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크리스털 크라운 오너인 로저필드 백작의 신경은 요즘 옆 가게인 골든 페어리에 온통 쏠려 있었다.
찝찝했다.
하필 골든 페어리의 주인이 알트페리아라서.
‘그녀의 다음 목표는 나인가?’
앨런은 물론 부인까지 알트페리아에게 당했다.
왠지 다음 표적은 자신인 것 같았다.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 당당하게 굴면 될 텐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왠지 모를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이것저것 생각해 봤지만, 딱히 뭔가 떠오르진 않는다.
애초에 자신은 알트페리와 앨런의 관계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와도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발트레 공작 부부가 작고하여 지참금 얘기를 알트페리아에게 꺼낼 수밖에 없었는데.
“러셀 후작 가문의 며느리는 지참금으로 광산을 세 개나 가져왔다지. 앨런은 차남이 아니라 삼대독자이니, 깊게 생각해 봐라.”
기억나는 대화라고는 이게 다였다.
실제로 알트페리아는 상당한 지참금을 준비했다.
로저필드 백작은 그녀가 건네준 지참금을 가지고 사업을 확장했고.
그런데 약혼이 파기되는 바람에 지참금이 공중에 붕 떠버렸다.
‘돌려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는 그 돈을 위약금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한 쪽은 알트페리아의 발트레니.
그러니 당당하게 가슴을 펴도 될 텐데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에 크리스털 크라운 매장에는 나가지 않고 있었다.
혹여 알트페리아와 마주칠까 봐.
그렇게 필사적으로 알트페리아를 피하던 로저필드 백작은 길을 걷다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차에 붙어 있는 이상한 그림을 통해서.
제도에는 누구나 빌릴 수 있는 공용 마차가 존재한다.
투박한 갈색의 밋밋한 모양이 특징인 마차인데 어느 날부터 널찍한 문짝에 이상한 게 붙었다.
찻잔에 앉은 요정 그림은 골든 페어리의 간판이고, 웬 글귀가 함께 쓰여 있는데.
<골든 페어리에서 첫눈을 맞이하세요!>
<지금 당장 겨울을 찾아볼까요? ― 골든 페어리>
날씨가 더워져서 그런가.
눈과 겨울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저 문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졌다.
‘핫!’
로저필드 백작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골든 페어리는 경쟁 가게였다.
그런 가게가 뭔가 수를 쓰고 있다면 경계하는 게 마땅한데 호기심이나 가지다니.
꽃잼으로 만든 마카롱은 아주 잘나가고 있었다. 반응도 여전히 좋으니 골든 페어리에 관한 관심은 끄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크리스털 크라운의 대기 줄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가게에 앉아 있는 손님마저 얼마 없게 된 것이다.
사라진 손님은 모두 옆 가게로 가버렸다.
골든 페어리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그것을 증명했다.
* * *
딸랑―
골든 페어리의 입구에 달아놓은 종이 울리며, 기대감에 잔뜩 찬 영애들이 가게 안에 들어왔다.
매니저인 밀리아가 그녀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골든 페어리입니다.”
“여기서 첫눈을 볼 수 있죠?”
“새로 나온 메뉴를 고르시면 첫눈을 만나실 수 있어요.”
“얼른 주문해야겠어요!”
귀족들은 밀리아의 안내에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봤다.
처음 보는 메뉴지만, 요새 귀족들 사이에서 많은 말이 오가고 있어서 들은 것이 많았다.
그녀들은 서로의 생각을 조율하여 각자 마음에 드는 메뉴를 한 가지씩 골라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을 흔들었다.
“찾으셨습니까?”
“망고랑 딸기 하나씩 주문할게요!”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들이 주문한 망고빙수와 딸기빙수가 나왔다.
정교한 크리스털그릇 안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모아놓은 듯한 얼음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그 위로 한입 크기로 잘 썰린 과일이 듬뿍 올라가 있었다.
“진짜 눈을 모아둔 것 같아요!”
“모습은 같아도 맛은 눈이랑 전혀 다르답니다.”
“어머, 영애께선 눈을 드셔보셨어요?”
“어릴 때 눈밭에서 장난치다가 넘어져서 눈을 잔뜩 먹었지요. 차갑기만 하지 아무 맛도 나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빙수는 신기하게도 단맛이 나요!”
설명을 듣던 영애가 딸기빙수를 조금 덜어 먹었다.
“와, 정말 눈에서 단맛이 나네요. 과일이랑 잘 어울려요.”
빙수를 서빙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밀리아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나온 소스를 끼얹어 드셔보세요.”
영애들의 시선이 빙수 옆에 놓인 작은 소스 병으로 향했다.
그녀들은 밀리아가 시킨 대로 꾸덕꾸덕하고 하얀 소스를 끼얹고, 빙수를 맛봤다.
“어머, 훨씬 달아졌어요.”
“고급스러운 단맛이 나요!”
단맛이 한층 더 강해졌다.
“꿀이랑은 전혀 다른 단맛이 나요.”
“이 소스는 뭔가요?”
밀리아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소스는 알트페리아가 특별히 개발한 것으로, 고소함이 섞인 단맛이 난다.
“저희 가게의 오너님이 직접 개발하신 연유라고 해요.”
“계속 끼얹어 먹고 싶을 정도로 질리지 않아요.”
“정말요. 이런 소스를 개발하시다니, 골든 페어리의 오너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렇죠? 빙수도 그분이 만들어내신 거예요!”
