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트페리아는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속옷 차림이 된 그녀는 준비된 잠옷을 입으며 말했다.
“각오한 일인데 막상 닥치니 쑥스럽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자신이 긴장한 만큼 루크 또한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화가 뚝 끊기자 방 안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다가가도 괜찮겠습니까?”
“네, 준비는 끝났어요.”
그렇게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더니, 천천히 다가오는 루크의 모습이 보였다.
삐걱, 그는 침대에게 걸터앉더니 막상 올라오진 않았다.
알트페리아는 그가 누울 수 있도록 자신의 베개를 베고 누운 뒤 이불 속에 쏙 들어갔다. 하지만 루크는 미동도 없었다.
“누우세요. 새로 맞춘 이불이라 포근해서 기분 좋아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그녀는 그를 바라봤다.
조용히 먼 곳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는 소파에서 자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신경 쓰여서 그러세요?”
“…….”
침묵은 긍정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앞으로 계속 한 침대에서 자야 하니까 익숙해지는 게 좋아요.”
그래. 그녀와는 사이가 좋은 부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했다.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긴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귓불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붉었다.
알트페리아는 그런 루크를 바라보며 키득 웃었다.
“미리 공부까지 하셔놓고선, 막상 부끄러워진 거예요?”
루크는 그녀가 무슨 의미로 말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가 왜 공부라고 했는지까지도.
“혹시…… 호텔에 있던 책을 보셨습니까?”
“세 권 다 훑어봤어요..”
“선물로 받은 겁니다. 부하가 제멋대로 쥐여준.”
“부부들을 위한 필독서라고 하니, 그렇게 부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랑받는 남편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끌려서 펼쳐봤다.
당황해서 이후로는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루크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기대하셨어요?”
그는 제 곁에 누워 즐거운 듯 웃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살짝 흐트러진 그녀는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알트페리아를 천천히 훑어보던 루크는 미처 닿지 못한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실은 결혼식을 핑계로 입술에 닿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할 때 입을 맞추면 훨씬 더 기쁠 듯하기에.
애써 인내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여전하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침대 시트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제멋대로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공녀님의 허락 없이 손댈 생각은 없으니.”
그는 마치 목숨을 걸고 맹세하는 사람처럼 엄숙했다.
‘마음부터 통하는 걸 바라는 걸까?’
그와 속도를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알트페리아는 옆자리를 한 손으로 팡팡 쳤다.
“공자님의 마음은 알았어요. 오늘은 이만 누우세요.”
루크는 알트페리아의 곁에 조심스레 누웠다. 옆자리에 누워 있던 그녀가 느낄 정도로 그의 몸은 긴장에 뻣뻣해져 있었다.
그와 한 이불을 덮은 알트페리아는 타인의 체온과 숨결을 고스란히 느꼈다.
자신 또한 루크의 존재에 적응해야 할 듯했다.
고요한 침실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그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공녀님.”
“네?”
“잠이 오십니까?”
“아직요. 공자님은요?”
“저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좀 할까요? 긴장도 풀 겸요.”
“예.”
알트페리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루크를 바라봤다.
그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린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루크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부부가 되었으니 호칭도 바꿔야 할 것 같지 않아요?”
“호칭이라…….”
“이름이나 애칭도 좋아요.”
자신이 작위를 받고 나면 공작님으로 불리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니 작위를 받을 때까지는 이름이나 애칭, 혹은 평범한 부부처럼 여보나 당신으로 부르는 게 적당할 듯했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는 틈에 루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트페리아.”
나긋나긋하고 듣기 좋은 중저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느닷없이 이름이 불리자 알트페리아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렇게 부르면 됩니까?”
“네.”
그는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되뇌었다.
“알트페리아……. 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으로 내뱉으니 유독 달게 느껴지는군요.”
사이좋은 부부는 연인이었을 때부터 쭉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다.
괜찮은 방법인데 이상하게 몸 안쪽에 열기가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맞아요……. 생각보다 부끄럽네요…….”
“적응하셔야 합니다. 완벽한 부부여야 하지 않습니까.”
쑥스럽다고 관둘 일은 아니란 것이다.
하긴, 결혼까지 했으면서 공자님, 공녀님, 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심을 끝낸 그녀가 말했다.
“알트페리아보단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제 이름은 기니까 그편이 부르기 편할 거예요.”
“애칭이 아니었습니까?”
애칭은 서로 부르기로 약속한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앨런이 알트페리아의 애칭을 리아라고 정했으니, 다른 사람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리아는 애칭이 아니에요.”
“소백작이 그리 부르던 걸요. 리아라고.”
“앨런은 제 이름이 길다고 발음하기 귀찮다며 짧게 부른 거예요.”
“…….”
그녀의 말에 루크는 팔뚝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알트페리아.
그녀의 이름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저 성가시단 이유만으로 짧게 줄일 만한 것이 아닌데.
앨런이 알트페리아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살의가 들끓는다.
당장 눈앞에 앨런이 있으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루크는 마음을 다잡아 앨런을 향한 분노를 삼켰다. 지금은 곁에 있는 알트페리아에게 집중하고 싶으니까.
그는 알트페리아의 이름을 불렀을 때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짧아지니 꼭 작은 꽃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그리 부르는 것도 좋은 듯합니다.”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찾아보면 정말로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리아라고 불리는 꽃이.”
“곁에 있다고 말씀하실 거 아니죠?”
천장을 바라보던 그가 몸을 돌려 시선을 맞췄다.
루크에게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어둠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습니다. 제가 발견한 꽃이니, 저만이 부를 수 있게 허락받고 싶습니다.”
앨런 따위가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자신만 부를 수 있는 그녀의 애칭으로 삼고 싶었다.
그의 말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네.”
앨런과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을 때.
“알트페리아? 네 이름은 너무 길어서 성가셔. 그냥 대충 리아라고 부를게.”
“애칭인가요?”
“아니? 그냥 줄임말이잖아.”
애칭인 줄 알고 기뻤는데…….
“……성가시게 해서 미안해요. 그렇게 해요.”
다시 그때를 떠올리니 여전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니…… 당시의 자신은, 그저 억지로 괜찮다며 떨쳐낸 것뿐이다.
하지만…….
뻥 뚫린 공허함은 곧 따스함으로 채워졌다.
앨런과 함께하며 얻은 나쁜 기억이 좋은 의미로 채워졌으니까.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시스템이 오늘 운수 대통한 날이라고 하던데.
루크와 즐겁게 지내게 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고마워요. 루크.”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저는 아직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만?”
“싫다면 작위대로 발트레 백작님이라고 부를게요.”
루크는 황제에게 백작 작위를 하사받았다.
알트페리아와 결혼하여 성이 바뀌었으니 발트레 백작이 맞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그는 낯선 작위로 불리는 것이 싫었다.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기꺼이요, 루크.”
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조용해졌다.
침묵하는 루크가 의아해서 그녀가 물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제 이름을 누군가가 불러준 것이 처음인 듯합니다. 대부분 공자니, 대장이니, 혹은.”
천것이라고만 불리었지.
루크는 제 이름이 생소했다.
루크로 깨어났을 때부터 이름보다는 천것, 사생아, 그랑힐데 공자, 대장으로 불렸으니까.
그녀가 낯선 이름을 입에 올리자 의미가 생겨났다.
마치 그녀에게 불리기 위해서 부여받은 이름 같다고 느껴졌다.
“혹은요?”
“다르게 불려 왔습니다. 리아 덕분에 제게도 이름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굳이 애칭을 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저만이 루크라고 부르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