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루크는 멈칫했다.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욕구불만이라는 단어가 두둥실 떠 있었다.
대개 욕구불만이라고 하면 성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여 불만이 쌓인 것뿐이지…….
‘정말인가?’
단 한 번도, 그 이상을 생각해 본 적 없단 말은 도저히 양심에 찔려서 내뱉을 수 없었다.
특히 그녀와 가까이에서 쉴 때.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으로도…….
[‘흑화한 염룡’이 당신의 혈압이 오르는 이유를 궁금해 합니다.]
[‘사자의 서기관’이 너무 참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합니다.]
이 자식들 때문에 괜한 상상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녀는 하얗고 작다.
살짝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조심스러운데 그 이상의 무언갈 원하는 건 가당치도 않았다.
게다가 알트페리아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훈련의 강도를 올려야겠군.’
이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다른 곳에 몰두하는 것이 좋을 테니.
알트페리아의 눈에 루크의 알람창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손을 저어서 없애버렸다.
마찬가지로 성좌들도 차단해 버렸다.
잘 준비를 끝마친 루크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오셨습니까?”
“네.”
침실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루크의 곁에 앉더니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루크에게 안겨도 돼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루크는 순간 머리를 세차게 맞아 정신이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제가 꿈을 꾼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곁에 앉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루크를 빤히 바라봤다.
설마, 퀘스트인가?
인내를 발휘해라, 같은 내용의.
그만큼 누군가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알트페리아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고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
“루크한테서 좋은 향기가 나거든요. 그 향을 맡으면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서…….”
“…….”
“제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요. 잊어주세요.”
그녀가 또박또박 말을 하는 걸 보니 꿈 같은 게 아니었다.
루크가 가만히 굳어 있자 알트페리아는 자신의 자리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눈을 깜빡인 그가 움직여 알트페리아의 허리 쪽으로 손을 넣었다. 그녀가 뿌리치지 않자 그는 좀 더 단단히 붙잡으며 제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과 알트페리아의 등이 맞붙었다.
“품 정도야 얼마든 빌려드리겠습니다.”
안겨 있던 알트페리아가 몸을 돌리더니,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많이 피곤해 보였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즐거워하며 방을 나섰는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별일…… 없었어요.”
진짜로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루크가 보였다.
그는 단정한 이마를 훤히 드러낸 채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살짝 흘러내린 가운 사이로 곧은 목과 단단한 가슴이 보였다.
조각 같은 그를 바라보다가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안겨보고 싶다고.
미쳤지, 생각한 말이 왜 밖으로 튀어나오냐고.
종종 루크를 홀린 듯 바라보다 보면 생각과 동시에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것 같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렸지만, 수습되긴커녕 체향이 좋다는 소리까지 내뱉어 버렸다.
‘으아아, 오늘 밤은 잠 다 잤어.’
부끄러운 마음에 이불 속으로 도망가려 했는데 루크가 저를 안아줬다.
막상 그의 품에 안기고 나니까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자주 이런 시간을 갖자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고급스러운 그의 체향이 폐부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의 가슴도 알트페리아를 따라 크게 움직였다. 심장도 빠르게 뛰는지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너무 노골적으로 킁킁댄 것 같다.
알트페리아는 슬며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요즘 일을 너무 열심히 했는지 피곤해요.”
“하긴,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셨습니다.”
“…….”
“조금 서운하였습니다.”
조금이 아니라 사실은 무척.
그의 말에 알트페리아는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봤다.
일꾼이 천직인가.
막상 가게를 얻고 나니까 일하고 싶어져 몸이 근질근질해 일어나는 대로 골든 페어리로 갔다.
찻집을 한 번 둘러본 다음에는 에드먼드 상단에 가서 다양한 식재료를 살펴보곤 새로운 메뉴를 구상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를 만큼 즐거웠지만, 저택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잠자기 바빴다.
“오늘은 오랜만에 이야기를 좀 할까요?”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어울려주신다면 무척 기쁩니다. 찻집은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에드먼드 후작님이 운영하셨을 때보다 훨씬 잘나가고 있어요. 신 메뉴인 빙수를 소개하고 나면 더욱 잘될 거예요!”
알트페리아는 빙수를 팔 거라는 계획을 밝히며 까르르 웃었다.
루크는 미소를 지었다.
갈증이 느껴질 정도로 텅 비어 있던 마음이 그녀로 채워졌다.
* * *
다음날.
북부에 있는 발트레 영지에 갔던 세이룬이 돌아왔다.
