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헌터가 도면도 그렸어요?”
그런 건 보통 무기 같은 걸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그리지 않나.
“공과대학을 다녔습니다.”
예체능이랑은 완전히 다른 계열인데.
그래도 선 한 번 제대로 긋지 못하는 자신보단 나을 것 같아 그녀는 그에게 펜과 종이를 건넸다.
펜을 받아 든 루크는 알트페리아가 그린 그림을 자세히 살펴봤다.
집중해서 보니까 알트페리아의 그림은 드래곤이 아니라 길게 늘어뜨려진 드레스를 입은 요정이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그는 천천히 선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형태가 만들어지자 알트페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딱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이 구현되기 시작해서였다.
“와아.”
손을 멈춘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림에 몰두한 알트페리아는 몸을 기울이며 점점 루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그녀의 눈은 유례없을 정도로 반짝였다.
제 작은 행동으로 알트페리아가 기뻐하자 루크는 벅찬 기분이 들었다.
살짝 귀 끝이 붉어진 그는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라면 알트페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있을 것 같아 아무 말이나 꺼냈다.
“찻잔은 꼭 넣어야 합니까?”
“글을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까 꼭 넣어야 해요. 간판만 봐도 찻집이구나, 알 수 있게!”
“그렇다면 눈에 띌 수 있도록 찻잔의 크기를 키워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겠는데요. 아, 차라리 찻잔에 앉혀봐요.”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가게의 상징물로 사용할 요정 그림을 완성시켰다.
찻집 골든 페어리.
훗날 르블레아 제국 전역에 체인점을 둘 카페 골든 페어리의 탄생이었다.
* * *
가게 이름과 상징물도 정했겠다, 알트페리아는 날이 밝자마자 솜씨 좋은 공방을 찾아갔다.
공방에 도착한 그녀는 밤새 루크와 함께 그린 요정 그림을 건넸다.
간판 제작은 오래 걸리지 않는단다.
저녁쯤이면 완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관청에 갔다.
거기서는 가게 이름을 바꾸겠다는 서류를 처리하고 오후쯤이 돼서야 골든 페어리에 도착했다.
‘옆 가게는 여전히 사람이 많네.’
이번에 꽃으로 만든 잼을 이용한 마카롱을 신 메뉴로 내놓았단다.
기존 마카롱은 죄다 과일잼이어서 그런가.
독특한 시도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인 것 같았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에 있는 작은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소공작님!”
“준비는?”
“지시한 대로 세팅해 두었어요. 안내해 드릴까요?”
“응.”
알트페리아는 밀리아의 안내에 따라 커플석이 있는 테라스 입구로 이동했다.
테라스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벨벳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앞서 나간 밀리아가 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요정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벨벳커튼이 위로 올라가며 테라스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을 내뿜는 요정의 샘물과 함께 생동감 넘치는 거리가 펼쳐졌다.
문을 활짝 연 밀리아가 쑥스러워했다.
“헤헤, 어떤가요? 마침 요정의 샘물이 보이는 장소니까 테라스 문을 열면서 축복을 내릴까 하는데, 이상한가요?”
역시 인재라니까.
시키지 않아도 뚝딱하는 걸 보면.
“괜찮은걸? 아주 마음에 들어.”
형식적인 인사지만,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시각적인 효과 때문인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이에요. 고민한 보람이 있네요!”
그녀는 볼을 살짝 붉히며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알트페리아는 열린 테라스 안쪽으로 향했다.
곳곳에 은은한 등과 함께 말린꽃 장식 등을 둬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요정이 나올 것같이 꾸며뒀네.”
“알아보시는군요.”
커플석을 보니 조금 애매했던 가게의 콘셉트도 확실히 정해졌다.
실내에도 정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싱그러운 식물을 가득 둘 생각이었다.
‘일명 가드닝 카페!’
전생에서는 도심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이색 카페로 불렸지.
르블레아에서는 전생보다는 자연과 벗 삼아 살고 있지만, 제대로 관리된 정원을 마주하기는 어렵다.
개인 정원을 가지고 있는 건 대귀족들뿐이니까.
가든파티는 대귀족과 인맥을 쌓은 사람들만 즐길 수 있으니 수요가 있을 것 같았다.
에드먼드 상단의 도움을 받으면 실내에 식물을 들여놓는 것도 며칠 만에 끝날 것이다.
능숙한 직원도 있으니 곧바로 영업을 할 수 있을 테고.
‘일단 가오픈을 해서 반응을 살펴야겠어.’
알트페리아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곁에 있던 밀리아가 말했다.
“오늘 시음하신다고 하셨죠? 테라스에서 확인하실래요?”
“좋아, 가져와 줘.”
밀리아가 차를 가지러 아래로 내려가고, 홀로 남은 알트페리아는 테라스에 앉았다.
커플석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루크와 함께 올 걸 그랬나?’
그는 요즘 그랑힐데에서 자신을 따라온 기사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일이 있는 걸 아니까 혼자 왔는데 이 좋은 풍경을 혼자 보려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루크와 함께 와야지.
그러면 커플석 홍보도 자동으로 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밀리아가 차와 다과가 올라간 트레이를 가지고 왔다.
