로 알트페리아를 내려다봤다.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루크는 제게 팔짱을 낀 알트페리아의 손을 살며시 붙잡으며 자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녀를 먼저 자리에 앉힌 후 맞은편에 앉았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거대한 창문이 있는 테라스였는데 봄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꽃을 부케같이 둥글게 모아 장식한 테라스는 잘 꾸며진 무대 같아 보였다.
루크와 알트페리아를 지켜보던 영애가 함께 온 사람들에게 속삭였다.
“저기는 그 자리잖아요.”
“아! 그런데 공자는 이미 청혼했을 텐데요?”
사교계 시즌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러포즈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둔 곳이었다.
확 트인 공간은 아름답게 꾸며져 주목받기 좋았지만 사실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면 사교계에서 망신당하기 딱 좋으니까.
약혼한 사이나 곧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이 데이트 장소로 간혹 예약할 정도였다.
“저 상자는?”
“꺅, 반지를 전해드리려나 봐요. 제가 다 설레네요.”
다들 저곳에서 청혼받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하트가 퐁퐁 날리는 그들을 보는 영애들은 알트페리아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 * *
“어떻습니까. 사이가 좋은 연인 같아 보일까요?”
이제 그는 시키지 않아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래서 문제였다.
전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제 그의 뜨거운 눈빛을 보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니까.
그녀는 제 마음이 무엇인지 알았다.
루크를 향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을 피한 알트페리아는 찻집을 둘러봤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꽂혀 있었다.
이제 자신들의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보인다.
조금 닿기만 해도 뻣뻣하게 굳던 그가 이렇게까지 발전하다니.
“네, 그러네요. 잘하셨어요.”
루크의 손이 알트페리아의 손등을 덮었다.
“사실 칭찬받을 일이 더 있습니다.”
루크가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한 손에 꼭 들어올 만한 작은 크기였다.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 재잘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아직 열지 않았지만, 상자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알트페리아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덩달아 그의 손에 붙잡힌 알트페리아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녀의 작은 반응을 알아차린 루크가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상자를 양손으로 펼쳐 반지를 꺼냈다.
“청혼할 때 반지를 준비하지 않은 점이 계속 걸려서 준비했습니다.”
새하얀 백금으로 된 링에 맑은 푸른빛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귀족으로 나고 자란 알트페리아는 수많은 보석을 접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반지의 보석은 처음 보는 거였다.
처음 접하지만…… 찬란한 광택을 머금은 빛깔을 보자 어떤 물건인지 알았다.
황족만이 지니는 행운의 별로 만든 반지였다.
원작에서는 2황자가 루크에게 행운의 별을 줬었지.
언젠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선물로 주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루크는 그 누구에게도 행운의 별을 주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원작에선 찾지 못했던 소중한 여자를 이번에는 발견했다는 뜻이었다.
아, 또다.
알트페리아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목 안쪽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달뜬 기분을 느낀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사실 저도 반지를 준비했긴 했어요. 그냥 구색을 갖추려고 준비한 거라 행운의 별에 미치지 못해요. 부끄럽네요.”
“알아보시는군요. 사양은 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
“손을 내어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알트페리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쥔 그는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다행히 사이즈가 딱 맞는군요.”
“그러게요. 제 반지 사이즈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쑥스러운 듯 그의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여러 번 쥐었으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루크가 손을 움직여 깍지를 꼈다.
그리고 마치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을 줘 꽉 붙잡았다.
알트페리아는 그의 단단한 손가락 사이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려, 깍지를 낀 채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을 보면 이제 그 누가 연기라고 의심할까 싶었다.
“이제 어떻습니까? 제가 공녀님께 홀딱 반한 것으로 보입니까?”
그는 알트페리아가 처음 계약 결혼을 제안했을 때를 이야기했다.
“영웅께서 제게 한눈에 홀딱 반했다며 청혼해 주세요.”
그녀는 황제가 의심할지 모르니 결혼 전에도, 후에도 계속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네, 무척요.”
“딱히 연기를 하지 않아도 그리 보이는 모양입니다. 기쁘군요.”
그는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연기가 아니라면…… 진심인가요?’
알트페리아는 질문을 내뱉지 못했다. 순간 넋을 놓고 그의 미소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밝게 미소 짓는 건 처음 봤다.
환하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그가 웃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루크가 알트페리아에게 반지를 건네준 자리는 이용하려면 몇 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예약이 꽉 차버렸다.
손을 잡고 수줍게 웃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서는 물론, 제도의 모두가 알 정도로 퍼졌다는 것이다.
* * *
힐다와 함께 황궁을 방문했던 앨런은 지독한 감기에 시달렸다.
차가운 황궁의 바닥에 몇 시간 내내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쉽게 회복되지 못한 거였다.
고열에 시달리다 겨우 일어났더니, 그 짧은 며칠 새 온갖 일이 다 일어났단다.
“거짓말하지 마!”
앨런은 자신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는 집사를 향해 꽃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꽃병은 집사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갔지만,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뭐라고?”
“황제 폐하께서 두 분의 결혼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장 오늘 식을 올리실 거라는 소문이 제도에 자자합니다…….”
뭐야, 황제가 두 사람의 결혼을 막는 거 아니었어?
감기에 시달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리아가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반성했는데 결국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되다니.
“내가…… 그렇게 사과했는데도……!”
그녀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날 좀 봐줘요, 앨런.”
그렇게 매달리던 그녀가 이렇게 쉽게 다른 남자한테 간다고?
믿기지 않는 상황이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앨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집사가 앨런을 막아섰다.
“도련님, 성치 않은 몸으로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비켜, 리아를 빼앗길 수 없어.”
“안 됩니다. 백작님께서 도련님을 바깥에 내보내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당장 비키지 못해!”
쾅! 앨런은 집사를 사정없이 밀치고, 방 밖으로 나왔다.
입구에 서 있던 시종들이 놀라며 막아섰다.
“꺄아악. 도련님, 진정하세요!”
“당장 도련님을 막아!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게 해야 해!”
“놔! 나는 결혼식장에 가야 해!”
시끄러운 소리에 근처에 있던 시종들과 로저필드 백작까지 찾아왔다.
“앨런! 이게 무슨 소란이냐!”
“리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지 않습니까! 당장 막으러 가야 합니다!”
로저필드 백작은 눈썹 사이를 꾹 눌렀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한 결혼을 네가 어찌하겠다고?”
“결혼식을 진행하는 사제를 모두 죽여서라도 식을 막을 겁니다!”
“이 못난 놈이!”
짝, 로저필드 백작이 앨런의 뺨을 후려쳤다.
아버지에게 처음 맞은 앨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우뚝 섰다.
“개선식에서도 그러더니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냐! 이 결혼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허락하셨다. 네놈이 나서봤자 뒤엎지 못해!”
“그렇지만…… 리아는 내 여자입니다!”
“이만 정신 차려라! 가문을 망하게라도 할 생각이냐! 집사!”
“예, 주인님.”
“앨런을 방에 가두고,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해.”
“아버지!”
이대로 앨런 마음대로 행동하는 걸 내버려 뒀다간 황제의 분노를 살지도 몰랐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였다.
로저필드 백작은 저를 처절하게 부르는 앨런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