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루크는 조심스레 그녀를 살폈다.
잠결에 뒤척이며 올라간 치마 아래로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루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죽겠군.’
매일 아침 인내하느라 온 힘을 다 쓰는 것 같았다.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제발 들뜬 몸과 마음을 진정시켜 달라며 빌었다.
한참을 기도했더니 열기가 가라앉았다.
“……리아.”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잠에 취한 알트페리아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그는 그녀가 발로 뻥 찬 이불을 붙잡아 고이 덮어줬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손길을 느낀 알트페리아가 눈을 떴다.
그는 멈칫했다.
“주무시는 모습이 불편해 보여서 자세를 고쳐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졸려요.”
알트페리아의 눈이 다시 스르륵 감겼다.
그녀가 유독 피곤해 하는 이유가 있었다.
재판에 비용이 많이 들어간 탓에 보유 재산의 잔액이 줄어들었다.
[<시스템> 현재 보유 재산: 380,000,000 르블라]
[<시스템>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그 여파로 몸이 피로해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레 살폈다.
“법정이 열리기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좀 더 주무십시오. 시간 맞춰 깨워드릴 테니.”
감겨 있던 그녀의 눈이 반짝 뜨였다.
‘맞아. 오늘 재판이 있지!’
이렇게 얌전히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판에 이겨야지 퀘스트도 깨고, 소송비를 죄다 돌려받고, 보유 재산도 원상 복귀된다!
이길 재판에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당장 준비해야겠어요.”
루크는 조금 아쉬워졌다. 그녀가 제 품에 있을 시간이 줄어들어서.
그래도 의욕이 넘쳐흐르는 알트페리아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침대에서 나온 알트페리아는 시녀를 불러 치장을 끝마쳤다.
외출 준비가 끝나갈 때쯤 리베르트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소공작께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오늘 재판은 괜찮으십니까?”
다프네에게 고소장을 보낸 후 알트페리아가 한 일은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거였다.
반면 다프네는 무려 흑표범단에 의뢰까지 넣었다.
알트페리아가 걱정이 된 리베르트는 맡겨만 준다면 자신이 정보를 찾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알트페리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만 으쓱거렸다.
“없는 정보를 어떻게 찾아?”
지금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내뱉으며.
“모든 사람은 흔적을 남깁니다.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됐어, 힘 뺄 필요 없어.”
애초에 마물 토벌을 나간 아버지가 동굴에서 우연히 찾은 원석이라 출처가 불분명하다.
심지어 세공을 맡았던 장인도 나이를 먹어 죽고, 일곱 살 때 선물받은 이후로 상자에 고이 넣어두기만 해서 착용한 적도 없다.
발트레의 사용인들이야 선대 공작이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사용인을 증인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리베르트에게도 괜히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리베르트는 걱정되어 죽을 맛이었다.
처음에는 브로치 가지고 소송까지 가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품이라는 말에 이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 간의 소송은 단순히 시시비비를 가리는 걸로 끝나지 않는데.
패배한 쪽은 어마어마한 부담을 짊어진다.
한동안 사교계 활동도 접어야 할 정도로 망신을 당하는 것은 물론 엄청난 보상금도 내야 할 것이다.
발트레의 재정은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서 막대한 보상금까지 내게 된다면 영지까지 내다 팔아야 할지도 몰랐다.
리베르트가 양손을 꼭 모았다.
“저는 발트레가 파산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이겨주십시오.”
“왜?”
혹시 우리 영지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야?
“발트레 영지가 엉망이 되면 에델이 슬퍼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승소하십시오…….”
에델 때문이라지만 리베르트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었다.
알트페리아가 픽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패배할 싸움은 하지 않아.”
리베르트를 안심시키려는 말이 아니었다.
‘지려고 해도 못 지는 걸?’
이길 수밖에 없는 재판이니까.
“증거도 없는데 소공작님의 브로치라고 어떻게 증명하실 겁니까? 브로치에 이름이라도 적혀 있지 않은 이상 원소유주임을 주장하기 힘들 겁니다.”
“맞아. 그런데 있거든.”
“예? 진짜 이름을 적어두셨습니까?”
“아니, 비슷해.”
브로치에는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자신과 아버지만의 비밀이라 정보 길드가 아무리 애써 봤자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 * *
재판은 신전에서 진행된다.
대기실에 있는 다프네가 남편인 로저필드 백작에게 말했다.
“앨런은 데려오지 않으셨습니까?”
“고작 브로치 하나 때문에 재판을 열었잖소. 이 꼴을 어떻게 자식에게 보여주겠소!”
그 말에 다프네는 안도했다.
자신과 아들의 자존심을 위해 재판까지 끌고 왔지만, 막상 앨런에게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거리낄 게 없어진 다프네가 목소리를 높였다.
“겨우 장신구 하나가 아닙니다. 소공작이 나와 앨런을 무시하잖습니까!”