찻주전자는 여러 개였다.
기존에 팔고 있던 차를 전부 가져오라고 지시해서였다.
하나씩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밀리아가 말했다.
“인기 있는 순서대로 놓았어요. 손님 대부분은 이 차만 찾으세요.”
에드먼드 후작이 넘긴 가게 보고서에도 적혀 있었다.
인기 있는 차 하나만 잘 팔리지, 나머지는 수요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알트페리아는 한 잔씩 모두 마셔보았다.
에드먼드 상단이 구한 질 좋은 찻잎을 우려낸지라 향과 맛은 꽤 괜찮았다.
그중 인기가 제일 좋다는 차는 단맛이 가장 진했다.
‘확실히 단 음식을 선호하네.’
아메리카노가 잘 먹힐지 살짝 걱정될 정도였다.
‘음, 뭐 어때.’
팔리지 않으면 나와 루크가 마시지, 뭐.
그런 생각을 한 알트페리아가 가장 달달한 차가 담긴 찻잔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요즘 유행하는 블렌딩티구나. 뭘 넣은 거야?”
“말린 사과와 장미잎을 넣었어요. 사용한 사과는 에드먼드 영지에서만 자라는 꿀사과이고요. 장미잎의 경우는 겨울에만 피는 설탕장미예요. 그래서 은은한 단맛이 돌죠!”
“메뉴 이름은?”
“사과 블렌딩이에요.”
알트페리아는 메뉴를 확인했다.
<사과 블렌딩(말린 사과, 장미잎, 루일트잎, 꿀)>
매우 정직하게 쓰여 있었다.
그녀는 펜을 들어 몇 가지 글을 추가했다.
알트페리아의 필체는 화려해서 메뉴판에 잘 어울렸다.
“꿀사과와 설탕장미를 강조하도록 해. 메뉴판에도 장미는 빨간색으로…….”
다음으로 그녀는 장미잎에 동그라미를 친 다음에 옆에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마법 술식 같은 건가요? 독특한 모양이네요.”
알트페리아는 펜을 내려놨다. 그리고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펜이…… 잘 써지는지 한번 확인한 것뿐이야. 잉크가 잘 나오는 것 같으니, 장미꽃을 그려줄래?”
“맡겨주세요!”
그녀는 아기자기한 장미꽃을 여러 개 그렸다.
‘나 빼고 다들 미술학원이라도 다녔나?’
다들 그림을 잘 그리는 것 같다.
질 좋은 잎에 괜찮은 재료를 배합하였으니 맛은 중간 이상이었다.
한 번 알려지기만 하면 찾을 사람이 꽤 될 것 같을 정도로.
한데 옆에 떡하니 손님을 빨아먹는 가게가 존재한다.
이 상태라면 결과는 뻔하다.
공룡 같은 이웃 가게와 경쟁하려면 마케팅이 필요했다.
성공하는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선을 끌어당겨야 했다.
“앞으로 이 티의 이름은 사과 요정이야.”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은 가드닝 카페를 콘셉트로 잡았으니까 메뉴도 맞추는 게 좋겠지.
이름을 정하는 걸로는 부족했다.
옆의 가게는 테라스에 앉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대단히 많다. 뭔가 시선을 끌 만한 것이 필요했다.
알트페리아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일하던 가게 주변에도 굉장히 인기 있던 곳이 있었다.
손님들이 줄을 설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는데 언제나 해가 지기도 전에 가게 문을 닫아버렸다.
“가오픈 기간에는 사과 요정만 팔도록 해. 단, 하루에 딱 50잔만 팔 거야.”
“네? 50잔이요?”
밀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있는 크리스털 크라운만큼은 아니지만 워낙에 위치가 좋다 보니까 손님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차를 50잔만 팔라니?
손해이지 않나?
이해되지 않는 알트페리아의 지시는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50잔을 팔면 미련 없이 가게 문을 닫고 퇴근해 버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하지만 일개 직원일 뿐인 밀리아는 소공작인 알트페리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가오픈 첫날.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가게 문을 닫았다.
다음날은 좀 더 이른 시간이었다.
차츰 문을 닫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 * *
크리스털 크라운을 찾는 사람은 많았다.
예약을 한 사람도 있지만, 지나가는 길에 들른 사람도 많아 늘 줄이 길었다.
게다가 새로운 꽃잼마카롱이 나온 뒤로는 포장하는 줄도 많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대기하다가 지친 사람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늘 같은 가게들뿐이라 왠지 끌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새로운 간판이 눈에 띄었다.
요정이 찻잔에 앉아 있는 황금색 간판이었다.
찻잔 아래로 골든 페어리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가게 이름이 바뀌었네요?”
“요 며칠 문을 닫고 공사를 하더니, 주인이 바뀌었나 봐요.”
“여기 쓰여 있는 한정 판매는 뭘까요?”
새 가게가 생겨서 흥미가 끌리지만, 막상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크리스털 크라운이라는 완벽한 가게가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런 골든 페어리에서 직원이 나오더니 가게 문을 잠가버리곤 팻말을 ‘영업 종료’로 바꿨다.
아직 해가 쨍쨍한 낮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