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에드먼드 후작은 침착하게 알트페리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후계자님께서도 황당하시겠죠. 다시는 발트레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박차고 나간 자가 이렇게 돌아오겠다고 하니, 당연히 뻔뻔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
“하지만 몸은 떠났어도 마음은 계속 발트레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발트레는 제 고향이니까요.”
알트페리아는 에드먼드 후작이 발트레 영지를 떠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접니까, 앨런입니까. 선택하십시오, 후계자님!”
“당연히 앨런이지.”
이런 말이 오간 바로 다음날.
에드먼드 후작은 식솔을 이끌고 발트레 영지를 떠나버렸다.
그 후로 리암과 연락하지 못하게 막을 정도로 철저하게 거리를 뒀다.
이대로 쭉 독립한 하나의 가문으로 활동할 생각일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먼저 할 줄이야.
‘나야 땡큐인데.’
마침 에드먼드 가문에 여러 일을 맡긴 참이었다.
도로 가신이 되어준다면 관리가 수월해질 것이다.
반면 에드먼드 가문으로서는 별다른 장점이 없었다.
가신은 영주에게 세금을 낸다.
대신 영주에게 보호받긴 하지만, 에드먼드 후작도 잘 알고 있다시피 현재 발트레에는 제대로 된 기사단이 없었다.
발트레는 가신에게 아무런 혜택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의도가 뭐지?’
무엇을 원하길래 이렇게 접근하는 걸까.
“후작님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다만 좀 더 진실한 마음을 보여주셨으면 해요.”
솔직하게 말해 보라고.
“앞으로 많은 일을 하실 듯하니,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상인으로서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후작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돈 버는 맛을 아시는 분이 구경만으로 만족하다뇨. 그럴 리 없으실 텐데요.”
정곡을 찔렀는지 에드먼드 후작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하하하!”
그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 이미 제 속마음 같은 건 속속들이 아시는 모양입니다.”
“저도 돈 버는 맛을 알아버려서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소후작님과 함께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 다시 발트레 소속이 되어 굳건한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리암을 통해 자신의 움직임을 보고받아 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골든 페어리의 엉망이 될 뻔한 마카롱 사업을 수습한 이야기를 듣고 믿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골든 페어리 프랜차이즈 관리뿐만 아니라 앞으로 할 다른 일까지 도맡고 싶다고, 동업을 제안하는 걸 테지.
동업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을 찾고 신뢰를 쌓는 것보다는 에드먼드 후작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좋을 터였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에드먼드 후작이 한마디 덧붙였다.
“발트레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건 진심입니다. 저는 발트레의 땅을 사랑하니까요.”
그 점이야말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알트페리아가 어린 시절, 에드먼드 후작은 종종 발트레 본성에 찾아왔다.
“척박한 땅이지요. 하지만 전 이 하얀 땅이 마치 도화지 같아서 좋습니다.”
“도화지?”
“예,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발트레가 어떻게 변할지는 전적으로 후계자님께 달렸습니다.”
에드먼드 후작은 어린 알트페리아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녀가 만들어나갈 발트레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알트페리아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앨런에게 푹 빠져 제 일을 내팽개쳤다.
앨런과의 데이트를 위해 발트레 영지를 두고 제도에서만 생활하기도 했었지.
에드먼드 후작은 엉망이 되어가는 발트레 땅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고향을 등지고 떠난 거였고.
엉망이 된 것들이 이제야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기대하세요. 차가운 얼음 땅이 어떻게 바뀔지.”
그 말에 후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곤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북부의 주인에게 영광을.”
북부에서 가신이 가주에게 올리는 인사 방법이었다.
그렇게 발트레를 떠났던 충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 * *
사업을 확장하려면 상단이 필요했다.
쓸 만한 유통망을 구축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상단을 운영 중인 에드먼드 가문과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이게 웬 횡재야.’
그런데 독립했던 에드먼드 가문이 도로 가신이 되어 동맹이 견고해졌다.
앞으로 마음껏 사업을 키워나가도 될 것 같았다.
에드먼드 후작이 떠나고, 알트페리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셨나요, 소공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에서는 에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델은 혼자였다.
늘 붙어 있던 리베르트가 겉보기와 달리 부상이 심해 회복할 때까지 휴가를 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붉은 로브 시절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붉은 로브.
한때 제도를 시끄럽게 만들던 살수의 이름이었다.
‘에델의 활동명이지.’
발트레의 백영 소속의 에델은 한때 붉은 로브라는 이름의 살수로 활동했다.
약자를 돕겠다며 악인들을 처단하고 다닌 것이다.
‘사춘기라 방황했다던데.’
실컷 날뛴 다음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다시 백영 소속으로 돌아왔다.
“붉은 로브 말이야? 이미 손 씻었잖아.”