“하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됐소. 그래서 승산은 있소?”
로저필드 백작은 브로치의 주인이 알트페리아란 걸 알고 있었다.
다프네가 처음 보는 낯선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기에 한 번 캐물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빌렸다는 말에 안심했는데 어쩌다가 법정까지 오게 되었는지 원.
브로치 때문에 고소당하고 법정에 서는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기서 패배했다가는 한동안은 사교계 활동 같은 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망신당할 것이다.
다프네가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소유의 보석이라는 증거를 잔뜩 모아두었으니까요.”
“만약에 소공작이 세공사라도 데려오면 어떻게 할 거요.”
“브로치를 조사해 봤는데 이름 있는 광산에서 채굴된 원석이 아니고, 세공을 맡은 장인도 죽어서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아무런 기록이 없는 브로치를 착용한 건 저뿐이지요.”
알트페리아를 싫어하는 다프네가 홧김에 일을 밀어붙여 증거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신중하게 준비한 모양이었다.
시중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보석의 소유권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렵다.
세공사도 죽어버린 마당에 누가 누구에게 팔았는지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로즈사파이어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아무 기록도 없는 원석이라니 다행이오.”
이렇게 희귀한 광물은 채굴하는 즉시 고유 번호를 붙인다.
하지만 그런 기록이 없는 걸 보면 우연히 손에 넣은 원석이었던 모양이다.
“후후, 게다가 보석 감정서까지 준비해 뒀습니다.”
“고유 번호도 없는 원석의 감정서는 어떻게 준비한 것이오?”
“당연히 위조했지요.”
로저필드 백작은 떨떠름해졌다.
고유 번호가 없는 원석은 감정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
재판까지 끌고 온 걸 보면 알트페리아도 완전히 수가 없는 건 아닌 듯하니 조심에 조심을 기할 필요는 있었다.
“감정서는 최후에 꺼내도록 하시오. 혹시 공녀가 진짜 감정서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오.”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애초에 감정서 제출까지 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로저필드 백작 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제가 찾아왔다.
“법정으로 모시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되었군. 다녀오시오.”
로저필드 백작은 다프네를 보냈다.
다프네는 분노로 가득한 마음으로 법정으로 이동했다.
곱씹을수록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알트페리아가 괘씸했다.
이번 재판이 끝나면 알트페리아는 남의 물건을 탐내는 욕심 많은 계집으로 소문이 나고, 망신도 제대로 당할 것이다.
전장의 괴물에게 이혼당할지도 모르지.
‘감히 내 아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이 정도로 소중한 아들이 당한 분을 다 풀 순 없지만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겠지.
승리를 확신한 다프네는 당당하게 법정에 들어섰다.
* * *
대기실에 준비된 소파에 앉은 알트페리아의 머리가 오뚝이처럼 위아래로 꾸벅꾸벅 움직였다.
재판 때문에 보유 재산이 소진되어 피로해진 까닭이었다.
호위 기사 겸으로 함께 와 그녀의 곁을 지키던 루크가 어깨를 빌려줬다.
그의 어깨에 기대 잠깐 눈을 붙이던 그녀가 깨어났다.
“후아아암.”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맞아요……. 그래도 재판이 끝나면 다시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프네가 패배하면 소송비는 다 돌려받는다.
게다가 죄가 증명되었으니 배상도 해야 한다.
브로치의 가치가 뛰어난 만큼 배상금 또한 상당할 것이다.
그러면 드래곤의 봉인이 풀리기 전에도 돈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백작 부인이 쓰러질지도 모르겠네.’
얕보며 구박해 왔던 상대에게 패배한 꼴이니.
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프네는 처음부터 자신을 구박했다.
손만 쓰지 않았지, 그녀가 내뱉는 말은 하나하나 가슴에 꽂히며 자신을 아프게 했다.
알트페리아는 그런 그녀가 점점 두려워졌다.
알트페리아가 중얼거렸다.
“저는 백작 부인을 무서워했어요.”
다프네가 자신을 찾을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세상이 핑핑 도는 기분을 느꼈다.
로저필드 저택이 도살장처럼 느껴졌다.
두려워 피하고 싶어도 앨런과 만나기 위해서는 다프네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쯤은 앨런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도와줄 줄 알았는데, 언제나 그는 뒷짐을 지고 구경만 했다.
가끔 자신이 백작 부인의 말에 눈물을 흘리면 시선을 피하며 피식 웃기도 했었다.
그래서 더 서러웠다.
타인밖에 없는 로저필드 저택.
제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앨런조차 자신을 이방인으로 취급하여서.
알트페리아의 안색을 살피던 루크가 말했다.
“리아 대신 제가 법정에 서겠습니다.”
루크는 발트레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알트페리아 대신 법정에 참석해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알트페리아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제 싸움이에요. 루크는 응원해 주세요.”
언제 졸았냐는 듯, 의욕에 넘치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