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예쁘고 재력이 넘침-69화 (69/91)

제69화

원작과 달라진 것이 많았다.

그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화룡 크레치만의 봉인에 대해서다.

원작대로라면 황제는 크레치만의 봉인이 풀리고 나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된다.

하지만 재판 때문에 에드나의 땅을 알트페리아가 샀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리고 그 소문에 흥미를 느낀 마탑이 에드나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사이몬 공작인 칼립스가 알트페리아를 찾아왔다.

각 지방을 다스리는 4대 공작 가문.

그중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가문이 동부의 사이몬이었다.

사이몬의 공작인 칼립스는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든 영주가 모이라는 황명이 떨어진 개선식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엉덩이가 무거운 칼립스가 알트페리아를 만나러 골든 페어리에 왔다.

‘에드나 때문이겠지.’

알트페리아는 칼립스를 바라봤다.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고, 눈밑의 그늘도 짙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늘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거였다.

‘밤을 꼬박 샌 건가?’

피로에 절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은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는데 누가 보면 알트페리아와 남매라고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

반면 복장은 전혀 딴판이었다.

칼립스는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않아 목선과 가슴팍을 고스란히 내보였는데, 찻집에 앉아 있는 영애들이 흘끗댈 정도로 고혹적인 느낌이 났다.

그런 그는 화려한 귀걸이를 포함하여 팔찌에 반지까지 끼고 있었다.

모두 봉인구였다.

마법사들이 제도에 발을 들이려면 힘을 봉인해야 한다.

황제의 허락 없이 마법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까닭인지 황제는 칼립스가 황명을 어기고 개선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내버려 뒀다.

‘대체 봉인구가 몇 개야?’

보통 마법사들은 기껏해야 커다란 귀걸이 하나라고 하는데.

저렇게 주렁주렁 달 정도면, 그만큼 칼립스의 힘이 거대하다는 뜻이었다.

탁, 사과 요정을 마시던 칼립스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알트페리아를 빤히 바라보더니 눈웃음을 옅게 지었다.

“경치가 좋은 찻집이군. 제도에도 이렇게 생명력이 넘치는 장소가 있는지 몰랐다.”

“식물을 좋아하세요?”

“곁에 있으면 마력이 회복되거든.”

마법사들은 마탑에 콕 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희귀 족속들이었다.

워낙에 신비스러워 잘 몰랐는데 저런 속사정이 있는지는 몰랐다.

신기하긴 하지만 알트페리아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마침 아티팩트가 필요한 참이었다. 아티팩트는 마법사들이 제작하는데, 마탑의 대장이 제 발로 나타날 줄이야.

이 기회에 연줄 좀 터서 아티팩트 제작자랑 연결되면 참 좋을 텐데.

알트페리아는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실내는 계절별로 다른 식물로 꾸밀 예정이에요. 곧 여름이 시작될 테니 한번 또 보러 오세요.”

그가 힘없이 시선을 떨궜다.

안 그래도 피곤해 보이던 사람이 축 처지기까지 하니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다음 계절이라. 과연 그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네?”

“당장 다음 달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거든.”

뭐지, 왜 당장 죽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거야.

혹시 많이 아픈가?

하긴, 당장 쓰러질 것처럼 안색이 파리하긴 하다.

뭔가 큰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어떤 큰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에드나를 조사하다 알게 되었다. 크레치만의 힘이 점점 거대해지고 있다는 것을.”

오, 그렇군요.

“마법사를 몇십 명이나 희생해서 만든 봉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힘이 세졌지. 그런 드래곤의 봉인이 풀린다면 제도는 물론 르블레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화룡이 그렇게나 강했단 말이야?

어쩐지 황실 기사단이 맥도 못 추고 단숨에 무릎을 꿇고, 다음으로 파견된 루크도 크게 다친다 했어.

루크가 검이 부러질 정도로 오라를 사용한 건, 그만큼 크레치만이 강하다는 말이었다.

그런 압도적인 힘을 가진 드래곤을 처리했으니까 황제가 루크를 탐 낸 거고.

‘하, 루크를 향한 황제의 집착은 예정된 일인가 봐.’

크레치만을 쓰러뜨리는 즉시 황제는 루크에게 눈독을 들일 것이다.

“크레치만은 인간을 극도로 혐오하기에 모든 사람을 다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동부를 지키는 영주로서 크레치만과 맞서 싸울 것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크레치만을 쓰러뜨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영주의 의무를 다한다는 말이 멋지긴 한데 자신과 그는 초면인 사이였다.

“사이몬 공작께서 저를 찾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작에 의하면, 봉인에서 깨어난 크레치만은 근처에 있는 동부의 마탑부터 공격했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마탑은 크레치만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졌다.

뒤늦게 파견된 황실 기사단 또한 크레치만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랑힐데 공작 부인은 루크가 홀로 크레치만을 상대하게 했다.

그런데 자신의 행동으로 원작이 바뀌는 바람에 크레치만의 봉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사이몬 공작이 먼저 알게 된 듯했다.

먼저 눈치채고 준비하게 된 이유는 알겠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이에 유언을 내뱉는 이유라도 듣자 싶었다.