앞으로 외부의 의뢰 같은 건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에델이 양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다시 옛날 일을 시작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그 일에서 손 뗄 때 뒷골목의 이들에게 경고를 하나 했었거든요.”
“어떤?”
“무슨 일이 있어도 발트레는 건드리지 말라고요. 혹여 의뢰가 들어온다면, 저한테 바로 알리라는 말도 덧붙였어요!”
그냥 손 씻고 관둔 줄 알았는데 업계 종사자들에게 주의를 준 모양이었다.
붉은 로브에게 경고받은 살수 시절에 알고 지냈던 이들이 연락했다는 뜻은, 누군가 발트레를 공격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만으로도 죄스럽지만, 최근 소공작님을 목표로 한 암살 의뢰가 들어온다고 해요.”
암살 예고를 들었지만 알트페리아는 태연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제도의 암살자들은 그 누구도 저 의뢰를 맡지 않을 거란 확신이 서니까.
에델이 당당하게 가슴을 쭉 내밀었다.
“소공작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무서워서 아무도 의뢰는 받지 않을 거예요!”
겁을 상실한 누군가가 의뢰를 받아들인다 해도 발트레의 경비를 뚫긴 힘들 것이다.
설령, 경비를 뚫는다고 해도 그녀의 곁에는 시녀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의뢰자는 누구야?”
“신분을 밝히지 않아서 정체는 몰라요. 새치가 많은 붉은 머리를 가진, 꽤 키가 큰 중년 남자라고 하더군요.”
붉은 머리라고 하니까 누군지 딱 알겠다.
‘로저필드 백작이네.’
크리스털 크라운은 마카롱의 왕좌에서 내려오기 싫은지 한동안 신 메뉴를 잔뜩 내놓으며 공격적으로 나왔다.
그러나 갖은 노력을 다해도 골든 페어리와의 격차는 나날이 커지기만 했다.
정정당당하게 이길 수 없단 걸 깨달았는지, 암살 의뢰라도 넣은 모양이었다.
‘정말 한심한 사람이야.’
자신은 발트레 소공작이었다.
제국의 4대 공작 가문의 후계자를 건드린 죄는 쉽게 넘어갈 수 없다.
저번 재판처럼 배상금 문제로 끝나지 않고 큰 처벌을 받을 것이다.
가문을 걸고 도박까지 하려 들다니.
역시 앨런의 아버지답다 할까.
“로저필드 백작님을 계속 주시해서 증거를 모으도록 해.”
리베르트에게 배운 첩보 기술을 제대로 써먹을 때가 온 거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정보를 모을게요!”
에델의 눈이 평소보다 훨씬 더 이글이글 타올랐다. 리베르트가 다쳐서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알트페리아 또한 이번 일을 그냥 지나갈 생각은 없었다.
로저필드 백작 때문에 마카롱 장사가 엉망이 될 뻔했다.
그런데 암살 시도까지?
그가 먼저 싸움을 걸었으니 피할 생각은 없었다.
알트페리아는 이번 기회에 로저필드 백작 가문과의 악연을 완전히 끊어버릴 것이라 다짐했다.
* * *
일과를 끝낸 알트페리아는 목욕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넓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털썩―
10억 르블라를 달성한 덕분에 ‘돈의 힘’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한 알트페리아는 온종일 돌아다녔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베개를 끌어안고 뒹굴뒹굴하던 그녀는 루크의 자리까지 굴러갔다.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혼자 쓰는 침대가 유독 거대하게 느껴졌다.
‘으음.’
알트페리아는 루크가 준 귀걸이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앞으로 계속 적이 생기겠지?’
로저필드 백작은 원래부터 자신을 싫어했으니까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사업을 확장하다 보면 다른 사람과도 많이 부딪치게 될 것이다.
‘미리미리 손을 써놔야겠어.’
돈을 벌었으니까 어느 정도 사회에 환원하여 좋은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보통 귀족은 신전에 후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발트레 소공작이 아닌 가문의 이름으로 후원하고 싶었고, 전용으로 후원 파티를 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발트레 가문이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부자라고 마냥 좋은 건 아니네.”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것 같았다.
중얼거리던 그녀의 눈앞에 푸른색 시스템창이 떴다.
[<시스템> 돈이 많아서 고민인 당신! 스킬 랭크업에 투자하는 건 어떠십니까?!]
최근 알트페리아의 행보를 본 시스템은 그녀를 따라 광고 문구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스킬에 투자하면 뭐가 좋은데?”
[<시스템> 남편보다 강해져 부부싸움이 두렵지 않을 겁니다!]
“전혀 끌리지 않아.”
스킬 랭크가 올라가면 강해진다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다.
알트페리아의 지갑을 열기엔 노력이 부족했다.