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로저필드 백작 부인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보냈기에 그러세요?”
“내가 아끼던 로즈사파이어로 만든 브로치 생각나?”
세이룬이 웃으며 대답했다.
“선대 공작님께서 소공작님의 생일 선물로 준비하셨던 브로치요?”
“맞아.”
“그 브로치, 얼마 전 르페른 후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한 로저필드 백작 부인이 착용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소공작님께선 2년 전에 잃어버리셨다고 하셨으니까요.”
“실은, 백작 부인이 빌려갔었어.”
“아직까지 돌려주지 않았단 소리네요.”
“계속 필요하다고 했거든.”
“이쯤 되면 빌린 게 아니라 훔친 것 아닌가요!”
“맞아. 그리고 지금은 또 제 것이라고 우기고 있어.”
괜히 남의 물건을 자신의 것이라고 우겼다가 들통 나면 온갖 망신을 당할 건데 부끄럽지도 않은 건가.
판을 크게 벌이면 오히려 알트페리아만 더 좋았다.
퀘스트의 내용은 평판을 깎으라는 거였으니.
공개적으로 망신이나 당하라지.
“그나저나 브로치를 직접 가지러 오라는데, 백작 부인이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할 리는 없을 테고.”
알트페리아를 저택에 부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루크와 세이룬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앨런 때문일 겁니다.”
“맞아요. 소공작님을 뵙고 싶다고 백작 부인에게 매달려서 울었을 거예요. 그 마마보이 소백작이 할 짓이야 뻔하죠.”
앨런은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었다 싶으면, 다프네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했다.
그러면 얼마 뒤 알트페리아는 다프네에게 소환당해서 한 소리 들었다.
“계속 방해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죽일까요?”
“거슬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소백작을 제거하겠습니다.”
세이룬과 루크가 무시무시한 말을 동시에 내뱉었다.
같은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둘은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미묘한 동료 의식이 싹트는 것 같았다.
‘……잘됐나?’
며칠이 지난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 첫날부터 침대를 부숴먹었다고 분개한 시녀들은 루크를 곱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서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친해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알트페리아는 생각했다.
‘일단 내 브로치를 되찾아야지.’
다프네가 아무리 본인 거라 우겨도 자신의 것이라는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으니, 돌려받기란 손쉬웠다.
하지만 다프네의 평판을 최대한 깎기 위해서 증거는 마지막에 밝힐 예정이었다.
계획을 정한 알트페리아는 로저필드 백작 부인에게 답장을 보냈다.
* * *
“이 계집이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고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알트페리아는 로저필드 백작 저택을 방문하는 대신 답장을 보내왔다.
그것도 찾아오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빌려가신 부인이 직접 오셔서 돌려주시는 게 맞습니다.>
발트레 저택으로 찾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다프네는 황당했다.
‘나도 너를 만나고 싶은 건 아니거든!’
앨런이 알트페리아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고 해서 찾아오라는 거지.
인상을 찡그리던 다프네는 알트페리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언제나 앨런의 등 뒤에 숨어 쭈뼛거렸다.
그 소심한 계집은 자신이 무서워 발트레로 오라고 하는 듯했다.
누가 이기나 보자.
<몸이 불편하여 발트레 저택에 찾아갈 수 없다.
필요하다면 직접 가지러 오렴.
앨런의 얼굴도 보고.>
<시종을 보내서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소공작은 호의를 베풀어도 받을 줄 모르는군.
억지를 부려도 브로치를 줄 생각은 없어졌다.
연락은 그만 보내도록 하여라.>
한동안 답장이 없었다.
어린 계집이 뭘 어떻게 하겠어.
결혼을 했다 한들, 남편이라는 것도 공작가의 사생아일 뿐이니 도움이 될 리 없다.
제풀에 지쳐서 포기했을 것이다.
“…….”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 날아온 건 신전의 인장이 찍힌 고소장이었다.