“폐하께선 북부와 동부가 손을 잡아 크레치만을 퇴치하길 바라시는 것 같다. 발트레가 에드나 항구를 소유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북부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 동부는 내가 관리해야 할 영지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황명이 내려온다면 거절하여라.”

“강한 드래곤이라면 제가 도움을 드리는 편이 낫지 않아요?”

“내 힘을 모두 방출하면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다. 희생은 하나로 족해.”

그는 이미 각오를 다진 듯했다.

강한 마력을 가진 드래곤은 마법에 어느 정도 내성을 지녔다.

마탑주라고 하더라도 마법 내성을 가진 드래곤을 상대하기란 힘들 것이다. 목숨을 내다 버릴 각오를 해야 겨우 쓰러뜨릴 수 있겠지.

만약에 자신이 원작을 읽지 않았으면 칼립스의 희생정신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오까지 끝낸 그에겐 미안하지만.

‘공작님은 죽지 않을 거예요.’

루크가 드래곤을 쓰러뜨릴 테니까!

대신 알트페리아는 다른 의미로 감동했다.

‘멀쩡한 사람도 있었다니.’

원작은 매운 맛 피폐물 소설이었다.

남주는 물론 조연 캐릭터까지 지옥의 끝을 보며 데굴데굴 구르기에 다들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다.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알트페리아의 머릿속에 순간 어떤 생각이 번득였다.

“공작님의 조언에 따라 황명은 거절하도록 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하지만 동부에 지원은 할 거예요.”

“불필요한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거절하지.”

“희생이 아니에요. 저는 크레치만을 상대로 승리할 거거든요. 발트레에는 대륙 최고의 검사가 있잖아요.”

칼립스는 떨떠름해했다.

그는 봉인구를 여러 개 착용할 정도의 대단한 마법사였다.

그런 그의 눈에는 소드마스터도 탐탁지 않아 보이는 듯했다.

“영웅 말인가.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한들 드래곤을 상대하기엔 무리다. 평범한 검으론 비늘조차 뚫지 못할 테니.”

비록 검이 부러졌지만, 원작에서 루크는 크레치만을 쓰러뜨렸다.

새삼스레 루크가 얼마나 강한지 와 닿았다.

알트페리아는 자신이 가진 비장의 수를 하나 밝히기로 했다.

어지간하면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었지만, 죽을 각오를 끝마친 사이몬 공작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초대 소드마스터인 재커리에 대한 이야기는 아시죠?”

“그래. 마물을 경계 밖으로 밀어 내 세상을 구한 영웅이지.”

“그가 사용했던 검 말이에요. 최근에 제가 찾았어요.”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던 칼립스가 눈을 크게 떴다.

재커리의 드래곤 슬레이어 소드는 오라를 버틸 수 있는 특별한 광물로 만들어졌다.

검을 지니는 것만으로도 힘이 증폭되기에 많은 검사가 탐을 냈지만,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자세한 건 비밀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드래곤을 쓰러뜨린 검을 대륙 최고의 검사가 지녔다는 것이죠.”

“…….”

“그러니 크레치만 퇴치는 발트레에게 맡겨주세요.”

칼립스는 손끝으로 찻잔을 톡톡 쳤다.

아직 봉인이 완전히 풀리지도 않았는데 크레치만의 압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재앙과도 같은 드래곤을 쓰러뜨릴 방법은 자신이 희생하는 것뿐이었다.

영주로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숙명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덤덤히 의무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는데 살아날 방법이 보이니까 주저되었다.

알트페리아는 흔들리고 있는 칼립스에게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다.

“저는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을 거예요.”

칼립스가 자기희생을 선택한 이유는 가장 피해가 적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자신 하나만 죽으면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도 피해 보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결정을 내린 칼립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폐하껜 내가 직접 말씀드리겠다.”

“아니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황명은 거절하겠다고.”

“음?”

“아니, 이왕이면 동부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 주세요. 황제께서 제게 연락조차 하지 못하게!”

* * *

크레치만의 봉인이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제국 전역에 퍼지면 혼란만 일으킬 뿐이다.

그렇기에 정보를 최대한 차단하기로 했다.

칼립스와 같은 이유로 재판 이후 소문 때문에 에드나 항구를 조사했다가 바다가 녹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귀족들 또한 황명이 떨어져 발언을 조심하였다.

그렇게 정보를 최대한 감춘 칼립스는 황제와 은밀하게 독대했다.

칼립스의 설명을 듣던 황제가 물었다.

“크레치만의 힘이 강해졌다고 하지 않았나?”

며칠 전만 해도 막아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고 했는데.

“완벽하게 봉인이 풀리기 전이라 제대로 힘을 가늠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조사한 결과 생각보다 힘이 약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 크레치만 토벌은 동부 홀로 맡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봉인 직전 크레치만이 저주를 퍼부었지. 봉인이 풀리는 대로 황실의 피를 끊겠다고. 동부에서 크레치만을 막아내지 못하면 그 괴물은 곧장 제도로 날아올 거고, 걷잡을 수 없이 피해가 커질 것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공작.”

“예, 폐하.”

“동부의 힘만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이 확실한가?”

칼립스는 잠깐 주저했다.

크레치만을 상대하는 건 발트레였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는 알트페리아가 서야 하며, 답 또한 그녀가 해야 한다.

그는 알트페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발트레의 공은 모두 사이몬 공작님께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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