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눈치를 본 집사는 기사를 불러 앨런을 방 안에 가둬버렸다.
혼자가 된 앨런은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결혼식이 끝나 버릴 것이다.
“아버지, 제발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처절하게 소리쳤지만, 로저필드 백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허무하게 하루가 지나버렸다.
진짜로 원하는 여자를 손에 넣지 못한 앨런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 * *
[<시스템> 오늘의 운세 ― 운수 대통한 날입니다!]
딱 결혼하기 좋은 날이란 말이다.
나쁜 일이 없겠다는 것에 안심한 것도 잠시.
아침 일찍부터 시녀들의 손에 붙잡힌 알트페리아는 꽃잎을 푼 욕조에 담가졌다가 향유를 바르고, 마사지를 받고, 팩을 하고.
조금 한숨 놓았다 싶었더니 수많은 사람이 그녀의 방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공녀님, 예식을 진행하실 대사제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대기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시종이 도착하셨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본식 드레스를 준비했어요. 갈아입는 걸 도와드릴게요.”
“이브닝드레스와 함께 착용하실 장신구는 어떻게 할까요?”
“공녀님!”
“공녀님, 어디 계세요!”
결혼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진행하기로 했는데도 난리였다.
유독 정신이 없는 이유는 있었다.
보통 결혼은 가문의 사람 모두가 돕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결혼은 드래곤의 봉인이 풀리기 전에 후딱 해치워야 했다.
급작스럽게 결정한 터라 북부에서 지내는 가신들이 내려올 시간도 없었다.
알트페리아는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므로 손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이러다가 식을 시작하기 전에 정신이 나가 죽을 것 같아.’
가뜩이나 계좌가 반쪽이라, 체력도 절반인 상태인데.
본식 드레스를 입기도 전에 지친 알트페리아는 축 처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리암이 찾아왔다.
“릴리.”
“리암? 청첩장을 보냈지만, 진짜 올 줄은 몰랐어.”
한때는 친남매처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었기에 청첩장을 보냈긴 했다. 하지만 일이 많은 사람이라 시간을 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찾아와 준 그를 맞이해야 하지만, 체력이 남지 않은 알트페리아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웬일로 두꺼운 안경을 벗고 잘 차려입고 있었다.
“당연히 와야지. 릴리의 결혼식을 도와주려면.”
“…….”
“어릴 때 약속했잖아. 내 손으로 가장 예쁜 신부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런 약속을 했던가.
알트페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까이 다가온 리암이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기댔다.
“피곤할 테니 릴리는 여기서 쉬고 있어. 손님맞이는 내가 할게.”
“리암이?”
원래 결혼식 손님맞이는 가족이나 가문에 들어오는 며느리, 또는 데릴사위가 한다.
그녀의 가족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니, 자연스레 루크가 맡아야 할 일이었다.
“그래. 나는 네 가족이잖아.”
가족같이 가까운 사이였지만 진짜 가족은 아니다.
이성은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귀가 팔랑팔랑했다.
그 때였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손님맞이는 제가 할 일이니까.”
준비를 끝낸 루크가 크라바트를 매만지며 나타났다.
금실로 자수를 놓은 검은 턱시도를 입은 그의 모습에 알트페리아는 순간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복지였다.
‘내가 골랐지만, 옷 참 잘 골랐네.’
그녀가 루크를 흐뭇하게 감상하고 있는데, 의자에 기대 있던 리암이 몸을 일으켰다.
“공자께선 아직 준비가 덜 끝나신 것 같습니다. 바쁘실 테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발트레의 안주인은 접니다. 외부인은 선을 넘지 마시길.”
절도 있는 억양에 경고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 장면 본 적 있어.’
루크와 함께 리암의 부동산을 찾아갔을 때.
그때도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였었다.
딱 지금처럼.
“다른 것도 아니고 릴리의 결혼식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손도 남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부인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에드먼드 후작 가문은 발트레에서 독립했다.
이제 가신도 아니니 사실상 완전히 남인 것이다.
“저는 에드먼드 소후작이 아니라 릴리의 오빠로서 찾아왔습니다. 과거 약속을 지키러 말입니다.”
알트페리아는 리암의 말에 드디어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여덟 살 때쯤이던가.
어린 알트페리아는 가문의 사람 모두에게 청혼하고 돌아다녔다.