<고소인: 알트페리아 폰 발트레
피고소인: 다프네 드 로저필드
피고소인은 제국력 172년 3월 22일에 고소인의 브로치를 빌린 후 788일이 지난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소공작 소유의 물건을 무단점유한 죄로…….>
이 계집이 미쳤나?
사실 이런 브로치 때문에 법정까지 가는 건 과하다.
귀족은 체면을 중시하니, 법정에 오르는 대신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브로치를 돌려주거나, 값을 치르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 브로치를 돌려주고 끝내기엔 내키지 않는다.
이건 단순히 빌린 물건의 문제가 아니니까!
자신과 사랑하는 앨런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고소장을 읽던 다프네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알트페리아는 빌린 물건을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빌린 물건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보통 물건을 빌릴 때는 차용증을 쓴다.
하지만 차용증은 작성하지도 않았고, 물건을 빌릴 때도 알트페리아와 자신 단둘만이 있었기에 증인도 없다.
심지어 자신은 브로치를 착용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모두 그런 저를 보고.
“어머, 백작 부인. 귀한 로즈사파이어 브로치가 아닌가요!”
“어디서 세공하셨어요? 너무 예뻐요!”
“정말 백작 부인께 너무 잘 어울리는 브로치예요.”
그리 말했고, 그 물건이 자신의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알트페리아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도 찍소리도 못 냈었고.
이 상황에서 알트페리아가 이제 와서 브로치가 자신의 것이라고 우겨봤자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것이다.
다프네는 고소장을 보낸 신전에 답장을 보냈다.
<내 브로치를 왜 공녀의 것이라고 하는 건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브로치라고 주장한다.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서는 재판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 간의 법정 싸움은 황제가 승인하고, 신전이 진행한다.
곧 황제의 승인이 떨어졌고, 공방 날짜가 잡혔다.
다프네는 증거인 브로치를 신전에 제출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정에 출두할 날짜가 잡히고, 신전에 브로치를 제출까지 하자 덜컥 겁이 났다.
‘보석 감정서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구매 영수증 같은 게 있을지도.
만에 하나라는 불안이 싹튼 다프네는 정보 길드를 찾았다.
의뢰비가 무지막지하게 비쌌지만, 로저필드 백작가의 재력으로 문제될 건 없었다.
그녀는 브로치에 관한 정보를 샀다.
다행히도 그것은 공식적으로 이름이 붙여진 보석이 아니었다.
세공을 맡은 장인도 이미 10년도 훨씬 전에 눈을 감아서 증언해 줄 수 없고.
이미 걱정은 없어졌지만, 다프네는 추가로 의뢰를 넣었다. 브로치가 자신의 것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제작해 달라고.
다프네의 의뢰를 받은 정보 길드는 보석 전문가들이 제작한 판매증서와 함께 감정서까지 만들어줬다.
바로 원석을 발견한 사람이 다프네인 것으로.
그리고 그녀는 우연히 참석한 파티에서 좋은 정보를 하나 들었다.
평소 부동산과 관련된 사업에 관심이 많은 부인이 한 말이었는데.
“발트레 소공작이 에드나의 땅을 잔뜩 사들였더군요.”
“그 쓸모없는 얼음덩어리 땅을 대체 뭐 하려고 산 거죠?”
“아무것도 모르니까 산 게 아닐까요? 부동산들은 쓸모없는 땅을 팔아치우고 싶어 혈안이었으니까요. 투자에 실패했으니 속이 상당히 쓰릴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은 다프네는 여러 부동산을 수소문하여 알트페리아가 구매한 땅의 규모를 확인했다.
대체 그 쓸모없는 땅에 투자를 왜 그렇게까지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데 돈을 썼네.’
그것도 아주 많이.
알트페리아가 다른 사람의 브로치를 탐낼 이유까지 생긴 것이다.
‘두고 보자.’
자신과 앨런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게 만들 것이다.
* * *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루크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우으으음.”
잠에 취한 알트페리아가 눈을 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곁에 있는 루크를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알트페리아는 잠버릇이 심했다.
곁에 있는 루크를 끌어안는 건 물론, 가끔은 더듬기까지 했다.
오늘은 달라붙는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