쿵―
그녀는 들고 있던 두꺼운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법 묵직한 걸 보니까 뭔가 잔뜩 든 모양이었다.
“명하신 대로 씨앗을 심어 열매를 수확했어요. 추운 땅에서도 잘 자라는 거 있죠! 게다가 자라는 속도도 빠르던데 아티팩트로 처리한 씨앗이었나 봐요?”
퀘스트 보상이라 빨리 자랄 뿐인데.
이 세계에는 식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아티팩트가 존재했기에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맞아.”
“그나저나 이 씨앗은 어디서 찾으신 거예요? 영지민도 궁금해 했어요.”
“신기하지? 어음, 고대 문헌을 토대로 찾았어.”
알트페리아는 대충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곤 왠지 다른 걸 또 물어볼까 봐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가져온 열매를 꺼내봐.”
“예, 소공작님.”
세이룬은 자루 안에 든 열매를 한 손 가득히 꺼냈다.
커피콩은 체리를 닮은 붉은 과실 안쪽에 씨앗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이룬이 꺼낸 과일은 새빨간 열매 모양이었다.
곁에서 커피체리를 구경하던 에델이 감탄했다.
“루비같이 반짝거리는 열매네요.”
세이룬이 으쓱거렸다.
“발트레 영지에 심겨 있는 모습을 보면 훨씬 더 예뻐요. 하얀 눈 위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걸 보는데 경이롭기까지 하더군요.”
“나도 얼른 영지에 가서 보고 싶어.”
쓸모없이 방치된 땅이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은 꼭 두 눈으로 담고 싶었다.
그나저나 열린 자루 안쪽을 흘끗 보니 꽤 양이 많았다.
“이게 전부야?”
“아뇨, 제 재량으로 조금 남겨두고 왔어요. 관심을 가지던 근처 마을 영지민에게 맡겼는데 제도로 출발할 때쯤 싹을 틔우더라고요. 잘 재배해 보겠대요!”
자신이 발트레에 돌아갈 때쯤이면 근사한 장관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체리가 무사히 수확되는 것도 봤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전생에서는 이미 다 볶아 나온 원두만 접했지만, 커피콩이 어떤 공정으로 생산되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알트페리아는 붉은 열매를 하나 들어 올렸다.
“이 안에 콩이 하나 들어가 있어. 초콜릿 만드는 것과 똑같이 숙성시키며 말려줄래?”
카카오열매 씨앗을 추출하여 말리는 것과 같다.
디저트를 만들 줄 아는 고용인에게 맡기는 되는 일이었다.
“맡겨주세요!”
세이룬과 에델은 자루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커피콩이 원두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혼자가 된 알트페리아는 골든 페어리의 현황을 확인했다.
‘이것 참 편하다니까.’
따로 보고서를 받지 않아도 매출이라든지, 재고 현황, 현재 앉아 있는 손님의 숫자 등등이 표시되었다.
현재 골든 페어리는 가오픈 기간이 끝나고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사과 요정을 한정 판매로 내세워 사람을 끌어들이는 전략은 여전히 유지한 채, 기존에 팔고 있던 다른 차도 공개했다.
손님이 늘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매출도 늘었다.
‘대박이었는데…….’
하지만 최근 매출이 점점 줄고 있었다.
한정 판매 음료는 한 번 맛보면 흥미가 식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매출을 유지하려면 꾸준히 신 메뉴를 내놓아야 했다.
‘그전에 대표 메뉴가 없는 것도 문제야.’
좋게 말해서 나쁘지 않은 가게다.
나쁘게 말하면 특징이 하나도 없다!
가드닝 콘셉트 하나로 손님을 끌어모으기엔 옆 가게가 너무나도 막강했다.
‘아메리카노는 무리야.’
제국인의 입맛에 맞지도 않는 음료를 내놓을 순 없지.
역시 다음 메뉴는 빙수다!
날도 더워지고 있는 참이니까.
우유를 얼려서 곱게 간 다음에 달콤한 연유를 듬뿍 올린 빙수라면 분명히 제국인들도 좋아할 것이다!
그러려면 얼음을 곱게 갈 아티팩트가 필요했다.
시녀들이라면 물리적인 힘으로 얼음을 갈 수 있긴 했다.
한데 빙수에 사용할 얼음은 섬세하고 고와야 한다.
그래야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으니까.
‘개인 제작 의뢰를 넣어야겠지?’
조만간 마탑의 문을 두드려야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