부모님은 물론 시녀와 기사들에게. 또 지나가는 영주민에게도 결혼하자고 했다.
“어머, 공녀님과 결혼하면 영광이지요!”
“꺄르르, 귀여우셔라. 얼른 그날이 오길 기대할게요.”
모두 장난스레 대꾸해 줬다.
자신이 청혼하면 사람들이 귀여워해 주는 것이 좋아 마구잡이로 청혼을 남발했던 것 같다.
하지만 리암만이 혼자 진지하게 굴면서.
“내 손으로 가장 예쁜 신부로 만들어줄게.”
―라고 답했었지.
진지해지는 그의 모습에 알트페리아는 어린 마음에도 왠지 모를 껄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청혼하지 않았다.
“이제 생각났어! 여덟 살짜리 애가 내뱉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잊어. 릴리가 나한테 청혼한 걸.”
그 말에 덤덤히 서 있던 루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알트페리아는 괜히 루크가 오해할까 봐 얼른 설명했다.
“리암한테만 청혼한 거 아니거든? 발트레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청혼했단 말이야!”
자신이 청혼했던 사람의 숫자를 세면 두 자리는 훌쩍 넘는다.
그러니 그 프러포즈는 특별한 것도 아니고 장난이라고.
“나는 장난으로 내뱉은 말이 아닌걸. 약속을 지키게 해줘.”
난 승낙한 적 없다고!
리암이 가볍게 짝짝 박수를 치자 바깥에서 대기하던 사람이 우르르 들어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리암과 함께 상단을 관리하는 자들인 듯했다.
일렬로 들어온 그들은 테이블 위에 티아라에 보석으로 장식한 웨딩 구두, 각종 원석으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예물 같았다.
대체 뭔데, 이건?
“사랑하는 동생이 결혼한다는데 그냥 보낼 수 없지. 내가 준비한 성의야.”
“에드먼드 후작께서 허락하신 일이야?”
사이좋게 지내지 말라고 편지까지 빼돌리시던 분인데 이렇게까지 살갑게 챙겨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께는 비밀이지.”
하아, 알트페리아는 방 안을 한 번 슥 둘러본 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짓하며 테이블 위를 치우도록 했다.
기껏 준비한 선물을 착용도 해보지 않고 치우라니.
상단원들이 리암의 눈치를 봤다.
서글서글한 눈매로 알트페리아를 바라보던 리암이 말했다.
“싫어?”
알트페리아는 태연스레 미소를 짓는 리암을 빤히 바라봤다.
그에게 청첩장을 보낸 건 그저, 앞으로 계속 거래를 하게 될지도 몰라서였다.
사이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지만, 그로 인해 루크가 상처받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네가 예민한 거야.”
다른 여자와 수상한 기운을 풍기던 앨런이 수없이 반복하던 말이었다.
아니라고 해도, 알트페리아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상대만을 바라본다는, 연애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앨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비록 계약 결혼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성심껏 대해주는 루크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루크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서.
리암이 자꾸 선을 넘기 전에 자신의 선에서 끝내야 했다.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남들 눈에 예물로 보일 법한 선물은 솔직히 부담스러워. 리암의 생각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거든.”
“…….”
“그러니까 선을 지켜줘. 내가 리암을 내치지 않게.”
리암이 씁쓸하게 웃었다.
“단호하게 말할 줄도 알고. 조금 변했구나?”
“우리가 떨어져 지낸 지도 꽤 오래되었으니까.”
“섭섭한걸.”
알트페리아는 답 대신 그를 빤히 바라봤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알트페리아의 눈빛에 패배한 건 리암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데려온 상단원과 함께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알트페리아는 조용히 서 있는 루크에게 말했다.
“신경 쓰이셨죠? 진작에 해결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이고.”
“…….”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자신은 아직 알트페리아의 이름조차 허락받지 못했는데, 그는 그녀를 애칭으로 불렀다.
거기다가 쌓아 올린 유대까지 있다.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낸 그들을 떠올리자 속이 상한다.
리암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지 못하는 것이.
알트페리아는 그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질투하는 거예요?”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청혼했긴 했지만, 진짜 결혼은 공자님과 하는 걸요. 사제 앞에서 반지를 교환하고 맹세하고. 또…….”
“…….”
“입맞춤도 해야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