밀리아는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녀는 연유를 처음 맛봤을 때부터 이건 되는 상품이라고 느꼈다.
꿀은 특유의 꽃향기를 머금었긴 하지만, 맛이 진한 과일 같은 재료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알트페리아가 개발한 연유는 과일에 딱 잘 어울리는 달콤한 소스여서 빙수에도 딱 맞았다.
비단 빙수뿐만 아니라 웬만한 디저트에는 뭐든 어울릴 것 같았다.
활용도 높은 소스를 개발하다니 정말 대단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연유 덕분에 앞으로 디저트 시장이 좀 더 다양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 밀리아였다.
* * *
요즘 알트페리아는 수시로 귀가 간질간질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골든 페어리의 신 메뉴로 빙수를 소개하고 나서부터 그랬다.
뭐, 빙수가 잘나가고 있다고 하니 다들 칭찬하는 모양이었다.
빙수는 예상 이상의 효과를 보여줬다.
차가운 빙수를 먹은 다음에는 따뜻한 차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 덕에 기존에 팔고 있던 블렌딩티도 함께 잘 팔려서 알트페리아의 계좌에는 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시스템> 현재 보유 재산: 1,000,000,000 르블라]
[<시스템> 모든 능력치가 정상화합니다!]
[<시스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시스템> ‘돈의 힘(패시브 스킬, F랭크)’이 E랭크로 랭크업 가능해졌습니다!]
크으, 드디어!
허약 체질에서 벗어났다!
스킬 랭크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랭크를 올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보유 재산이 0이 되어버린다.
[돈의 힘: 패시브 스킬]
랭크: F
효과: 보유한 재산이 많을수록 강해집니다.
※ 보유한 재산은 계좌의 잔액과 현금을 더하여 계산합니다.
※ 보유한 재산이 10억 르블라 이하일 때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 10억 르블라를 소모하여 랭크를 올릴 수 있습니다.
※ 보유한 재산의 잔액이 0르블라일 때 사망합니다.
잔액이 0이 되어 사망하는 건 사양이야.
지금 당장은 지긋지긋한 허약 체질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기뻤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아!’
힘이 넘쳐나는 느낌이랄까.
F랭크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업그레이드를 하면 어느 정도일지 기대가 된다.
몸이 가뿐해진 것만으로도 만족이지만, 이왕이면 더 강해지는 편이 좋았다.
이 세계는 답도 없는 피폐물 소설이니까 몸을 지킬 수단은 뭐든 얻어두면 좋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랭크업을 하기에는 정보가 없었다.
어느 정도 강해지는지 알아야 투자할 맛도 나니까.
“랭크를 올리면 어느 정도 강해지는 거야?”
[<시스템> F랭크는 슬라임 킹의 수준과 비슷합니다!]
“좀 알아듣기 쉬운 거랑 비교해. 예를 들어 기사들의 능력이라든지!”
[<시스템> 의견을 수용합니다!]
말은 잘 들어서 좋다.
[<시스템> F랭크는 정식 기사의 수준과 같습니다!]
오, 요컨대 수행을 막 끝낸 기사 수준이라는 거였다.
이 정도라면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은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E랭크는?”
[<시스템> E랭크는 기사단장의 수준과 같아집니다!]
10억 르블라가 들어간 만큼 효과는 충분하다는 거였다.
E랭크가 기사단장 수준이라면, D, C, B, A. 더 나아가 S급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대로 강해지면 내가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가게 현황을 확인했다.
요즘은 가게의 모든 층이 꽉 차고, 대기 줄도 길었다.
골든 페어리 하나로는 손님을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제 슬슬 그걸 해봐도 되겠는걸?’
테이크아웃!
원래 빙수는 포장으로도 많이 이용한다.
그러려면 적절한 용기를 개발해야 한다.
포장 용기를 미리 개발해 두면 나중에 커피 장사를 시작했을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종이에 왁스를 바르면 되지?’
최초의 종이컵은 그렇게 발명했다던데.
하지만 왠지 종이컵은 내키지 않는다.
기발한 발명품인 건 분명하지만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용기는 곧 환경 문제로 직결된다.
분리수거 개념이 없는 세계에서 종이컵만 골라다 버리라고 할 수도 없고, 길가에 하얀 종이컵이 나뒹구는 모습도 보기 싫었다.
르블레아에는 마법이 존재한다.
그러니 종이컵을 대신할 수 있는 일회용 용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 *
칼립스는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심장이 두근대는 게 심상치가 않아서 의원을 불렀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단다.
병이 아니란 거였다.
문제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정상이 되자, 다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것.
알트페리아가 말했었다.
검은 음료가 잠을 쫓아주는 거라고.
나른한 몸을 푹신한 의자에 눕힌 칼립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마법사가 하나 찾아왔다.
“공작님, 발트레 소공작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소공작이?”
“예, 요새 자주 연락이 오는군요.”
왠지 알트페리아와의 만남이 마법사들에게 다른 의도로 비쳐질 것 같았다.
괜스레 찔린 칼립스가 빠르게 덧붙였다.
“크레치만의 봉인 때문에 그렇다. 그녀가 에드나 항구의 소유자니까.”
“아, 그랬지요! 마탑에 찾아오라는 답장을 보낼까요?”
잠을 쫓아주는 검은 음료를 마시려면 직접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직접 가지.”
발트레로 갈 생각을 하자 칼립스의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음료를 마실 기대감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